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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서양사, 6부 열매① - 2장 유럽을 낳은 전쟁, 크롬웰 왕조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6부 열매① - 2장 유럽을 낳은 전쟁, 크롬웰 왕조

건방진방랑자 2022. 1. 9.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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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롬웰 왕조

 

 

찰스 1세는 의회의 요구를 최대한 수용하겠다는 자세였으나 의회의 태도는 생각한 것보다 훨씬 강경했다. 의회는 왕이 자의적으로 행사하던 사법권과 종교재판권을 제한했고, 두 명의 흉적, 로드와 스트래퍼드를 처단하라고 요구했다. 어쩔 수 없이 찰스는 전횡의 도구였던 성실법원(星室法院, Star Chamber)튜더 왕조의 개창자로 왕권 강화에 힘쓴 헨리 7세는 웨스트민스터 궁전 내에 특별 법정을 만들어 운영했다(‘성실이란 이름은 이 방의 천장에 별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영국의 법체계는 대륙보다 크게 뒤떨어져 있어 일종의 관습법인 코먼로(common law)가 지배했으므로 성실법원은 이 결함을 극복하려는 의미가 있었다. 이것은 영국사의 한 가지 특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성실법원으로 알 수 있듯이, 영국은 중세를 벗어난 16세기 초까지도 왕권과 사법권이 일치될 만큼 후진적이었다. 게다가 헨리 8세의 수장령으로 왕이 종교권력마저 얻게 된 것도 일종의 후진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정치권력, 사법권력, 종교권력을 모두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왕은 의회 하나 때문에 끝내 전제정치를 완성하지 못하고 말았다과 고등종무관재판소를 닫았으며, 스트래퍼드를 처형하고 로드를 런던탑에 가두는 것으로 읍참마속을 대신했다. 물론 왕이 부과한 각종 불법 세금은 금지되었다.

 

영국 국교회에서는 국왕이 곧 교황이므로 왕권의 약화는 국교회의 약화를 의미한다. 사실 그동안에도 종교 문제는 정치의 혼란에 가려 표면으로 부상하지 않았을 뿐 결코 해소된 것이 아니었다. 정치적 쟁점이 소강상태에 접어드는 틈을 타서 이윽고 종교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하지만 그 발단은 청교도가 아니었다. 1641년 전통적 가톨릭권인 아일랜드에서 가톨릭 연맹이 결성되어 아일랜드 독립의 기치를 높이 올린 것이다(대륙에서는 신교와 구교의 갈등만 일어난 데 비해, 영국에서는 국교회가 신교인 청교도와 구교인 가톨릭을 모두 배척했으므로 종교 갈등의 양상이 복잡했다).

 

불안한 평화를 이루고 있던 찰스와 의회는 이 아일랜드 반란을 진압하는 문제를 놓고 결정적으로 갈라선다. 의회가 진압군의 지휘권을 왕에게 내주지 않자 찰스는 독자적으로 군대를 편성했다. 이제 국왕과 의회가 별도의 군대를 거느렸으니 군사적 충돌은 필연적이었다.

 

양측은 1642년부터 충돌의 계기가 된 아일랜드 문제는 아랑곳하지 않고 즉각 서로를 상대로 삼아 전쟁에 들어갔다. 이것을 청교도혁명이라고 부르는데, 실상 혁명이라기보다 내전이었다. 대륙에서 30년 전쟁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부터 영국은 격렬한 내전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대륙의 전쟁이나 영국의 전쟁이나 모두 종교가 개입되어 있었으니 가히 유럽 세계의 마지막 종교전쟁의 무대라 할 만했다.

 

정치권력은 의회가 장악하고 있었으나 막상 전쟁이 벌어지니 역시 왕은 왕이었다. 개전 초기 왕당파는 전투에서 연승을 거두면서 곧 그간의 세력 약화를 만회할 듯했다. 그러나 시대가 인물을 낳는 법, 의회파에는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이라는 인물이 혜성같이 등장했다. 의회 의원이었던 그는 동부에서 청교도들을 모아 강력한 철기군을 조직하고 1644년부터 착실히 전세를 역전시키기 시작했다. 이들이 승리하지 않았다면 청교도혁명이라는 이름도 없었을 것이다. 사실 이 내전에서 종교는 이미 정치의 뒷전으로 물러앉았을 뿐 아니라 종교의 대립에서도 가톨릭과 국교회가 주인공이지 청교도는 아니었다.

 

 

아일랜드 문제의 시작 1641년 영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학살극이 아일랜드 북부의 얼스터에서 일어났다. 그림에서 보듯이 가톨릭 세력이 3000여 명의 신교도들을 무차별 살해한 사건이다. 결국 이 사건은 청교도혁명의 한 계기가 되었으며, 혁명으로 집권한 크롬웰은 아일랜드의 가톨릭교도들을 학살하는 것으로 보복했다. 그러나 피의 빚은 그것으로 해결되지 않고 이후 영국과 아일랜드의 갈등 요소로 남아 20세기에까지 이르게 된다.

 

 

혁명은 절정으로 치달았다. 1648년 크롬웰은 찰스를 포로로 잡았고 이듬해에는 그를 처형해버렸다. 이제까지 유럽 역사에서 국왕이 암살된 경우는 있었어도 혁명 세력에게 공개적으로 처형된 경우는 없었다. 그만큼 혁명의 강도는 유례없는 것이었다.

 

왕이 없으니 이제 영국은 형식상으로 왕정이 아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왕정이 유지된다. 누가 이 되었을까? 바로 혁명의 지도자인 크롬웰이었다. 그는 1653년 군대를 동원해 무력으로 의회를 해산하고의회파가 승세를 탈 때부터 의회는 급진적인 파와 온건한 파로 분열되어 다툼을 벌였다. 크롬웰이 집권했을 때는 이미 온건파가 쫓겨나 급진파의 일부 의원들만 남아 있었다. 그래서 이 의회를 럼프(rump) 의회, 즉 잔여(殘餘) 의회라고 부르는데, 거의 의회의 기능을 하지 못했다스스로 호국경(護國卿, Lord Protector)이라는 지위에 올라 국정을 맡았는데, 사실상 왕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굳이 왕정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면 때 이르게 들어선 군사독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657년 다시 구성된 의회가 그에게 차라리 왕위에 오를 것을 권했을 때 크롬웰은 그 제의를 거부했다. 하지만 이듬해 그가 죽고 나서 그의 아들 리처드 크롬웰이 호국경의 지위를 물려받게 되므로 왕위의 세습이나 마찬가지다.

 

개인적으로는 독실한 칼뱅주의 청교도였던 크롬웰은 청교도 이념에 입각한 정치를 펼쳤다. 이런 경우 대개는 건전하고 검소한 생활을 엄격하게 강조하는 한편 거기에 어긋나는 요소는 일체 용납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일종의 문화 독재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음주와 도박을 금지하는 등 국민 생활을 철저하게 압박하는 공포정치로 일관했다. 거기까지는 괜찮았으나 아일랜드의 가톨릭을 학살과 토지 몰수 등 군홧발로 철저히 짓밟은 것은 두고두고 분쟁의 불씨가 되었다. ‘크롬웰의 저주라는 말로 아일랜드인의 뇌리에 깊이 각인된 그 만행은 20세기 북아일랜드 독립 운동에까지 이어지게 된다(대륙에서는 가톨릭이 신교를 탄압한 데 반해 당시 영국은 신교가 가톨릭을 탄압하는 희한한 상황이 벌어졌다).

 

그러나 크롬웰 왕조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의 아들 리처드는 아버지의 지위만 물려받았을 뿐 카리스마까지 받지는 못했으며, 국민들은 벌써 공포정치에 신물이 나 있었다. 결국 그는 8개월 만에 자진 사퇴 형식으로 물러났고, 다시 럼프 의회가 소집되어 찰스 1세의 아들을 왕으로 옹립했다. 전쟁까지 벌인 왕과 의회가 크롬웰 왕조의 치하를 계기로 타협을 이룬 것이다. 영국사에서는 이 사건을 왕정복고라고 부르지만, 엄밀히 말하면 크롬웰 왕조에 의해 잠시 왕위가 찬탈되었다가 스튜어트 왕조가 다시 이어졌다고 보아야 한다.

 

 

국왕의 처형 역사상 암살된 국왕은 많아도 공개 처형된 국왕은 드물다. 1649년 찰스는 바로 그 드문 사례가 되었다. 단두대가 발명되지 않은 시대라 도끼로 참수했는데, 단상의 두 인물이 잘린 찰스의 머리와 도끼를 들고 있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화재를 부른 불씨

국제전과 복마전

사라진 것과 생겨난 것

정치와 종교의 도가니

크롬웰 왕조

근대의 문턱에 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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