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의 문턱에 들다
한바탕 홍역을 치렀으니, 하마터면 영원히 잃을 뻔한 왕위를 되찾은 찰스 2세(1630~1685, 재위 1660~1685)나 ‘근본도 없는 왕조’를 섬기게 될 뻔한 의회 측이나 피차 조심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아직 영국의 왕과 의회는 합일을 이루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양측은 완만하지만 확고하게 각자 자신의 입지를 강화해나갔다. 찰스는 국교회를 강화하기 위해 총교적으로 신교보다 더 가까운 가톨릭을 중흥시켰고, 그 일환으로 프랑스의 루이 14세와도 친교를 맺었다(나중에 보겠지만 프랑스는 30년 전쟁 이후 다시 가톨릭으로 되돌아왔다). 또 의회는 최초로 여당과 야당의 구분이 생겨났다. 여당인 토리당은 예전의 왕당파였고, 야당인 휘그당은 예전의 의회파였으니 성격이 크게 달라진 것은 없지만, 그래도 이것은 근대식 정당 제도로 향하는 중요한 길목을 이룬다.
신교를 반대하고, 프랑스를 모델로 삼고, 의회를 부담스러워한다. 이것은 바로 60년 전 찰스 2세의 할아버지 제임스 1세의 정책이며, 바로 그 시대의 상황이다. 따라서 그때의 문제는 아직도 전혀 해결된 게 없었다(크롬웰 치하가 ‘허송세월’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겠다). 결국 제임스 1세의 치세에는 문제가 잠복해 있는 상태로 그런대로 평온히 지나갔으나 그다음 찰스 1세에게서 대형사고로 터져 나왔다. 지금의 찰스 2세가 당시의 제임스 1세라면, 찰스 1세의 역할을 한 것은 제임스 2세였다. 찰스 2세의 동생, 그러니까 찰스 1세의 둘째 아들로 왕위를 계승한 제임스 2세(James Ⅱ, 1633~1701, 재위 1685~1688)는 불과 3년의 재위 기간에 비해 역사적인 업적을 남겼다. 바로 명예혁명이다. 물론 그가 의도한 혁명은 결코 아니다.
제임스 2세는 형보다 한술 더 떠 노골적인 가톨릭으로 선회했다. 그의 성향을 알고 있었던 의회는 그의 즉위부터 반대하고 나섰으나【사실은 토리(Tony)와 휘그(Whig)라는 이름도 이 사건 때문에 생겨났다. 당시 의회에서는 제임스 2세를 왕위 계승자로 삼자는 의견과 그에 반대하는 의견으로 엇갈렸다. 당연히 양측은 서로를 비난하면서 좋지 않은 뜻의 별명으로 불렀다. 즉 찬성파는 반대파를 휘그당이라고 불렀고, 반대파는 찬성파를 토리당이라고 불렀다. 휘그는 스코틀랜드의 폭도였고, 토리는 아일랜드의 폭도였으니 둘 다 ‘폭도들’이 된 것이다】, 찰스 2세에게 후사가 없었고 싶둘의 노인네가 하면 얼마나 하랴 싶었다. 게다가 지긋지긋한 내전의 경험이 아직도 생생한 판에 조심스럽게 다져온 평화 기조를 해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아들이 없던 그가 1688년 쉰다섯의 나이로 아들을 보게 되자 상황이 급변했다. 의회는 긴장했다. 토리당과 휘그당은 제임스의 아들을 왕위 계승자로 삼으면 안 된다는 것에서 모처럼 하나로 뭉쳤다. 그들은 비밀리에 대륙으로 사람을 보내 새로운 왕위 계승자를 모셔오기로 했다. 새 왕의 후보는 제임스의 사위인 네덜란드 총독 오라녜 공 빌렘이었다【이 빌렘은 16세기에 네덜란드의 독립을 이끈 빌렘 1세의 후손이다. 그런데 대륙에서 영국의 왕이 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온 ‘윌리엄’이라면 또 한 명이 있었다. 바로 11세기에 영국 왕이 된 노르망디 공 윌리엄(1권 358~359쪽 참조)이다(그의 이름을 프랑스식으로 읽으면 ‘기욤’이 된다). 이 두 명의 윌리엄, 기욤과 빌렘은 영국 역사의 중요한 장면에서 외국인으로서 영국 왕이 되는 기연을 맺었다】.
당시 빌렘은 프랑스 루이 14세의 강력한 패권 정책에 맞서 싸우고 있었다. 제임스의 딸 메리와 결혼한 이유도 실은 영국을 자기 측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 판에 영국 왕위를 제안받다니 이것은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 온 격이었다. 그는 즉각 1만 3000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바다 건너 런던을 향해 진군했다. 갓난아기를 안고 싱글벙글하던 제임스는 사위가 쳐들어온다는 소식에 아연실색하여 프랑스로 내뺐다.
이듬해인 1689년 1월 의회는 영국 왕위가 공석이 되었음을 공식적으로 선언하고 빌렘과 그의 아내인 메리를 새 왕으로 옹립했다(영국 의회는 왕위 계승의 정통성 문제 때문에 스튜어트 가문의 혈통만큼은 유지하고 싶었으므로 부부의 공동 승계를 결정했다). 영국의 왕이 되었으니 이름도 영국식으로 표기해야 한다. 그래서 빌렘은 역사에 윌리엄 3세(1650~1702, 재위 1689~1702)로 기록되었고, 메리는 메리 2세(1662~1695, 재위 1689~1694)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부부가 함께 영국 왕이 되는 전례 없는 일이 생겨났는데, 얼마 전에 최초로 국왕을 처형하기도 한 영국 의회로서는 별로 신기할 것도 없는 신기록이었을 게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그래서 ‘명예혁명’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영국 왕위를 얻은 윌리엄 3세로서는 영국 의회의 위력을 새삼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잖아도 의회 덕택에 왕이 된 그로서는 의회의 말을 무조건 따를 수밖에 없었다. 반면 의회는 스튜어트 왕실의 피가 섞이지 않은 외국인 왕을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었다. 서로의 의심이 맞아떨어져 의회는 의회를 무시하지 말라는 보장 각서를 내밀었고 윌리엄은 기꺼이 서명을 보탰다. 이것이 마그나카르타, 권리청원과 함께 영국 의회사의 3대 문서로 간주되는 권리장전(Bill of Rights)이다.
권리장전은 가톨릭교도를 왕위 계승자로 삼지 말고 의회를 자주 소집하라고 규정한 것을 제외하면 그 내용은 사실 앞서의 두 문서와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러나 내용보다 중요한 게 형식이다. 국왕의 선택과 즉위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영국 의회는 권리장전을 성립시킴으로써 왕권의 한도까지 통제하는 권한을 얻게 되었다. 이제 의회는 왕권보다 우위에 있음이 여실히 증명된 것이다. 대륙의 모든 나라가 일제히 왕권을 강화하는 절대주의의 시대에 영국은 일찌감치 거기서 탈피해 의회주의의 새로운 노선으로 나아갔다. 이로써 유럽은 물론 세계적으로도 최초인 근대적 입헌군주국이 생겨났다.
결과적으로 볼 때 윌리엄 3세는 의회가 권력을 장악하는 데 이용된 도구에 불과했다. 메리가 죽은 뒤 윌리엄은 단독 국왕이 되었지만 권리장전에 따라 그의 계승자는 그의 처제(메리의 여동생)인 앤(Anne, 재위 1702~1714)으로 이미 정해져 있었다. 앤은 평소에 형부를 열렬히 지지했으니 윌리엄으로서는 그나마 위안이 되었을까? 그러나 앤은 아들이 어린 나이에 죽어 후사를 남기지 못했다.
이로써 영욕의 스튜어트 왕조는 마침내 대가 끊겼다【역사적으로 보면, 스튜어트 왕조는 출범 때부터 의회와 대립했다가 결국 의회에 권력을 넘겨주는 역할을 한 셈이다. 그래도 스튜어트 왕조는 영국에 한 가지 커다란 선물을 남겼다. 스코틀랜드의 스튜어트 왕조도 얼마 못 가 대가 끊기면서 1707년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와 통합을 이루게 된 것이다(웨일스와 북아일랜드는 각각 16세기와 17세기에 잉글랜드와 통합되었다). 이때부터 비로소 오늘날과 같은 영국이 되었다】. 스튜어트 왕조의 핏줄은 당시 독일의 하노버 선제후 가문에 가 있었다. 하노버 공의 아들은 스튜어트 왕조의 개창자인 제임스 1세의 증손자(손녀의 아들)였다. 그래서 의회는 그를 데려다 조지 1세(George Ⅰ, 1660~1727, 재위 1714~1727)로 삼아 새로 하노버 왕조를 열었는데, 영어조차 할 줄 모르는 외국인 왕이 즉위했지만 어차피 왕권을 제압한 의회로서는 크게 상관없는 일이었다(그러나 그 덕분에 19세기 중반까지 영국 왕은 하노버 왕까지 겸하게 된다). 이 하노버 왕조가 오늘날 영국 왕실로 이어진다【그러나 오늘날 영국 왕실은 윈저(Windsor) 왕조라고 불린다. 그 이유는 제1차 세계대전 중 독일과 싸우던 영국이 독일식 왕조 이름을 부담스럽게 여겨 바꾸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으로 왕궁 소재지 이름을 따서 윈저라고 지었는데, 혈통은 하노버 왕조의 직계다】. 이후 영국의 왕들은 국가를 상징하는 ‘꽃’의 역할만 했을 뿐 실제 정치에 크게 관여하지는 않았다. 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라는 입헌군주제의 기본 원리가 확립된 것이다.
▲ 명예와 불명예 피를 흘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명예혁명이지만, 사실 윌리엄 3세가 된 오라녜 공 빌렘으로서는 불명예나 다름없었다. 네덜란드 총독 시절에 라이벌이었던 프랑스의 루이 14세에게서 실권 없는 왕이라는 무시를 받았을 뿐 아니라 의회의 힘으로 왕위에 오른 까닭에 입헌군주제가 성립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림은 꼭두각시 국왕 부부 메리 2세와 윌리엄 3세다.
인용
'역사&절기 > 세계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양사, 6부 열매① - 3장 자본주의의 출범,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바람 (0) | 2022.01.09 |
---|---|
서양사, 6부 열매① - 3장 자본주의의 출범, 국부의 탄생 (0) | 2022.01.09 |
서양사, 6부 열매① - 2장 유럽을 낳은 전쟁, 크롬웰 왕조 (0) | 2022.01.09 |
서양사, 6부 열매① - 2장 유럽을 낳은 전쟁, 정치와 종교의 도가니 (0) | 2022.01.09 |
서양사, 6부 열매① - 2장 유럽을 낳은 전쟁, 사라진 것과 생겨난 것 (0) | 2022.01.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