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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서양사, 6부 열매① - 2장 유럽을 낳은 전쟁, 정치와 종교의 도가니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6부 열매① - 2장 유럽을 낳은 전쟁, 정치와 종교의 도가니

건방진방랑자 2022. 1. 9.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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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와 종교의 도가니

 

 

유럽의 정치 지형을 크게 바꾼 30년 전쟁에 영국이 개입하지 못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영국 역시 대륙에 못지않은 복잡한 격변기를 맞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에스파냐 무적함대의 격파로 영국을 새로운 해상 강국으로 만들고, 셰익스피어로 대표되는 영국 르네상스를 지원한 엘리자베스 1세가 45년을 재위한 끝에 1603년 일흔 살의 나이로 죽자 튜더 왕조는 대가 끊겼다. 젊은 시절 그녀에게는 유럽의 여러 군주가 구혼했지만, 엘리자베스는 오히려 그것을 적절히 이용하면서 여러 가지 외교적 실익을 얻어냈다구혼자들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다. 통혼 정책으로 톡톡히 재미를 본 그는 엘리자베스의 배다른 언니인 메리 1세와 결혼했으면서도 그녀가 죽자 엘리자베스에게 다시 청혼했다. 그러나 메리가 그와 결혼했을 때도 외국인 남편에 대한 영국 국민들의 큰 반발을 받은 적이 있었으므로 엘리자베스는 그에 응하지 않았다. 여기에 앙심을 품은 펠리페는 군사적 침략에 나섰는데, 그 결과가 무적함대의 패배였으니 구혼의 대가 치고는 값비싼 것이었다. 그녀가 평생 독신으로 지낸 결과로 나라는 번영했으나 당연히 후사는 없었다.

 

의회는 다시 후계 문제로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헨리 8세의 한 아들과 두 딸(에드워드 6, 메리 1, 엘리자베스 1)이 연속 왕위를 잇는 동안 영국 왕실의 손은 씨가 말라버렸다. 한참을 고민하던 의회는 가까스로 튜더 왕조의 핏줄을 찾아냈다. 헨리 8세의 자손은 끊겼으므로 더 위로 올라가야 한다. 그러자 헨리 8세의 누나인 마거릿 튜더의 혈통이 보였다. 그녀는 아버지 헨리 7세의 정략결혼 정책에 따라 1503년 스코틀랜드 왕인 제임스 4세와 결혼했는데, 그 후손이 있었던 것이다. 제임스 4세의 아들인 제임스 5세 역시 정략결혼으로 프랑스 기즈 가문의 딸 마리와 결혼했다. 그는 서른 살에 죽은 탓에 별다른 치적을 남기지 못했으나 그 대신 딸 메리 스튜어트를 남겼다. 바로 그 메리 스튜어트의 아들인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James , 1566~1625)가 튜더 왕가의 유일한 혈통이었다.

 

어머니가 반역죄로 엘리자베스 1세에게 처형된 뒤 겨우 한 살에 어머니에 이어 스코틀랜드 왕위에 오른 제임스는 영국 왕가의 유일한 혈통이라는 것 때문에 가문의 원수인 영국 왕위까지 상속하게 되었다. 그래서 스코틀랜드 왕계로는 제임스 6세이지만 영국 왕계로는 제임스 1세가 된다. 외가 쪽은 튜더라도 친가 쪽은 스코틀랜드 왕조인 스튜어트이므로 이때부터 18세기 초반까지 이어지는 영국 왕가를 스튜어트(Stuart) 왕조라고 부른다.

 

 

여성 교황의 행차 영국 국교회를 처음 만든 사람은 헨리 8세였으나 그것을 실제로 안정시킨 사람은 그의 딸 엘리자베스 1세다. 엘리자베스의 시대에 확립된 영국 국교회는 교리상으로 신교를 취하고 예배 형식은 가톨릭을 취하면서 신교와 가톨릭에 양다리를 걸쳤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가톨릭과 비슷해졌다. 그림은 엘리자베스의 행차 모습인데, 가톨릭도 신교도 아닌 제3교파의 수장이라는 신분이었으니 이를테면 여성 교황의 행차인 셈이다.

 

 

새 왕조를 개창한 왕답지 않게 제임스 1세는 초장부터 반동적으로 나아갔다. 개인적으로는 어머니의 원수(엘리자베스)를 칭송하는 분위기가 영 마음에 들지 않은 데다, 그는 전통적으로 프랑스에 가깝고 대륙 문화를 숭상하는 스코틀랜드 왕실 출신이었다. 위그노 전쟁을 승리로 이끈 당시 프랑스 왕 앙리 4세는 절대왕권을 누리고 있지 않은가? 선진국 프랑스를 본받자! 사실 영국이 프랑스를 본받을 이유는 없었다. 이미 경제력에서는 결코 프랑스에 뒤지지 않았던 영국의 위치를 그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제임스 1세는 스코틀랜드의 왕으로 있던 시절에 자신이 쓴 글을 통치 이념으로 삼기로 했다. 자유 왕국의 진정한 법(The True Law of Free Monarchies)이라는 거창한 제목의 그 글은 후대에 이른바 왕권신수설이라고 알려지는 주장을 담고 있다. 사실 그로서는 그저 프랑스의 왕권을 모방하려 했을 뿐이지만 영국은 프랑스와 사정이 달랐다.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의회였다. 프랑스의 의회인 삼부회는 제도로만 남아 있을 뿐(18세기 말 프랑스 혁명 때까지) 유명무실한 상태였으나, 영국의 의회는 13세기 말 모델 의회이래 꾸준히 발전해왔던 것이다. 심지어 강력한 왕권을 가졌던 헨리 8세나 엘리자베스 1세 같은 왕들도 의회를 무시하기는커녕 국정의 대소사에 의회의 의견을 구했으며, 최소한 무시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제임스의 결정적인 실책은 수구적인 신교 박해였다. 전유럽을 휩쓸면서 프랑스에서 위그노라는 강력한 정치 세력을 이루기도 한 칼뱅주의는 영국에도 널리 퍼졌다. 특히 영국의 칼뱅교도들은 이름부터 청교도(Puritan)라고 부를 만큼 더 철저하고 근본적인 교회 개혁과 성서 중심주의를 내세웠다. 그러나 앞에서 보았듯이(97쪽의 주 참조), 영국 국교회는 껍데기를 보면 종교개혁을 통해 성립한 신교였으나 알맹이는 가톨릭과 다를 바 없었다.

 

제임스는 영국적 가톨릭에 해당하는 국교회를 강화하는 한편 청교도에 대한 강력한 탄압에 나섰다. “주교가 없으면 왕도 없다.”라는 그의 주장은 대륙에서도 사라진 케케묵은 논리였다. 하긴, 왕권을 신이 부여했다는 그의 이론을 정당화하려면 교회를 강화하는 게 지극히 당연했다. 그의 탄압에 시달린 청교도들 중에는 프랑스에서 위그노들이 그랬듯이 국외로 종교적 망명까지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덕분에 얼마 뒤인 1620년에는 102명의 청교도들을 태운 메이플라워호가 북아메리카의 뉴잉글랜드에 도착해 오늘날 미국의 기원을 이루게 되지만, 등 떠밀려 먼 타향으로 간 그들이나 국내에 남은 청교도들이나 고통스러운 삶을 산 것은 마찬가지였다.

 

 

가이 포크스 데이 영국 국교회의 탄압을 받은 것은 신교의 청교도만이 아니라 가톨릭도 마찬가지였다. 가톨릭 세력은 1605115일 의회 개회일에 화약을 폭발시켜 국왕과 왕당파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이것을 화약 음모 사건이라 부르는데, 결국 미수로 끝나고 주동자인 가이 포크스는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오늘날까지도 영국에서는 115일을 가이 포크스 데이라 부르며 국경일로 기념하고 있는데, 의회민주주의를 처음 도입한 국가에서 왕권신수설의 신봉자였던 제임스의 무사함을 지금까지도 경축하고 있다는 것은 의외다.

 

 

왕권과 의회의 대립, 국교도와 청교도의 대립, 정치와 종교에서 팽팽히 맞선 이 두 가지 대립은 점차 하나의 전선을 형성했다. 왕과 주교는 더욱 밀착되었고, 그들만큼은 아니지만 의회와 청교도도 한 몸이 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제임스는 그런 사태를 파국에까지 몰아가지는 않았다. 끝장을 보자고 덤빈 것은 모든 정책을 아버지와 같이, 그러나 그 강도는 아버지보다 높게 구사한 그의 아들 찰스 1(Charles I, 1600~1649, 재위 1625~1649)였다.

 

프랑스, 에스파냐와 크고 작은 전쟁을 끊임없이 벌이던 영국 왕실에서는 무엇보다 전쟁을 수행할 경비가 필요했다. 귀족들에게서 반강제로 돈을 빌려 충당하던 찰스는 마침내 재정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1628년에 의회를 소집했다. 그러나 이것은 의회에서도 바라던 바였다. 찰스가 재정 문제를 타개하고자 마련한 자리에서 의회는 권리청원(Petition of Right)을 들이밀었다.

 

400년 전 마그나 카르타가 탄생하던 무렵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과연 권리청원의 내용도 마그나 카르타와 거의 다를 바 없다. “국왕이 귀족들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마음대로 세금을 징수할 수 없도록 한다.”라는 게 마그나 카르타가 아니었던가? 당시에는 의회가 없었으니까 귀족들의 동의라는 표현을 썼지만, 의회가 존재하는 지금은 표현이 달라진다. 권리청원의 가장 주요한 내용은 국왕이 의회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마음대로 세금을 징수할 수 없도록 한다.”라는 것이었다. 귀족이라는 말을 의회로 바꾼 것에 불과하다. 400년 동안 영국 의회는 고작 의회의 존재를 확인한 것 이외에는 한 걸음도 전진하지 못했던 것이다(거꾸로 말하면 이 작은 한 걸음을 나아가기 위해 그토록 오랜 기간이 필요했다고도 할 수 있겠다).

 

400년 전의 존처럼 찰스도 일단 의회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제 코가 석 자인지라 당장 특별세를 얻어내는 게 시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듬해 의회가 관세의 징수를 거부하고 나서자 찰스는 그동안 품고 있던 복안을 실행에 옮겼다. 혹을 떼어주기는커녕 더 큰 혹을 갖다붙이다니? 그렇게 국왕의 행보에 엇각을 놓는 의회라면 아예 소집하지 않는 편이 낫지 않은가? 그래서 그는 이후 11년 동안이나 의회를 무시한 채 측근인 로드 대주교와 스트래퍼드 백작을 중용해 마음껏 전제정치를 펼쳤다. 물론 의회의 감시 기능이 마비되었으므로 종전처럼 세금은 국왕이 마음대로 매겼으며, 심지어 불법 과세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찰스의 아킬레스건은 또다시 그를 괴롭혔다. 이번에는 믿는 도끼가 그의 발등을 찍었다. 1637년 로드 대주교가 스코틀랜드에 영국 국교회 신앙을 강요하려다 반발을 사 스코틀랜드와 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스코틀랜드의 완강한 저항으로 전쟁은 길어졌고, 찰스는 다시 전비가 필요했다. 그리하여 1640년에 실로 오랜만에 왕의 요청으로 의회가 소집되었다. 오랫동안 소집되지 않았던 것을 시위하기라도 하듯이 이 의회는 이후 13년이나 지속되었기에 장기의회(Long Parliarnent)라고 부른다사실 1640년에는 의회가 두 차례 소집되었다. 봄에 소집된 의회는 11년 전 권리 청원이 제출되었던 때와 똑같은 상황이었다. 찰스는 돈이 궁했고, 의회는 왕의 정책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권리를 찾으려 했다. 그런데 찰스가 곧바로 의회를 해산해버렸기 때문에 이것을 단기의회라고 부른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와의 전투에서 패하면서 찰스는 그해 11월에 다시 의회의 문을 두드렸다. 이번에는 반드시 바라던 성과를 얻어 내겠다고 다짐한 그였지만 결국 그 의회의 회기 중에 자신이 비참한 최후를 맞으리라고는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꼭두각시 테러범 가이 포크스는 사실 신앙심은 독실했어도 그다지 명민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로버트 케이츠비의 사주를 받아 화약을 매설한 꼭두각시였을 뿐이다. 그림은 가이 포크스 데이에 가이 포크스의 분장을 하고 축제에 참여한 모습이다. 축제의 절정은 가이 포크스의 인형을 불태우는 행사인데, 그의 화형을 상징한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화재를 부른 불씨

국제전과 복마전

사라진 것과 생겨난 것

정치와 종교의 도가니

크롬웰 왕조

근대의 문턱에 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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