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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서양사, 6부 열매① - 5장 근대의 완성, 평민들의 세상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6부 열매① - 5장 근대의 완성, 평민들의 세상

건방진방랑자 2022. 1. 10.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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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민들의 세상

 

 

미국의 독립은 영국의 패권 전략을 저지했다는 점에서 프랑스의 왕실에 기쁨을 주었지만, 그 때문에 가뜩이나 좋지 않던 왕실의 재정은 더욱 악화되었다. 유럽도 아닌 아메리카 영국 식민지의 독립 전쟁까지 지원하느라 프랑스의 국고는 텅 비었다.

 

만성적인 재정 적자에 견디다 못한 루이 16세는 마침내 1789년에 삼부회를 소집했다. 재정난에 시달리는 왕실이 의회를 소집하는 것은 어딘가 낯익은 전술이다. 삼부회는 명색이 의회지만 1614년 루이 13세의 섭정인 마리가 소집한 이후 한 번도 소집한 적이 없었으니 (123쪽 참조) 무려 175년만의 재소집이었다. ‘바로 전의 삼부회가 소집된 때는 프랑스가 잘나가던 무렵으로 리슐리외라는 유능한 재상을 얻었으나, 이번 삼부회는 오히려 1628년 영국의 찰스 1세가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의회를 소집한 상황과 비슷했다. 더 중요한 것은 상황만 비슷한 게 아니라 결과도 그랬다는 점이다. 오만하고 독선적인 찰스가 순전히 귀족들에게서 돈을 뜯어낼 목적으로 의회를 소집한 것과 달리, 루이는 왕실의 위기와 나름대로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삼부회를 소집한 것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같았던 만큼 결과도 다를 바 없었다.

 

17895월 베르사유 궁전에서 열린 삼부회에서 가장 할 말이 많은 사람은 제3신분인 시민서양사에서 흔히 쓰는 시민이라는 말은 도시 거주자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일반 평민’, 우리식으로 말하면 국민에 해당한다. 서양의 도시들은 예로부터 독립적이고 자치적으로 발전했으며(가장 중앙 권력이 강했던 로마 시대에도 그랬다), 중세를 거치면서 그런 성격이 더욱 강화되었다. 물론 계급으로서의 시민은 근대의 산물이지이만, 그런 역사적 전통이 있기에 서양에서는 시민을 곧 국민에 해당하는 것으로 여기는 게 자연스러웠다. 사실 서양에는 우리의 국민에 해당하는 말이 없다. 이를테면 정치 연설에서도 우리는 국민 여러분이라고 시작하지만 서양에서는 시민 여러분으로 시작한다. 거꾸로 우리에게는 서양과 같은 시민의 개념이 없다. 서구 민주주의 제도가 이식된 오늘날에도 아직 우리 사회에 민주주의가 완전히 뿌리 내리지 못한 이유는 시민사회의 역사적 경험이 부재하기 때문이다대표들이었다. 그것은 당연했다. 높은 인플레와 과중한 세금, 거기다 산업혁명으로 경제력이 크게 팽창한 영국의 경제적 침략으로 가장 큰 어려움을 겪는 것은 바로 평민들이었으니까(설상가상으로 삼부회가 소집된 바로 전해인 1788년에는 대흉작이었다). 그러나 지배층인 제1신분(성직자)과 제2신분(귀족)은 사정을 너무도 모르고 있었다.

 

양측의 갈등은 사소한 데서 생겼다. 시급한 현안을 논의하기도 전에 표결 방식에서 의견이 엇갈렸던 것이다. 지배층은 전통적인 신분제별 투표를 고집했고, 시민층은 다수결 투표를 주장했다.

 

문턱에서부터 합의를 이루지 못하자 시민들은 6월에 별도로 헌법제정국민의회(Assemblée nationale constituante)를 조직하고 새로 헌법을 제정할 때까지 농성을 계속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들의 회의 장소가 테니스 코트였기에 이것을 테니스 코트의 서약이라 부르는데, 얼마 안 가 하급 성직자들과 일부 자유주의 귀족들도 동참했다. 이들의 강경한 기세에 놀란 루이는 성직자와 귀족 들에게 어서 국민의회에 참여하라고 명했다. 이로써 오랜만에 열린 삼부회는 겨우 한 달만에 문을 닫았고(결국 이것이 마지막 삼부회가 되었다), 처음으로 신분제를 떨쳐버린 근대식 국민의회가 성립했다.

 

 

돌아온 삼부회 175년 만에 열린 삼부회의 모습이다. 왕실의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한 것이었으니 청교도혁명 시기 영국의 찰스 1세가 의회를 소집한 상황과 여러모로 비슷했다. 문제는 그다음 진행도 비슷했다는 점이다. 영국의 찰스처럼 프랑스의 루이 16세도 결국 그 의회의 손에 의해 처형을 당하게 되니까.

 

 

그러나 루이는 결국 보수적인 귀족들의 주장을 꺾지 못하고 국민의회를 탄압하기 위해 베르사유 궁전에 군대를 투입했다. 헌법 제정의 꿈에 부풀어 있던 시민 대표들은 분노했다. 그러나 그들을 발탁한 시민들은 더욱 분노했다. 마침내 파리 시민들은 714일 총과 탄약을 찾기 위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했다. 이것이 프랑스 대혁명의 신호탄이었다(바스티유란 성채라는 뜻으로 원래는 영국군의 침략을 막기 위해 세워진 것이었으나 리슐리외가 정치범을 수용하는 감옥으로 만들었다. 바스티유만을 놓고 본다면 바로 전 삼부회로 정치에 입문한 그가 다음 삼부회를 망친 셈이다).

 

바스티유 습격의 소식은 금세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농민들이었으나 일단 그들의 첫 반응은 공포였다당시 프랑스 전국의 농민들에게 만연된 막연한 공포심을 대공포(La Grande Peur)’라고 부른다. 낡고 부패한 체제가 무너지는 것은 역사적 진보와 혁신이지만, 그래도 오랜 기간 존속한 낡은 체제가 무너지는 순간 대중은 공포감을 느끼게 된다. 구체제에 의해 탄압을 받고 희생된 대중이라 해도 잠시 안정이 흔들리는 상황을 공포로 여기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197918년 동안 독재로 일관한 박정희가 암살된 직후에도 그랬다. 그 공포를 이용해 신군부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유신독재의 변형판인 새로운 독재 체제를 구축해 5공화국을 열었다. 중앙정부가 무너졌다는 소식과 외국군이 침략해 들어올지 모른다는 소문은 농민들을 극도의 불안과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다. 곳곳에서 농민들은 자위대를 조직해 자기 집과 자기 동네의 방어에 나섰다. 공포가 무장을 갖추면 폭력으로 표출된다. 비록 호미와 갈퀴 등의 엉성한 무장이지만 농민들의 공포심은 곧 그들을 수비에서 공격으로 나서게 만들었다. 각지에서 농민들은 영주의 장원을 습격해 약탈하고 봉건적 특권이 기록된 장원 문서들을 불태웠다. 이제 혁명의 무대는 파리만이 아니라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사태가 이렇게 번지자 헌법 제정만이 아니라 봉건제 자체도 타도의 대상이 되었다. 마침내 84일 국민의회는 봉건제 폐지를 선언했다(봉건제가 이렇게 공식적으로폐지된 것은 유럽 역사상 유일무이한 일이다). 이것으로 앙시앵 레짐은 무너지고 혁명의 최소 목표는 실현되었다.

 

첫 결실을 거둔 혁명은 곧이어 두 번째 결실을 맺는다. 그것은 1789826일에 성립된 인권선언이었다.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다. 주권은 왕이 아닌 국민의 것이다. 재산권은 신성 불가침하다.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통용되는 이러한 인권 개념은 바로 프랑스 혁명의 인권선언에서 최초로 문서화되었다. 바로 전까지 엄격한 신분제와 절대왕권이 지배한 프랑스 사회로서는 엄청나고도 급격한 변화였다. 보수 귀족들은 물론 국왕 루이 16세도 이 인권선언에는 도저히 찬성할 수 없었다. 한 달 이상을 승인하지 않고 버티던 루이는 결국 10월에 파리의 주부들이 빵을 달라며 벌인 시위에 굴복하고 선언에 동의했다.

 

이제 국민의회는 모든 법적 장애물을 넘어 사실상 프랑스 정부가 되었다(당시에는 행정부라는 개념이 독립되지 못했고, 의회가 곧 행정부였다. 218쪽의 주 참조). 따라서 지금부터는 정부로서의 기능이 중요했다.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것은 혁명 직전의 정부가 맞닥뜨린, 그리고 삼부회를 불러 혁명의 계기를 제공한 재정 문제였다.

 

혁명의 와중에 세금이 제대로 걷히지 않았기에 재정 문제는 몇 개월 전보다 더 심각한 상태였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국민의회는 절묘한 방책을 구상했다. 교회 재산을 몰수하는 것이었다. 프랑스의 가톨릭 세력은 왕권이 유명무실화되면서 힘을 잃은 데다 이미 주권은 국민의 것이 되었으니 법적으로 하자가 될 일도 아니었다. 국민의회는 몰수한 교회 재산을 매각하고 그 대금을 일종의 국채인 아시냐(assignat) 화폐로 지불했다. 이 화폐 때문에 이후 심각한 인플레를 겪게 되지만 그건 나중 문제고 이로써 급한 불은 껐다. 이제 국민의회는 애초부터 하려 한 일, 즉 헌법 제정의 과제로 넘어갔다.

 

 

대혁명의 시작 17세기 영국에는 의회가 왕권을 견제하는 전통이 있었지만, 18세기 프랑스에는 그런 전통이 없었다. 이 차이는 혁명의 질적 차이로 나타났다. 청교도혁명에서는 의회가 영국 민중의 의지를 대변했으나, 프랑스 혁명에서는 민중의 불만과 분노가 아무런 여과 없이 곧바로 터져 나왔던 것이다. 그림은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이 된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이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중심에서 부는 변화의 바람

평민들의 세상

혁명은 전쟁을 부르고

국제전으로 번진 혁명전쟁

죽 쒸서 개 준 혁명

유럽의 황제를 향해

유럽 민족주의의 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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