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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서양사, 6부 열매① - 5장 근대의 완성, 혁명은 전쟁을 부르고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6부 열매① - 5장 근대의 완성, 혁명은 전쟁을 부르고

건방진방랑자 2022. 1. 10. 0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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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명은 전쟁을 부르고

 

 

혁명의 초기에서 가장 균형 잡힌 사고를 한 지도자는 라파예트(L. Fayette, 1757~1834)일 것이다. 그는 일찍이 미국의 독립전쟁에서도 공을 세워 미국과 프랑스에서 두루 인기와 명성이 높았으며, 인권선언의 작성을 담당한 혁명의 주역이었다.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침착하게 혁명을 주도한 그는, 당시 국민의회가 채택할 수 있는 유일한 정치제도는 입헌군주제라고 생각했다. 그의 주장이 반영되어 국민의회는 1791년부터 입헌군주제와 단원제를 골간으로 하는 프랑스 최초의 헌법을 마무리하는 단계에 들어갔다. 헌법이 제정되면 국민의회는 이룰 것을 다 이루는 셈이다. 그럼 혁명은 완성되는 걸까?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혁명과 같은 매머드급 태풍이 일어나면 혁명 세력 내부에서도 급진파와 온건파로 갈리게 마련이다. 국민의회가 2년을 끌어오면서 그 안에서도 서서히 균열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 균열이 혁명의 기조를 저해할 만큼 커지는 것을 막으려면 강력한 지도력이 필요했다. 국민들의 폭넓은 인기를 누리고 균형 감각을 잃지 않고 있던 라파예트는 바로 그 적임자였다. 그러나 한창 지도력을 굳혀가던 그에게 치명타를 던진 사건이 터졌다. 혁명의 전개 과정에 불만을 넘어 불안을 느끼고 있던 국왕 루이가 가족을 데리고 오스트리아로 망명을 시도한 것이다오스트리아는 루이의 아내 마리 앙투아네트의 친정이었으니 루이로서는 망명이 아니라 처가댁을 방문하러 가는 중이었다고 변명할 수도 있었겠다. 앙투아네트는 바로 오스트리아의 여제였던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딸이었고, 당시 오스트리아 황제인 레오폴트 2세는 그녀의 오빠였다. 물론 정략결혼이었는데, 유럽 최고의 보수적인 합스부르크 왕실에서 막내딸로 귀하게 자란 탓인지 그녀는 프랑스 왕실의 재정난은 아랑곳하지 않고 베르사유 궁전에서 사치스런 생활을 일삼은 철없는 왕비였다. 결국 그녀는 그 대가를 호되게 치른다. 차라리 성공했더라면 좋았을 텐데(물론 그랬다면 입헌군주제 자체도 필요 없어졌겠지만), 못난 왕은 변장까지 하고서도 그만 국경 부근에서 잡혀 파리로 송환되고 말았다.

 

그렇잖아도 혁명의 더딘 속도에 불만을 품고 있던 급진파는 이참에 아예 입헌군주제를 넘어 공화제를 주장하고 나섰다. 그런데 공화제는 유럽 어느 나라도 채택하고 있지 않았다. 사실 당시 분위기는 공화제를 과거 그리스 시대와 로마 초기에나 있었던 골동품쯤으로 여기고 있었다이렇게 역사에서 진보의 개념은 시대마다 다르다. 16세기 이래 유럽에서는 절대왕정이 가장 진보적인 정치제도였고, 이것을 이루지 못한 나라는 시대에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판에 공화정이라니? 물론 공화정이라는 개념자체는 살아 있었다. 이를테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찍이 존재할 수 있는 모든 정부 형태는 군주제(왕정), 과두제(귀족정), 민주제(공화정)라고 말했으며, 이는 영국의 홉스와 로크(John Locke, 1632~1704), 프랑스의 루소 등의 계몽사상가들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 동안 정설로 여겨져왔다(사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계몽주의 시대까지만 해도 공화정은 까마득한 과거에나 존재한 제도였을 뿐이고 그냥 분류상으로서만 의미가 있었다. 사회계약론을 주장했으면서도 국가가 커지면 커질수록 정부는 축소되고 통치자의 수는 인민의 수의 증가에 반비례해야 한다.”라고 말한 루소의 사상은 그 예다. 따라서 그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라파예트는 급진파가 선동한 왕의 퇴위를 요구하는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그러나 그 사건을 계기로 정치력의 한계를 드러낸 라파예트는 실각하고 말았다. 좌절한 라파예트는 점차 균형 감각을 잃고 이념적으로 보수화되었다.

 

균형 잡힌 지도력이 사라지자 국민의회 내의 갈등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일단 헌법은 원안대로 통과되었지만, 입헌군주제에 찬성한 파는 점차 왕당파로 변질되었고, 반대한 파는 공화파로 결집했다. 신분제를 해소하기 위해 단원제를 택한 것이었으나 단원제 내에서도 분파가 이루어진 것이다. 급기야 왕당파는 아예 보따리를 싸서 나와 푀양파라는 별도의 팀을 꾸리기에 이르렀다. 한편 공화파는 자코뱅파(Jacobins)를 이루면서 로베스피에르(Robespierre, 1758~1794)라는 서른셋의 젊은이를 리더로 내세웠다. 혁명의 계절답게 때는 바야흐로 젊은이의 시대였다.

 

 

그래도 우여곡절 끝에 17919월 헌법이 제정되었다. 그에 따라 다음 달에 국민의회는 해산되고 프랑스 최초의 근대적 의회인 입법의회(Assemblée Législative)가 구성되었다. 그러나 겉으로 순조로워 보이는 정치 일정의 이면에서는 갈등의 싹이 커져만 갔다. 푀양파는 다수당이었으나 애초의 입헌군주제에서 입헌을 떼고 보수화되어갔으므로 이념의 선명성에서 앞선 자코뱅파가 입법의회를 주도하는 분위기였다. 자코뱅파에는 아키텐의 한 지방인 지롱드 출신이 많았기에 지롱드파(Gitrondians)라고도 불렸는데, 여기서 이론가의 역할을 한 사람은 파리 출신의 브리소(Jacques Pierre Brissot, 1754-1793)와 콩도르세(Marquis de Condorcet, 1743~1794)였다(콩도르세는 백과사전서의 집필자이기도 했는데, 마지막 계몽사상가로서 프랑스 혁명에 직접 참가한 인물이다).

 

국왕의 망명 미수 사건을 계기로 브리소는 프랑스에 공화제를 수립하는 일이 결코 간단치 않음을 깨달았다. 무엇보다 프랑스는 유럽 세계의 그렇고 그런 국가가 아니었다. 1000년 동안이나 프랑스는 유럽 문명의 중심지였고, 혁명이 일어나기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유럽 최강국이었다. 그래서 혁명이 발발하자 유럽 각국은 온통 프랑스의 정세에 이목을 집중했으며, 특히 국왕 루이의 처가인 오스트리아는 루이 가족의 운명에 대한 관심도 겹쳐 혁명 세력에게 노골적인 적대감을 보이고 있었다. 이런 국제 정세 속에서 프랑스에 공화제가 들어서는 것은 이미 프랑스 한 나라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바로 이 점이 17세기 내내 일어난 영국 시민혁명과의 차이였다.

 

17923월 내각 구성을 마친 브리소는 승부수를 던졌다. 루이로 하여금 420일 오스트리아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게 한 것이다(브리소는 그것을 자유의 십자군이라고 불렀다). 바야흐로 혁명은 혁명전쟁으로 바뀌었다.

 

 

보편적 인권 개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당대에는 공화국 헌법이 가장 뜨거운 쟁점이었으나 혁명의 역사적 의의는 인권선언에 있었다. 사진은 자유와 평등에 기초한 근대적 인권 개념을 최초로 정립한 프랑스 혁명의 인권선언이다(정식 명칭은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이다). 전문과 본문 17조로 된 이 선언은 발표된 직후 유럽 각국어로 번역되었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중심에서 부는 변화의 바람

평민들의 세상

혁명은 전쟁을 부르고

국제전으로 번진 혁명전쟁

죽 쒸서 개 준 혁명

유럽의 황제를 향해

유럽 민족주의의 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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