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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6부 열매① - 5장 근대의 완성, 유럽의 황제를 향해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6부 열매① - 5장 근대의 완성, 유럽의 황제를 향해

건방진방랑자 2022. 1. 10. 0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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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의 황제를 향해

 

 

통령은 나폴레옹을 포함해 총 세 명이었으나 사실상 나폴레옹이 유일한 통령임은 나머지 두 통령도, 프랑스 국민도, 나아가 유럽 각국도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통령이라는 말로 번역하지만 그말은 원래 콘술(consul)’이다. 그런데 콘술이라면 로마 공화정 시대에 있었던 집정관이 아닌가? 실제로 통령정부 치하의 프랑스는 여러모로 로마 공화정 말기와 비슷했다. 콘술만이 아니라 원로원(상원)도 있었다. 자연히 로마의 콘술이었던 카이사르가 생각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로마의 콘술이었던 카이사르는 황제를 꿈꾸다가 실패했으나 나폴레옹은 끝내 그 꿈을 이루었다.

 

황제가 되기 위한 단계로 카이사르가 종신 독재관을 거쳤듯이, 1802년 나폴레옹은 헌법을 개정해 종신 통령이 되었다(그와 함께 그는 영국과 아미앵 조약을 맺어 휴전을 이루었다). 그리고 2년 뒤에는 마침내 꿈에 그리던 제위에 올랐다. 원로원의 승인만 강요하면 되었던 카이사르와 달리, 나폴레옹은 국민투표를 거쳐야 했다. 그러나 프랑스 국민들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아우구스투스라는 존칭을 바쳤던 로마 원로원처럼 국민투표에서 새 황제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기원전 1세기 로마 원로원은 공화정의 경험이 풍부했고 19세기 벽두의 프랑스 국민들은 혁명기에 잠시 공화정의 맛만 보았을 뿐이지만, 2000년을 사이에 두고 로마와 프랑스는 영웅의 출현을 필요로 하는 똑같은 상황에 처했던 것이다.

 

이제 프랑스는 샤를마뉴 시대의 프랑크 제국에 이어 역사상 두 번째로 제국이 되었다. 하지만 제국이라면 반드시 필요한 게 중앙집권과 식민지인데, 이 점에서 프랑크와 프랑스는 정반대였다. 옛 프랑크는 300여 곳의 속주를 거느렸으나 중앙집권력이 약했고, 19세기의 프랑스는 강력한 중앙집권을 이루었으나 휘하의 식민지가 없었다.

 

신참황제로서 나폴레옹은 한동안 내치에 주력했다. 혁명 중에 재산을 모두 빼앗겨 알거지가 된 가톨릭 사제들과는 국가가 봉급을 주는 제도를 도입해 화해에 성공했고, 교육제도와 금융제도를 혁신해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엇비슷하게 수준을 맞추었다. 무엇보다 큰 업적은 법전의 편찬이다. 1804년 그가 직접 지휘해 편찬하도록 한 나폴레옹 법전은 이후 프랑스 법전의 원본이 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골조가 살아남아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제국이라면 식민지가 있어야 했고 식민지를 획득하려면 바깥으로 나가야 했다. 이집트 작전에 실패한 뒤 프랑스의 외부 영토는 북이탈리아밖에 없었는데제위에 오를 때 나폴레옹은 이탈리아의 왕을 겸한다고 선언했다. 물론 당시 북이탈리아는 프랑스가 장악하고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지만, 그가 굳이 그렇게 선언한 이유는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그는 가깝게는 아직 명패를 내리지 않고 있는 신성 로마 제국을, 멀게는 샤를마뉴의 프랑크 제국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북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는 10세기에 오토 1세가 신성 로마 제국을 세울 때부터 왕을 자칭한 지역이었으며, 샤를마뉴도 마찬가지였다. 롬바르디아가 이렇게 유럽의 황제와 상징적인 연관을 가지는 이유는 샤를마뉴의 아버지 피핀이 이곳을 정복해 교황령으로 바친 데서 비롯되었다(1332쪽 참조). 상당히 멀어 보이는 서양의 근대와 중세 초기는 이렇게 연결된다, 그것만 가지고 제국으로 자칭한다면 남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렇잖아도 대외 진출을 염두에 둔 판에 바깥에서 계기가 생겨났다. 영국이 먼저 아미앵 조약을 깨고 선공으로 나온 것이다. 곧이어 1805년에는 영국을 중심으로 3차 대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었다. 또다시 프랑스는 영국, 오스트리아, 러시아, 스웨덴 등 유럽 열강을 맞아 전쟁을 벌여야 했다.

 

이전의 동맹들이 그렇듯이, 동맹의 핵심은 언제나 영국이었다. 영국은 루이 14세의 강력한 팽창정책에도 제동을 걸었고, 18세기 두 차례의 왕위 계승 전쟁에서도, 또 신대륙에서도 늘 프랑스에 패배의 쓴잔을 안겨주었다. 프랑스로서는 영국이 최대의 라이벌이자 걸림돌이었다. 나폴레옹은 영국을 제압하지 않고서는 유럽을 제패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집트를 원정한 목적도 영국의 힘을 약화시키려는 데 있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 형세 판단은 옳았으나 나폴레옹은 루이 14세와 똑같은 오류를 저지르고 만다.

 

 

전통적으로 프랑스는 육군에 관한 한 영국을 능가했다. 그러나 알다시피 영국은 섬나라이므로 해군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이길 수 없었다. 루이 14세가 영국에 덜미를 잡힌 것도 영국 해군에게 패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나폴레옹 시대에 영국 해군은 더욱 강해졌다. 18세기 내내 프랑스 해군은 전 세계 식민지에서 벌어진 영국 해군과의 싸움에서 거의 재미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나폴레옹도 그 점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여섯 시간만 영국 해협을 장악한다면 런던을 접수할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다. 아닌 게 아니라 영국은 프랑스군의 영국 침략을 경계해 영국 해협에 함대를 집중시켜 봉쇄하는 중이었다. 여섯 시간만 그 봉쇄를 뚫어준다면…….

 

그러나 당시 영국 해군에는 넬슨(Horatio Nelson, 1758~1805)이라는 뛰어난 제독이 있었다. 이집트 원정 때도 발목을 잡았던 나폴레옹의 천적 넬슨은 180510월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대승을 거둠으로써 프랑스에, 그리고 그 자신에게도 최후의 타격을 가했다. 영국 해군의 봉쇄를 뚫으려던 프랑스 해군은 참패를 당하고 다시는 영국 진출을 시도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넬슨은 그 전투에서 전사했던 것이다.

 

비록 해상권은 영국에 넘겨주었어도 대륙에서는 프랑스군의 적수가 없었다. 180511월 프랑스는 보헤미아에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동맹군을 격파하고 다음 달에는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어 대륙의 동맹군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했다. 여기서 완전히 제압당한 오스트리아는 일부 영토를 프랑스에 양도하고 동맹에서도 빠졌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로부터 한 가지를 더 빼앗고자 했다. 그것은 바로 제국이라는 명패였다(황제는 두 명일 수 없으니까), 1806년 나폴레옹은 남독일의 16개 영방 국가를 오스트리아로부터 떼어내 독립시켰다. 제후국을 잃은 제국은 더 이상 제국일 수 없다. 이제 오스트리아는 일개 왕국으로 전락했다. 마침내 최후의 황제 프란츠 2세가 제위를 포기함으로써 1000년 가까이 존속한 신성 로마 제국은 완전히 해체되었다16세기 중반 카를 5세가 동생과 아들에게 각각 오스트리아와 에스파냐를 물려주면서 사실상 신성 로마 제국은 해체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뒤이어 30년 전쟁에서 합스부르크 왕가가 몰락한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은 오스트리아 제국으로 바뀌어 제국의 명패만 보존해왔다. 세습령이었던 오스트리아 이외에 남독일의 가톨릭 영방국가들을 제후국으로 거느리기는 했으나 정치적 영향력은 거의 없었다. 나폴레옹은 그런 느슨한 연관마저 끊어버린 것이다.

 

오스트리아가 무너지자 졸지에 프랑스와 국경을 접하게 된 프로이센도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프로이센은 동맹국이 아니었으나 프랑스가 그다음 목표로 프로이센을 택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최선의 수비는 공격이라는 생각에 프로이센은 선공을 가했지만 막강한 프로이센군도 승세를 탄 프랑스의 진격을 막을 수는 없었다. 1806년 프로이센은 예나와 아우어슈테트에서 프랑스에 대패한 뒤 이듬해 굴욕적인 틸지트 조약을 맺고 오스트리아처럼 영토의 일부를 프랑스에 양도했다.

 

마침내 나폴레옹의 꿈이 실현되었다. 그는 프랑스의 황계를 넘어 서유럽의 황제가 되었다(물론 대륙으로만 제한되었지만). 이제 서유럽 세계는 한가운데 프랑스가 자리 잡고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 에스파냐 등 사방의 국가들은 모두 프랑스의 위성국가가 되어버렸다. 유일하게 남은 저항 세력인 영국에 대해 나폴레옹은 1806년 베를린 칙령을 내려 영국과의 모든 교역을 금하는 대륙 봉쇄를 실시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테면 경제 전쟁인 셈인데, 그러나 영국보다 오히려 대륙 국가들이 더 심한 고통을 당하는 바람에 실효를 거두지는 못했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중심에서 부는 변화의 바람

평민들의 세상

혁명은 전쟁을 부르고

국제전으로 번진 혁명전쟁

죽 쒸서 개 준 혁명

유럽의 황제를 향해

유럽 민족주의의 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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