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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6부 열매① - 5장 근대의 완성, 죽 쒀서 개 준 혁명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6부 열매① - 5장 근대의 완성, 죽 쒀서 개 준 혁명

건방진방랑자 2022. 1. 10.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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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 쒀서 개 준 혁명

 

 

당시 로베스피에르가 취했어야 할 최선의 방책은 공포 체제를 완화하는 것이었다. 혁명정부의 집권은 확고해졌고, 프랑스는 대내적으로나 대외적으로나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든 시점이었다. 최선이 안 된다면 차선의 방책은 혁명 지도부의 통합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있을 수 있는 내부 논쟁을 허용하고 합의를 이끌어내는 정치력이 필요했다. 로베스피에르기는 판단 실수로 최선의 방책을 놓쳤고, 능력 부족으로 차선의 방책을 놓쳤다. 그 결과는 그 개인으로서도, 프랑스 전체로서도 최악이었다.

 

1794727, 로베스피에르는 국민공회에서 연설하려던 순간 독재 타도를 외치는 의원들에 의해 전격적으로 체포되었다. 그 날짜를 공화력으로 치면 공화력 2()의 달’, 즉 테르미도르에 해당하므로 그 사건을 테르미도르의 반동이라고 부른다. 로베스피에르는 미처 정신을 차릴 여유도 없이 바로 다음 날 혁명의 지도자에서 혁명의 반역자로 곤두박질치며 처형되었다. 여기까지가 로베스피에르의 개인적인 피해라면 그다음부터는 프랑스 혁명의 수난이었다.

 

공포정치로 비난을 받은 로베스피에르였지만 생전에 그의 목표는 ()이 지배하는 공화국이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공포정치를 덕의 공포라고 부를 정도였다. 그랬으니 그를 반대하는 사람은 많았겠지만 그를 죽일 만큼 증오하는 사람은 덕과 가장 거리가 먼 자들일 게 뻔했다. 과연 테르미도르의 반동을 저지른 자들은 부패와 악덕의 죄과를 가지고 있어 언제 공안위원회에 소환될지 몰라 두려워하던 의원들이었다. 악덕이 덕을 누르고 부패가 청렴을 죽인 것이다. 이것으로 프랑스 혁명의 최종적 운명이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통과 에베르를 제거한 뒤부터 로베스피에르의 지지 세력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런 마당에 그가 제거되자 그를 중심으로 결집했던 자코뱅파는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어부지리를 얻은 것은 온건 공화파였다. 로베스피에르의 철권통치 시절 숨죽이고 지냈던 그들은 일만 저지르고 수권 능력이 없는 반동파를 제치고 국민공회를 장악해 임자 없는 권력을 손에 쥐었다.

 

그러나 혁명의 최후 성과를 결정하는 중대한 시점에 그들이 이룬 혁명적 과업이라고는 공화제와 공화력을 유지한 것뿐이었다. 공안위원회와 혁명재판소는 폐지되었고, 로베스피에르가 만든 모든 법은 휴지통에 처박혔다. 하지만 공포정치를 해소하는 데 그친 정치 개혁보다 더 큰 문제는 경제적 무능이었다. 자유 시장경제가 도입되면서 물가가 급속히 상승했고, 최고 가격제가 폐지되면서 민중은 생활고에 시달렸다.

 

 

기요탱의 기요틴 단두대를 가리키는 기요틴은 이 장치를 만든 기요탱(Guillotin)의 이름을 영어식으로 잘못읽은 말이다(잘못읽은 예는 길로틴이다). 흔히 기요틴은 끔찍한 형벌의 대명사로 사용되지만 발명될 무렵에는 그 반대로 인도적인장치였다. 당시에는 죄인에게 서서히 고통을 가해 처형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이듬해인 1795년 국민공회는 새로 헌법을 제정해 위기를 타개하고자 했다. 단원제를 양원제로 바꾸고, 다섯 명의 총재를 두어 권력을 분담하도록 하는 게 주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 헌법을 바탕으로 하여 구성된 총재정부 역시 온건 공화파에 못지않게 철저히 무능했다총재정부는 처음으로 의회가 아닌 행정부 형태를 취한 기관이다(로베스피에르의 혁명정부는 조직으로서의 정부라기보다는 구호적인 성격이 강했다). 혁명으로 공화정이 수립된 것은 1791년 헌법 제정 때였으나 실제로 공화정에 걸맞은 행정부는 없었고 의회가 정부 기능을 수행했다. 몽테스키외가 3권 분립을 주장한 지 50년이 지나고서도 아직 행정부의 개념은 제대로 확립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생긴 프랑스 최초의, 나아가 유럽 최초의 행정부는 정부의 명패만 남겼을 뿐 제 기능은 하지 못했다. 자코뱅의 잔존 세력은 물론이고 헌법 개정을 주도한 세력조차 정부 비판에 앞장설 정도였다. 군대의 힘을 빌려 그럭저럭 양측의 공세를 차단하면서 연명하던 총재정부는 179911월 마침내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히는 사태를 맞았다. 정부의 물리력인 군대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 주역은 서른 살의 젊은 나이에 프랑스의 전쟁 영웅으로 떠오른 코르시카 출신의 촌놈나폴레옹(Napoleom Bonaparte, 1769~1821)이었다.

 

보잘것없는 신분의 나폴레옹이 처음으로 명성을 얻은 것은 1793년 영국과 에스파냐 함대가 봉쇄하고 있던 툴롱 항구를 탈환한 공로 덕분이었다(국제적으로 고립된 채 유럽 각국과 힘든 전쟁을 수행하던 프랑스 국민들은 영웅을 고대하고 있었고, 그 영웅은 전장에서 탄생할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그 공로로 나폴레옹은 20대의 나이에 여단장으로 승진했고, 1796년에는 취약한 이탈리아 전선에 투입되었다(그가 젊은 나이에 초고속 승진한 데는 혁명 이후 경험 많은 장군이 대거 국외로 탈출해 군 지휘 계통에서 공백이 생겨났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에게 주어진 프랑스군은 특히 오합지졸이었고 장비도 엉성했으나 나폴레옹은 200년 전 한반도의 이순신이 그랬듯이 1년 동안 거의 모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무찌르는 괴력을 선보였다. 1797년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으며, 프랑스는 캄포포르미오 조약을 통해 롬바르디아를 오스트리아로부터 양도받고 벨기에를 영토에 포함시켰다.

 

 

혁명의 끝 흥미진진한 영화일수록 끝은 시시한 경우가 많다. 테르미도르의 반동은 프랑스 혁명을 용두사미로 만들어버렸다. 공화정을 당면 목표로, 보편적 인권을 궁극적 이념으로 내걸었던 프랑스 혁명은 결국 소수 반동 세력의 준동으로 삽시간에 물거품이 되었다. 그림은 반동파에 의해 로베스피에르가 체포되는 장면이다.

 

 

이순신은 권력을 꿈꾸지 못했고 주변의 모함을 받았지만, 나폴레옹은 권력을 꿈꾸었고 주변의 도움을 받았다. 나폴레옹의 등장을 계기로 프랑스의 혁명전쟁은 소극적 방어에서 적극적 침략으로 궤도를 선회한다. 자신감을 찾은 총재정부는 이참에 영국의 인도 무역로를 차단하기로 마음먹었다. 비록 대서양 항로가 개척된 이래로 많이 위축되기는 했어도 여전히 지중해 무역은 중요했다. 총재정부가 노린 곳은 지중해 무역의 거점인 이집트였다. 1798년 정부는 나폴레옹을 사령관으로 삼아 이집트 원정군을 파견했다. 그러나 이미 프랑스의 모든 행동은 유럽 전체에 경보를 발하는 상황이었다. 당시 동부 지중해 진출을 최대의 목표로 삼고 있던 러시아를 비롯해 오스만 제국, 포르투갈, 시칠리아 등이 일제히 영국 측에 가담해 대프랑스 동맹을 맺었다(종교적으로 프로테스탄티즘, 가톨릭, 동방정교, 이슬람교 국가 들이 섞여 있었다는 것은 그 무렵이면 종교가 국제 관계에서 전혀 고려 대상이 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총재정부로서 더 중요한 사실은 나폴레옹의 마음이 콩밭에 가 있었다는 점이다. 1년이 넘도록 이집트에서 영국군과 악전고투를 벌인 나폴레옹은 179910월 군대를 이집트에 남겨둔 채 단신으로 귀국했다이집트 원정은 초기에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17988월 나폴레옹은 나일 강 전투에서 참패를 당하고 점차 영국에 밀리기 시작했다. 전황이 불리해지자 단신 귀국을 결정한 것이니 영웅나폴레옹의 모습은 아니다. 나일 강 전투에서 영국 측 지휘관은 바로 호레이쇼 넬슨이었는데, 7년 뒤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나폴레옹은 또다시 넬슨에게 패해 실각하고 만다. 그를 환영한 것은 그의 명성을 이용해 총재정부를 타도하려는 세력과 그들이 모아둔 군대였다. 군대를 거느리고 파리에 온 나폴레옹은 119일 자코뱅파의 준동을 방지한다는 구실로 총재정부의 지도자들을 감금했다. 그 이튿날 그는 정부의 해체를 공식적으로 선언하고 헌법을 개정한 뒤 스스로 통령이 되어 통령정부를 새로 열었다. 1799119일은 공화력으로 안개의 달, 즉 브뤼메르 18일이었기에 이 사건을 브뤼메르 쿠데타라고 부른다.

 

프랑스 혁명은 이미 테르미도르의 반동으로 사실상 끝난 것이었지만, 그나마 혁명의 흔적이라도 유지하던 총재정부마저 무너짐으로써 혁명은 완전히 물거품이 되었다. 무엇보다 애초에 혁명 세력이 목표로 했고 또 한동안 실현한 공화제가 끝장났기 때문이다흔히 프랑스 혁명의 의의를 인권의 신장이라든가 자유ㆍ평등ㆍ박애의 정신을 유럽에 확산시켰다는 등으로 말하지만, 그건 후대의 역사가들이 살을 덧붙여 말하는 것일 뿐이고 실은 그보다 단순했다. 혁명의 목표는, 국내적으로는 공화제를 이룩하는 것이었고, 국제적으로는 한동안 뒤처진 프랑스를 유럽 국제사회의 핵심으로 다시 복원하려는 것이었다. 후자는 나폴레옹이 한때나마 실현하지만 공화제는 나폴레옹이 무너뜨렸으므로, 프랑스 혁명은 나폴레옹의 등장으로 물거품이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결국 프랑스 혁명은 죽을 쒀서 나폴레옹에게 준 격이 되어 버렸다.

 

 

이집트 원정의 성과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에는 군대만이 아니라 많은 학자도 수행했다. 왼쪽은 그들이 발견한 로제타석이고, 오른쪽은 이집트 유적을 조사하는 프랑스 학자들이다. 고대 이집트 문자의 해독에 결정적인 열쇠가 된 로제타석은 프랑스로 운송되었다가 나폴레옹 전쟁 때 영국으로 넘겨져 현재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학자들의 연구 성과로 이후 유럽에는 이집트학이 크게 발달했으며, 이는 19세기의 오리엔탈리즘(서양의 동양 연구)으로 이어진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중심에서 부는 변화의 바람

평민들의 세상

혁명은 전쟁을 부르고

국제전으로 번진 혁명전쟁

죽 쒸서 개 준 혁명

유럽의 황제를 향해

유럽 민족주의의 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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