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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6부 열매① - 5장 근대의 완성, 유럽 민족주의의 태동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6부 열매① - 5장 근대의 완성, 유럽 민족주의의 태동

건방진방랑자 2022. 1. 10. 0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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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 민족주의의 태동

 

 

나폴레옹의 시대가 계속되었더라면 혹시 유럽에서도 강력한 중심을 갖춘 동양식 제국이 성립되지 않았을까? 그러나 유럽의 역사에서는 한 나라가 패권을 장악하는 비정상적인 상태를 오래 용인하지 않는다.

 

나폴레옹의 몰락은 사실 자초한 측면이 있었다. 1807년 제국의 서쪽 변방에 있는 포르투갈이 봉쇄령을 어기고 영국과 통상을 재개하자 나폴레옹은 단호히 응징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냥 응징으로 그쳤으면 좋았을 텐데, 리스본을 점령한 프랑스군은 내친 김에 에스파냐까지 제압했다. 나폴레옹은 아예 자기 형을 에스파냐 왕으로 갖다 앉혔다. 그런 그의 오만은 예상치 못한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성난 에스파냐 민중이 봉기를 일으킨 것이다왕위 계승 전쟁으로 부르봉 왕조가 들어서면서 프랑스 왕실과 한 집안을 이룬 이래로 에스파냐는 프랑스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두 나라의 관계는 프랑스 혁명기에 잠시 적대적으로 바뀌었으나 혁명이 쇠퇴하고 다시 관계를 회복했으며, 에스파냐는 일찌감치 나폴레옹을 지지하고 나섰다. 그러나 그것은 에스파냐의 왕실만의 생각이었고, 국민은 달랐다. 이미 유럽 세계는 각 국민국가로 분립되었고, 각국마다 이해관계가 다른 상황이었는데, 군주들은 시대에 뒤처진 사고로 일관했다. 지금까지 우리는 유럽 역사를 살펴보면서 편의상 나라 이름을 주어로 사용했으나, 이 무렵부터는 엄밀히 말해 해당 나라의 지배층을 가리키는 용어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나폴레옹은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군대를 보내 무력으로 진압하고자 했다. 정면 대결에서는 승산이 없으므로 에스파냐 민중은 전국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소규모 부대를 조직해 프랑스군을 괴롭히는 전술로 대응했다(이때 생긴 말이 바로 게릴라라는 용어다). 전세는 엉뚱하게도 정규군이 게릴라군에 밀리는 형세로 전개되었다.

 

이 사태가 미처 정리되기도 전에 다음에는 동쪽 변방의 러시아가 프랑스의 지배를 거부하고 나섰다. 결국 이것이 나폴레옹의 명맥을 끊었다. 1812년 나폴레옹은 70만 명의 대군으로 러시아 원정에 나섰다. 그러나 러시아는 전투를 피하고 후퇴하면서 적의 수중에 넘어갈 만한 모든 물자를 파괴하는 초토화 작전으로 맞섰다. 예나 지금이나 러시아는 넓은 나라, 프랑스군이 모스크바에 입성할 즈음에는 이미 겨울이 닥쳤다. 더 이상의 진군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나폴레옹은 할 수 없이 철군을 명했는데, 러시아군은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프랑스군의 후방을 덮쳤다.

 

살아남은 프랑스군은 출발 당시의 겨우 4분의 1로 줄어 있었다. 러시아는 또 한 번 중요한 고비에서 역사의 흐름을 바꾸었다. 러시아 원정의 대실패는 나폴레옹에게 결정적이었다. 이듬해 프랑스는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유럽 각국 연합군에 대패했고, 결국 나폴레옹은 실각했다. 1815년 그는 유배지인 엘바 섬에서 극적으로 탈출해 재기를 도모했으나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의 웰링턴(Wellington, 1769~1852)에게 패하면서 완전히 몰락했다.

 

 

나폴레옹의 패배와 몰락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남긴 영향이다. 프랑스 내에서는 프랑스 혁명의 성과가 공화국의 이념에서 후퇴해 제정의 성립으로 이어졌으나, 묘하게도 나머지 유럽 국가들에서는 나폴레옹으로 인해 오히려 혁명의 건강한 이념이 전파되는 결과를 낳았다. 프랑스의 치하에서 잠깐이나마 비참과 굴욕을 맛본 유럽 각국은 (에스파냐에서 보듯이) 자연스럽게 민족주의를 성장시켰고, 이것은 17세기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근대 국민국가 운동을 마무리하는 역할을 했다나폴레옹의 정복이 유럽 각국의 민족주의를 일깨운 직접적증거는 여러 면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이 아니었더라면 프로이센 국민의 자각을 외친 피히테의 강연(‘독일 국민에게 고함’), 에스파냐에서 저질러진 프랑스의 만행을 고발한 고야의 그림(<180852, 180853>), 러시아에서 프랑스군의 참패를 웅장하게 그려낸 차이코프스키의 음악(1812년 서곡)도 없었을 것이다.

 

이제 유럽 세계를 들끓게 한 전란의 시대는 일단락되었다. 짧게는 18세기 초 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부터, 길게는 17세기 초 30년 전쟁부터 시작된 유럽의 진통은 나폴레옹 전쟁으로 끝났다. 200년간의 진통은 유럽의 정치적 지형을 크게 바꾸어, 그전까지 그런대로 중세적 통합성을 유지하고 있던 유럽 세계를 수많은 국가로 나누어놓았다. 그 결과가 오늘날의 유럽이다.

 

그 과정이 하필 전쟁이라는 폭력적이고 혼란스런 형태로 전개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전까지 유럽 세계에 별다른 전쟁이 없었다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국가(영토 국가)의 개념이 명확하지 않고 교황이 조정자의 역할을 맡았던 시대에는, 다른 문명권과의 전쟁(예컨대 십자군 전쟁)은 있었어도 유럽 문명권 내부의 전쟁은 없었다(백년전쟁이 예외지만 이것은 영국과 프랑스의 특수한 영토 분쟁에 불과했다). 간단히 말하면 교회가 무너지면서 유럽 세계의 통합성이 함께 무너졌고, 그에 따라 각국은 전쟁의 형태로 각자의 역사를 진행시켜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이후의 유럽 역사에서 전쟁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앞으로 보겠지만 오히려 전쟁은 더욱 치열해진다. 그러나 200년간의 진통을 겪은 유럽 세계는 종전과 다른 역사를 전개하게 된다. 중세 이후 내내 혼란스러웠던 분열상은 각국이 국민국가를 이루면서 끝났고, 유럽 세계 내에서는 모든 구획이 확정되었다. 그렇다면 다음은 바깥을 향해 진출하는 단계다. 그전까지 산발적으로 전개된 세계 무대로의 진출은 19세기부터 집중적이고도 목적의식적인 국가 행동으로 탈바꿈한다. 바야흐로 제국주의적 세계 진출의 시대가 개막되었다.

 

 

탄압의 대가 나폴레옹은 에스파냐에서 일어난 민중 봉기를 과소평가했으나 그것은 결국 나폴레옹 시대의 종말을 알리는 서곡이 되었다. 위쪽은 에스파냐의 민중 봉기를 폭력적으로 진압하는 장면을 그린 기록화이고, 아래쪽은 에스파냐의 화가 고야가 그 사건을 그림으로 고발한 (180853)이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중심에서 부는 변화의 바람

평민들의 세상

혁명은 전쟁을 부르고

국제전으로 번진 혁명전쟁

죽 쒸서 개 준 혁명

유럽의 황제를 향해

유럽 민족주의의 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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