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에 몸 바친 두 사람
프랑스 - 프로이센 전쟁으로 독일이 통일을 이루면서 대륙 중심부의 국제 질서는 다시금 안정을 찾았다. 프랑스는 패전의 충격으로, 또 독일은 ‘신생국’에 따르게 마련인 혼란으로 내부가 불안정했지만, 적어도 전쟁으로 비화할 만한 국제적 분쟁거리는 사라졌다. 이제 교통정리가 필요한 곳은 르네상스 이후 내내 몰락의 길을 걸으면서 서유럽의 중심에서 변방으로 전락한 이탈리아다.
빈 회의의 결과로 오스트리아의 지배가 복귀하면서 이탈리아는 예전처럼 다시 오스트리아의 세력권인 북이탈리아와 시칠리아 왕국이 들어서 있는 남이탈리아로 나뉘었다(중부에는 여전히 교황령이 있었으나 교황의 권력과 더불어 추락해 약간의 영토만 남아 있을 뿐 현실적인 영향력은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외국의 지배를 받은 데다 자치도시로 분립된 북이탈리아나 에스파냐 왕실의 간섭을 받았던 시칠리아나 이탈리아의 주인이 되기에는 힘이 부쳤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구심점으로 떠오른 것은 지중해의 섬 사르데냐였다.
프랑스와 독일을 휩쓴 1848년 혁명의 소용돌이가 채 가시지 않은 1849년에 사르데냐의 왕위에 오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Vittorio Emanuele II, 1820~1878, 재위 1843~1861)는 사르데냐가 이탈리아 통일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첫 번째 치적은 성직자의 특권을 제한하는 법적 조치였는데, 여기서 보듯이 그는 처음부터 자유주의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고 이탈리아 자유주의자들의 구심점을 표방하고 나섰다. 당연히 오스트리아의 비위를 거스를 수밖에 없었으나, 다행히도 오스트리아는 3월 혁명의 수습에 여념이 없는 상황이었다. 사르데냐로서는 힘을 배양할 절호의 기회였다.
에마누엘레의 두 번째 치적은 카보우르(Camilo Benso Cavour, 1810~1861)를 총리로 기용한 것이다. 귀족 출신의 자유주의자에다 외국에 체재한 경험이 많고 군대와 언론인 경력까지 골고루 갖춘 카보우르는 약소국의 처지에서 통일의 중심으로 발돋움하려는 사르데냐에는 절실하게 필요한 인물이었다. 그는 무엇보다 우선 사르데냐의 국력을 키우는 게 급선무라고 보고, 농업과 공업을 진흥시키는 한편 자유 무역 체제를 정착시키고 군대를 육성했다.
군대의 쓰임새는 곧 생겨났다. 때마침 크림 전쟁이 터진 것이다. 사르데냐의 국력으로는 크림 전쟁에 참전하는 게 무리였으나, 사르데냐를 유럽의 국제사회에 널리 알리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한 카보우르는 의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군대를 흑해로 파견했다. 그 덕분에 그는 승전국 자격으로 파리 강화회의에 참석해 이탈리아의 상황을 국제적으로 홍보할 기회를 얻었다.
▲ 이탈리아 최초의 국왕 에마누엘레는 카보우르와 가리발디라는 두 건국 영웅 덕분에 로마 시대 이후 이탈리아 역사상 최초의 국왕이 되는 영예를 누렸다. 게르만 계통의 다른 민족들이 로마의 유산을 물려받아 각기 나라를 세운 것에 비하면 1000년이나 늦은 시점이다.
그러나 카보우르의 모든 작업은 터를 닦기 위한 것일 뿐이었다. 무엇을 위한 터일까? 물론 이탈리아의 통일이다. 카보우르의 정책은 이탈리아 자유주의 세력의 지지를 얻었고, 군대 육성은 장차 통일 전쟁을 위해 반드시 필요했으며, 그림 전쟁에 참전한 것은 오스트리아에 반대하는 프랑스를 우방으로 삼는 성과를 올렸다. 이것을 밑천으로 카보우르는 1859년에 나폴레옹 3세와 밀약을 맺고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통일 전쟁을 시작했다. 프랑스군의 지원으로 사르데나군은 마침내 오스트리아를 물리치고 롬바르디아를 획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나친 복은 화를 부르는 법, 사르데냐의 세력이 커지는 것에 경계심을 품은 나폴레옹 3세는 사르데냐를 배신하고 오스트리아와 단독 휴전을 맺었다.
다 된 밥에 프랑스가 재를 뿌린 탓에 카보우르는 일단 총리직을 사임했다. 그러나 사태의 해결책은 그가 뿌려놓은 씨앗에서 자라났다. 나폴레옹의 배신은 오히려 이탈리아 자유주의 세력을 총궐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카보우르는 재빨리 다시 내각을 구성하고, 니스와 사부아를 프랑스에 내주는 조건으로 중부 이탈리아까지 획득했다(오늘날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경계선이 결정된 것은 바로 이 순간이다).
이제 남은 부분은 남부의 시칠리아 왕국으로서, 원래 이 지역은 워낙 오래전부터 이탈리아와 분리된 역사를 가진 탓에 사르데냐가 영향력을 행사하기는 어려운 곳이었다(로마 시대 이후로 남이탈리아와 시칠리아는 중·북부 이탈리아와 별개의 역사를 꾸려왔다. (1권 420쪽의 주 참조). 그러나 시대는 인물을 낳는다. 여기서 또 한 명의 영웅 가리발디(Giuseppe Garbalit, 1807~1882)가 등장한다. 젊은 시절 | 1830년의 해방 전쟁에도 참전한 바 있는 그는 1000명의 의용군으로 편성된 붉은 셔츠단(Camicie rosse)을 이끌고 시칠리아와 나폴리를 점령해 사르데냐의 에마누엘레 왕에게 바쳤다. 가리발디는 원래 공화주의자였으나 이탈리아 통일이라는 대의를 위해 개인적 신념을 버렸던 것이다(이미 유럽은 민족주의가 그 어느 것보다 우선시되는 상황이었다)【원래 가리발디는 사르데냐가 주도하는 통일 운동에 반대했고, 외세에 의존하려 한 카보우르의 정책에도 반대했다. 그래서 그는 나폴리를 정복한 다음 로마까지 점령해 제헌의회를 소집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를 알아차린 카보우르는 재빨리 사르데냐군을 남하시켜 가리발디군을 막았다(그는 가리발디가 로마를 침공할 경우 프랑스가 거세게 반발하리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자칫하면 통일도 이루기 전에 내전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가리발디는 자신의 뜻을 꺾고 카보우르와 통합했다】.
카보우르와 가리발디의 문무에 걸친 완벽한 합작으로 마침내 1861년 이탈리아 왕국이 세워졌고, 에마누엘레는 초대 왕위에 올랐다. 로마가 멸망한 이후부터 근대 초기에 이르기까지 유럽 문명의 중심지였던 이탈리아에 비로소 처음으로 나라다운 나라가 세워진 것이다. 이렇게 어렵사리 그려진 용의 그림에 눈을 찍어준 것은 프랑스였다. 가톨릭의 심장인 로마만큼은 어떻게든 사수하려던 프랑스가 1870년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철수함으로써 이탈리아 왕국은 피렌체에 있던 수도를 로마로 옮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으로 이탈리아는 로마 제국 이후 1500년 만에 다시 반도 전체를 통일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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