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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스트 교육학 - 28. ③강: 괜찮아, 사후적 지성이야 본문

연재/배움과 삶

트위스트 교육학 - 28. ③강: 괜찮아, 사후적 지성이야

건방진방랑자 2019. 10. 22.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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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 괜찮아, 사후적 지성이야

 

 

트위스트 교육학 3강 제목은 지금 왜 칭송받지 못하는 교사들이 필요한가?’인데,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한참이나 돌아왔다. ‘기술이 곧 처방이다라는 이야기로 지금 상황을 기술하는 것만으로도 현재의 문제를 진단할 수 있고, 다른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이익의 가치가 아닌 다른 가치로 만난 삶론, 관계론, 배움론이라는 이야기로 관점을 넓히면 다양한 삶의 모습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상식으로 모든 상황을 판단하고, 그래서 살아온 방식대로 그대로 살려 할 것이 아니라, 사후적 지성으로 무언지 잘 알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다양한 가치들을 어루만지고 여태껏 살아보지 못한 방식으로 살아봐야 한다.

 

 

일을 시작도 하기 전에 판단하고, 투자 대비 결과로 판단하는 게 너무도 당연시 되었다. 그걸 깨기 위해선 '사후적 지성'이 필요하다.

 

 

 

혁신학교는 혁신적이지 않고, 프라임 사업은 프라임하지 않다

 

이와 같은 지성을 사후적 지성이라 한다. 지성은 어떤 일을 시작하기 전에 미리 판단되고 예측되어 생기는 게 아니라, 사후적으로 판단되어 생긴다. 사전에 이미 판단된다면, 그건 기존의 관성대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그러니 기존의 문법에 따라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살아갈 뿐, 무언가를 생각하고 고민할 필요가 없어진다.

이런 이유 때문에 동섭쌤은 혁신학교도 혁신적이지 않다고 못 박으며, 그 이유를 “‘감히 예측할 순 없지만 이것을 하면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아서 이 일을 진행하고 싶다라는 생각 때문에 하는 일들도 가능해야 하는데, 지금의 혁신학교들은 이미 그걸 진행하면 얼마나 대학을 가는 데 유리한가?’, ‘들어간 돈에 따라 어느 정도의 성과가 나오는가?’라는 획일적인 기준에 따라 사업이 진행되고 판단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고 밝히고 있다. 그건 혁신학교조차 자본이 촘촘히 쳐놓은 그물망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얘기고, 그러다 보니 브리콜라의 삶에 대한 이야기, 맹상군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 잡스의 배움에 대한 이야기가 용인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현실이기에 혁신학교 운동이 진정한 자본에 물들지 않은 교육을 위한 운동이 되기 위해서는 사후적 지성으로 판단할 수 있는 열린 교육의 장이 되어야 한다.

 

 

프라임사업은 이윤이 얼마나 대학에 깊이 개입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런데 문제는 중고등학교 교육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치는 대학교 교육이 철저히 자본의 논리에 따라 흘러간다는 점이다. 최근에 대학교는 프라임 사업이란 게 진행되고 있다. 학령인구 감소로 대학교 입학정원이 줄면서 대학의 내실을 다진다는 명분으로 진행되는 사업인데, 어디까지나 기업의 요구에 따라 진행되고 있다. 그래서 취업이 잘 되지 않는 학과(인문학, 기초학문을 다루는 학과)는 폐지하고, 취업이 잘 되는 학과는 새롭게 신설하여 정원을 늘리겠다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대학이 큰 배움의 장이 아닌, ‘취업사관학교라 불러야 할 정도가 학문의 기본이 무너져 내렸다. 대학이 자본과 완벽히 하나가 되면서, 중고등학교도 그런 흐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게 되었으며, 사후적 지성이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프라임사업은 이윤이 얼마나 대학에 깊이 개입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사후적 지성으로 유유히 누비라

 

이런 세상에서 사후적 지성을 말하는 게 어쩌면 너무 비현실적인 얘기처럼 들릴 지도 모르겠다. 사회가 너무 급격하게 눈앞의 이익만을 중시하도록 재편되었으니, ‘사후적 지성에 따라 지금 당장은 알 수 없는, 그래서 모르지만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사귀고 배우라고 한들 너무 현실 동떨어진 얘기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우리는 이미 이런 세상의 해악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건 결코 삶을 풍요롭게 하지도, 배움의 즐거움을 누리게 하지도, 사귀는 기쁨을 느끼게 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니 이런 때일수록 괜찮아라며 마음을 강하게 먹고, 이익과는 반대의 벡터로 나가려는 결단이 필요하다.

 

 

공부란 눈앞의 실리를 따라가는 것과는 정반대의 벡터를 지닌다. 오히려 그런 것들과 과감히 결별하고 아주 낯설고 이질적인 삶을 구성하는 것. 삶과 우주에 대한 원대한 비전을 탐구하는 것. 그것이 바로 공부다. 더 간단히 말하면, 공부는 무엇보다 자유에의 도정이어야 한다. 자본과 권력, 나아가 습속의 굴레로부터 벗어나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해야 비로소 공부를 했다고 말할 수 있다. (40p)

-호모쿵푸스, 고미숙 저, 그린비출판사, 2007, pp 40

 

 

위의 인용문을 통해서도 볼 수 있듯, 배운다는 것은 과감히 자본이 쳐놓은 이익이란 가치 기준에서 벗어나 그 위를 유유히 걸어가며 자유에의 도정을 하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외칠 수 있다. “괜찮아, 사후적 지성이 나를 한 단계 더 나아갈 수 있도록 이끌 거야라고 말이다.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 우린 교육을 통해 대체불가능한 존재가 되려 하는가? 대체 가능한 존재가 되려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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