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③강: 칭송받지 못하는 교사가 되자
‘사후적 지성’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되었다면, ‘지금 왜 칭송받지 못하는 교사가 필요한가?’라는 제목도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이 제목은 어찌 보면 ‘책임감 강한 사람이 조직에 있어야 한다’, ‘사명감이 높은 사람이 국회의원에 뽑혀야 한다’처럼 너무도 판에 박혀 비판조차 할 수 없는 말을 비틀어, 여태껏 생각해보지 못한 부분을 다시금 생각하도록 도와주니 말이다.
칭송받지 못하는 교사를 통해 교직사회의 획일화를 비판했다?
올 초에 동섭쌤이 경인교대에서 강의를 할 때 위의 제목을 처음으로 말했다. 이 제목을 들었을 때는 ‘칭송받는 교사만 있는 교육계는 크게 문제가 있다는 얘기인가 보다’라고 지레짐작했다. 어느 단체든 칭송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칭송받는 사람들만 있는 단체는 우주를 통틀어 어느 곳에도 없다. 그럼에도 칭송받는 교사만 최고로 인정할 경우, 동질적인 기준에 따라 그 단체의 구성원을 획일화시킬 가능성이 크다. 공부는 잘하고, 체제에 순응적이며, 엘리트주의를 당연시 하는 사람들이 임용 제도를 통해 선발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엄밀히 따지면 교사야말로 가장 스펙트럼이 넓은 이질적인 존재들을 만나는 직업이라 할 수 있다. 가정환경의 차이에서부터 생각의 차이까지, 너무도 이질적인 존재들을 만나야 한다. 그런데 교사들이 하나의 가치로 획일화되어 있다면 그것만큼 학생들에게 불행한 일도 없을 것이다. 교사는 절대 학생을 이해할 수 없고, 아예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 동섭쌤이 ‘지금 왜 칭송받지 못하는 교사들이 필요한가?’라는 제목을 통해 교직사회가 동질적인 구성원이 모이는 것을 거부하고 이질적인 구성원이 모이는 단체가 되길 주문했다고 생각했다.
▲ [세 얼간이]의 장면, 더 이상 나와는 다른, 이질적인 존재를 이해할 필요가 없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가시적인 성과를 내려고만 하는 칭송받는 사람들
하지만 막상 강의를 들어보니, 그건 단순한 획일성의 문제는 아니었고, 전혀 다른 문제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 얘기 또한 칭송받는 대상이 선정되는 과정에 대한 문제제기였던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칭송받는 경우는 어떤 경우일까?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해나가면 칭송을 받게 될까, 그게 아니면 무언가 도드라진 활동을 하여 다른 사람의 눈에 띄거나 객관적인 자료로 자신의 업적을 내세울 수 있어야 칭송을 받게 될까? 두 말할 나위 없이 전자는 드러나지 않아 아무런 평가도 받지 못하지만, 후자는 드러나기에 칭송을 받게 된다. 이쯤 되면 ‘칭송=곧바로 결과가 나오는 일을 하여 좋은 평가를 받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국회의원이 되었건, 국가를 경영하는 사람이 되었건 그들이 혹하는 건, 진득하니 무언가를 하여 천천히 자신의 노력이 드러나기보다, 직접적이며 단기적인 성과를 내어 곧바로 ‘유능하다’는 꼬리표가 붙게 하는 것이다. 4년이란 시간은 길지 않기에 그 시간동안에 유능해 보이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눈에 바로 보이는 일들을 해야 한다. 그러니 부조리한 시스템을 정비하고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는 일을 하려 하기보다 청계천을 복구하고 세빛둥둥섬을 만드는 일을 한다.
▲ 노을에 비친 세빛섬. 이 돈을 다른 곳에 썼다면 어땠을까? 하지만 이런 가시적인 업적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는 거겠지.
교사도 칭송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외형적으로 그럴 듯해 보이는 온갖 행사에 학생들과 참여하고, 성적을 올릴 수 있는 일이라면 나머지 학생들이 자존심에 상처를 입든 말든 소수의 학생만을 위해 수업을 한다. 이런 식의 칭송받는 교사들이 많다는 건, 그 조직이 건강하지 않다는 얘기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동섭쌤은 “우리 사회엔 수치화할 수 없는 게 훨씬 많습니다. 그런데도 수치화를 잘 하는 사람들이 좋은 평가를 받고, 그렇게 지성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오히려 한국사회에서 큰 목소리를 내고 있으니, 참 슬픈 이야기입니다.”라고 말했다.
▲ 영화 [세얼간이]의 총장님. 매우 희화화된 인물이지만, 우리 사회의 칭송받는 교사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칭송받지 못하는 교사가 칭송받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칭송받지 못하는 교사들이란 어떤 사람일까? 단순히 생각하면 ‘칭송받지 못함=게으른 사람’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여기선 ‘칭송받지 못함=표 나지 않게 자신의 일을 충실히 하는 사람’으로 보아야 맞다.
그래서 동섭쌤은 “마을에 둑이 하나 있는데, 거기에 작은 구멍이 뚫려 물이 샙니다. 그래서 그 곳을 지나가던 아이 하나가 그 구멍을 돌로 막았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겠죠. 그 아이도 자신이 사고를 막았다는 것도 알지 못하고, 마을 사람들도 그 아이가 한 일을 알지 못합니다. 사고를 미연에 방지한 사람들의 공적은 결코 표창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 사회엔 ‘칭송받지 못하는 영웅’,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의 미학’이 있기에, 그나마 간신히 유지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생기지 않으면 그걸 높이 쳐주지 않지만, 차라리 둑이 무너져 내린 후에 누가 먼저 달려갔느냐, 구조를 많이 했느냐에 따라 능력을 평가해줍니다. 미연에 방지한 능력보다 사후에 처리한 능력을 더 평가해주는 것이죠.”라고 말했다.
▲ 아이가 둑을 막은 행위, 그리고 청소와 설거지 같은 집안 일은 티도 나지 않지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이런 일에 대한 평가가 필요하다.
평가제도엔 한계가 분명히 있다. 그러니 잘 수치화하거나, ‘어떤 트집도 잡지 못할 정도’로 완벽하게 문서로 만들거나 하는 경우, 좋은 평가를 받게 되어 있다. 그게 막상 현장에선 아이들과 어떤 식으로 반응했는지, 그리고 교육적인 어떤 성과를 거두었는지는 아무도 ‘묻거나 따지지도’ 않은 채, 그저 보고서만 잘 만들어내면 만사 오케이인 것이다. 그러니 이런 식의 평가제도가 바뀌어야 하고, 그러지 못할 바엔 아예 ‘칭송받지 못하는 교사’에 대해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칭송받지 못하는 교사’가 오히려 당당히 교육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강하게 말하고, 교육 현장에서 관리자 못지않은 책임감을 부여 받을 때, 교직사회의 활기도 살아나며, 교육의 열기도 후끈 달아오를 것이다. 그건 곧바로 학생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됨은 물론이다.
▲ 끝나고 가는 길은 언제나 싱그럽다. 이날은 비까지 내리니, 더욱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이다.
수고했어 오늘도
드디어 우린 동섭레스트의 제3캠프에 올랐다. 처음 오르기 시작했을 땐, 언제 정상에 오르려나 기대도 할 수 없었고 아무런 희망도 전혀 없었지만, 어느덧 우린 5부 능선을 지나게 되었다. 다섯 번의 강의 중 세 번째의 강의가 끝나며 정상이 눈앞에 보이는 위치까지 올라왔으니 말이다. 물론 처음 오를 때에 비하면 체력은 현저히 떨어졌고, 산소도 부족하여 숨쉬기조차 힘들어졌지만, 그래도 고도가 높아진 만큼 시야가 확 트이는 기분만은 최고라고 할 수 있다. 높아진 시좌를 확보한 만큼 삶을 좀 더 다양한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그에 따라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정상에 오르는 그 순간까지 긴장은 풀지 말되, 제3캠프에 오른 이 순간의 기쁨을 만끽하며 지금만은 모처럼만에 푹 쉬면서 함께 둘러앉아 “수고했어~ 오늘도~”라고 서로를 축복하고 위로하며, 즐거운 식사 시간을 가져보자.
▲ 동섭레스트의 중반부까지 올랐다. 이제 서서히 정상이 가까워지지만 이런 때일 수록 긴장의 끈을 놓아선 안 된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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