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④강: 학교가 학교다울 때 생기는 문제점
저번 후기에서 살펴보았듯이 ‘정명론’은 이런 식으로 비판받고 있다. 그렇다면 정명론과 같은 ‘학교를 학교답게 해야 한다’는 논리도 이런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 학교가 학교다워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니... 이게 뭔가?
학교라는 시스템의 태생적 문제점
첫째, 학교 시스템이 지닌 문제점을 묵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공교육이 붕괴된 데엔 아이들을 적게 나으며 애지중지 키우는 상황, 사교육이 팽창하며 공교육은 그저 졸업장을 따기 위해 수단으로 변질된 현실 등의 문제도 있겠지만, 그런 외부적인 변화 외에 학교 시스템 자체의 문제도 크다고 할 수 있다. 여전히 교사는 정해진 시간 동안 교실이란 한정된 공간에서 20~30명의 학생들을 앉혀 놓고, 하나의 정답만을 맞추도록 가르치고 있다. “됐어(됐어) 이제 됐어(됐어)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 / 그걸로 족해(족해) 이젠 족해(족해) 내 사투로 내가 늘어놓을래 / 매일 아침 일곱시 삼십분까지 우릴 조그만 교실로 몰아넣고 / 전국 구백만의 아이들의 머리속에 모두 똑같은 것만 / 집어넣고 있어 / 막힌 꽉 막힌 사방이 막힌 널 그리고 우릴 덥썩 모두를 / 먹어 삼킨 이 시꺼먼 교실에서만 내 젊음을 보내기는 / 너무 아까워 // 좀 더 비싼 너로 만들어 주겠어 네 옆에 앉아있는 / 그애보다더 / 하나씩 머리를 밟고 올라서도록해 / 좀더 잘난 네가 될 수가 있어”라는 가사의 노래는 1994년에 발표된 서태지와 아이들 앨범에 있다. 그 후로 무려 20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학교는 이 가사와 판박이처럼 닮아 있고, 아니 어쩌면 더욱 더 악랄한 공간이 되어버렸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학교 시스템은 지금부터 200년 전인 산업혁명기에 본격적으로 갖춰지기 시작했다. 공장이 대규모로 만들어지며 엄청난 노동력이 필요해졌고 그에 따라 학교는 규율에 맞추도록, 정해진 일을 실수 없이 하도록 가르쳤던 것이다. 이런 상황이니 ‘19세기 교실에서 20세기 교사가 21세기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우스갯소리도 나오게 된 것이다.
▲ [죽은 시인의 사회]의 한 장면, 이 영화의 모습과 우리의 모습은 얼마나 다르고 같은가?
‘학교답다’를 정의하는 자본의 힘
둘째, ‘학교답다’에 대한 이상적인 모습이 정의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정권이 바뀔 때마다 위정자(or 기득권 세력)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교육의 모습에 따라 교육정책은 수시로 바뀌어 왔다.
그런데 슬픈 것은 무수히 교육정책이 바뀌어 왔음에도, 그 방향은 완벽히 기업의 요구를 교육계에 반영하는 쪽으로 진행되었다는 사실이다. 그건 진보정권을 자임하던 노무현 정부 때든, 그 이후 급격히 보수화된 이명박 정부 때든 달라지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 때는 오죽하면 ‘교육인적자원부’라고 교육부의 명칭을 바꾸며 인간의 시장가치를 높이기 위한 교육이 전면적으로 펼쳐졌고, 이명박 정부 때는 ‘자율형 사립고’ 정책을 추진하여 일반고를 삼류학교로 전락시켰으며, ‘입학사정관제’를 도입하여 수능의 대입 체제를 무력화시켜 돈과 빽이 있는 아이들이 유리한 대입 전형을 만들었고, 박근혜 정부 때는 ‘프라임 사업’으로 대학을 내실화하겠다며 고등교육의 기업화를 부추겼다.
▲ 언제나 말은 좋다. 하지만 속으로 들어가면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다.
디자인된 학교, 그래서 재디자인이 필요하다
이처럼 ‘학교를 학교답게 해야 한다’며 여러 정책을 폈음에도, 오히려 학교는 더욱 혼란에 빠졌고 아예 붕괴될 지경에 이르렀다. 움직일수록 상황은 더욱 꼬이고, 그걸 풀기 위해 애쓸수록 완전히 엉켜버려 손조차 댈 수 없게 됐다. 그러니 이쯤에서 우린 ‘학교를 학교답게 해야 한다’는 말이 얼마나 학교 시스템의 문제를 은폐하고 묵인하며, 자본이 무한정으로 학교를 간섭하도록 방조하고 있었는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애초에 서술을 잘못했으니, 처방 또한 잘못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 [굿&바이]를 보여주고 있는 동섭쌤. 대부분의 중요한 일은 '어쩌다 보니'에 해당된다.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을 알기 때문에 동섭쌤은 이번 강의의 제목을 아예 한 단계 비틀어 ‘학교를 학교적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이라 붙인 것이다. 이렇게 제목을 정하고 보면, ‘학교적’이라는 단어를 유심히 보게 된다. 바로 ‘학교적’인 것이 문제임을 알 수 있으며, 너무도 당연하게 보아왔던 학교적인 모습을 돌아볼 수 있을 때 실마리도 찾을 수 있다.
다음 후기에선 ‘룰이 바뀌면 생활방식이 바뀐다(24초 룰)’는 일화를 통해 재디자인의 힘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며, 학교를 학교적이지 않은 학교로 재디자인할 수 있도록 여러 사례들을 소개할 것이다. 이 때 등장하는 것이 회화분석Conversation Analysis인데, 학교에서 일상으로 오고 가는 대화를 분석하여 그 안에 교묘히 숨어 있는 권력관계나 편견을 끄집어낼 것이다. 이를 테면 교사가 “지금 몇 시입니까?”라고 묻자 학생은 “12시 52분입니다”라고 대답하면, 교사가 “참 잘했어요”라고 대화하는 식이다. 이 대화는 매우 학교적인 대화라 할 수 있는데, 이 짧은 대화에도 엄청난 메시지가 숨어 있다. 이런 대화가 왜 문제가 되는지, 다음 후기에서 본격적으로 알아보도록 하자.
▲ 강의를 들을 자세를 갖췄다. 이제 들려오는 얘기들을 잘 씹어 먹으며 된다. 하지만 지금 이순간은 김밥부터 야금야금!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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