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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서설 - 삼법인의 허구 본문

고전/불경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서설 - 삼법인의 허구

건방진방랑자 2022. 3. 15.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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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법인의 허구

 

 

여기 법인’(法印)이라는 말은 원시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과히 기분좋은 말은 아니다. ‘법인’(法印, dharmoddāna)이란 문자 그대로 불법(佛法)이 되는 인증(印證)’이라는 뜻이다. 즉 불법과 타법이 혼동될 경우 어떠한 일자가 불법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 그것을 곧 법인이라고 부른 것이다. 이것은 법인이라는 말 자체가, 불타 자신의 말이라기보다는, 불타의 말씀을 변호하기 위한 호교론(apologetics)적 색채를 강하지 띠면서 후대에 형성된 개념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것 설법이 아닌 아폴로지에 불과한 것이다. 물론 법인으로서의 이 삼 개 조항, 그러니까 불교헌법 3대 총강령이라 말할 수 있는 이 조항의 내용은 직접ㆍ간접으로 성도 후의 세존이 설한 내용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뿐 아니라, 삼법인(三法印)의 내용 또한 불교교리의 핵심을 잘 압축해놓은 것이라는 데 나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 세존 자신은 자기의 생각을 이렇게 도식화된 형태로 인증하려고 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잡아함경권제1색에서 생겨난 모든 것은 무상한 것이며, 무상한 것은 고통스러운 것이며, 고통스러운 것은 내가 아니다[色無常, 無常卽苦, 苦卽非我. 대정2-2]’라고 말한 것이 후대에 말하는 삼법인의 근거로서 들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구문이지만, 이러한 아함의 전승은 삼법인과 같은 어떤 정형적 틀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 삼법인이란 어디까지나, 부파불교에서 호교론적인 시각에서, 최소한 이러한 교설의 기준을 지켜야만 혹자가 불타의 말이라고 암송하는 내용이 붓다의 가르침이라 인증할 수 있다고 하는 기준을 세운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지금 보리수나무 밑의 인간 싯달타의 명상이나 사유의 과정을 추적하는 데 있어서는 이 삼법인은 결코 바람직한 방편이 되질 못하는 것이다.

 

나는 대학교 시절에 불교학개론을 처음 들었다. 내가 다니던 대학에는 불교학을 전공하는 교수님이 안 계셨다. 그런데 타대학으로부터의 강사초빙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대학교 강단에서 불교학을 강의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유학을 가르치시던 분이 그냥 강의했다. 불교학개론 첫 시간에 내가 접한 것은 깨알같이 칠판에 쓴 삼법인(三法印)이었다. 그런대로 성실한 내용의 강의였지만 삼법인은 화창한 봄날의 나른한 수강생들에게 쏟아진 자장가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나는 이 삼법인에 대한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삼법인에 대한 일반인들의 이해에는 매우 중대한 오류가 끼어들 가능성이 있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아 허무하다! 아 쇼펜하우어가 생각나는구나! 제법무아(諸法無我), 아 덧없다! 모든 법이 다 가짜구나! 열반적정(涅槃寂靜)이라, ~ 이 허무하고 덧없는 세상을 버리고 고요한 열반에나 들자꾸나!

 

제행무상이니 제법무아니 하는 말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상적 질서의 부정을 의미한다면, 그에 대하여 열반적정은 본체론적 궁극자! 무상하고 덧없는 세계에 대하여 고요하고 평화로운 영원한 열반의 세계를 우리 의식 속에 그려주는 것이다.

 

3법인 중에서 가장 오류적인 것은, ‘열반적정이라는 이 한 마디인 것이다. 열반(涅槃, nirvāṇa)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열반이라는 단어는 죽음과 연결이 되고, 삶의 세계가 빛을 의미한다면, 죽음의 세계는 곧 어둠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서 삶의 세계가 쉬지 않고 살아 움직이는 동()의 세계라고 나면, 죽음의 세계는 당연히 정()이 되고 만다. 따라서 열반은 한 본체론적이고, 우주론적이고, 실체론적 의미를 띠게 되며, 그 본체적 세계는 적정(寂靜)한 것이라는 결론에 자연스럽게 도달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세계문명사에 등장한 모든 주정주의(主靜主義, quietism)의 한 원형에 불과하다. 현상적 질서에 대하여 보다 근원적인 실체가 있고, 그 실체는 고요하고 정적인 것이라는 주장인 것이다松本史朗, 연기와 공(서울 : 운주사, 1998), pp.222~3. 緣起(東京 : 大藏出版, 1998), pp.192~3. 마쯔모토씨는 해탈과 열반이라는 논문에서 해탈이나 열반은 가치적으로 상하관계에 있는 두 실체를 전제로 하며, 그것은 좋은 것이 나쁜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고 지적했다. 이때 좋은 것은 무시간적인 독존(獨存)이다. 싯달타 재세시에도 초기상키야철학이나 쟈이나교의 아론은 이러한 해탈사상을 대표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아론(我論)에 기초한 해탈사상이 초기불교교단에 침투되어 불교경전에 반영되었다고 지적한다. 나는 마쓰모토씨의 이러한 논의는 매우 의미있는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초기불교에서 삼법인으로서 이 열반적정이라는 말을 삽입시킨 것은 그릇된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까지 불교를 곡해시키는 근원적인 오류의 샘물이 되고 있는 것이다. 중국 신유학의 선하인 정몽(正蒙)의 저자 장 헝취(張橫渠, 1020~1077)를 위시하여 동론(動論)을 외친 명말청초의 대유 왕 후우즈(王夫之, 1619~1692)에 이르기까지, 이들이 한결같이 불교를 공격하는 것도 바로 이 열반적정이라는 한마디에 숨어있는 주정주의의 함정이었다. 기실 남방상좌부전통을 이은 오늘날의 스리랑카ㆍ미얀마ㆍ타이 등의 남방불교에서는 열반적정을 법인으로서 간주하지 않는다. 남방불교에서는 삼법인이라는 개념보다는 삼상(三相, tilakkhaṇa)이라는 개념을 쓰며, 여기에는 물론 열반적정이 빠져있다. 팔리어본 법구경(Dhammapada) 20, ‘진리의 길만 펼쳐봐도 이러한 사실을 쉽게 확인해볼 수 있는 것이다석지현 역, 법구경(서울 : 민족사, 2001), pp.151~2. / 雜阿含經第十一切行無常, 一切法無我, 涅槃寂滅이라 했고(大正2-66), 大般涅槃經第十三一切行無常, 諸法無我, 涅槃寂滅, 이것은 第一義이다라고 했고, 蓮華面經卷下一切行無常, 一切法無我, 寂滅涅槃, 이 셋은 法印이다라 했고, 有部毘奈耶第九諸行은 모두 無常이요, 諸法은 모두 無我, 寂靜은 곧 涅槃이다. 이것을 三法印이라 이름한다라 했고, 大智度論第三十二三法하여 法印으로 삼았다. 소위 一切有爲法無常印, 一切法無我印, 涅槃寂滅印이 그것이다라 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三法印의 개념은 아가마시대부터 성립한 것이긴 하지만 그것이 法印의 개념으로 확연하게 쓰여진 것은 대승불교시대에 내려와서야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대승의 아폴로지로서 생겨난 것이며, 특히 중국불교에 와서 경전의 진위를 판정하기 위한 표준으로서 더 확고한 지위를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인도의 개들은 아(我)가 없다. 나른한 요기들처럼 항상 축 늘어져 있다. 여기 길거리에 치어 열반한 개에게 동네아동이 물을 뿌려주고 있었다. 이 생명은 육도윤회에서 무엇으로 다시 태어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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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반야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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