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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철학과 굴뚝청소부, 제4부 근대철학의 해체 : 맑스, 프로이트, 니체 - 1. 맑스 : 역사유물론과 근대철학, 주체철학의 전복 본문

책/철학(哲學)

철학과 굴뚝청소부, 제4부 근대철학의 해체 : 맑스, 프로이트, 니체 - 1. 맑스 : 역사유물론과 근대철학, 주체철학의 전복

건방진방랑자 2022. 3. 25.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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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철학의 전복

 

 

이러한 주장은 근대철학의 출발점 자체를 근본적으로 뒤집어엎는 것입니다. 자명하고 확실한 출발점, 항구적인 기초인 주체가 따로 없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반대로 주체, ‘인간이 그렇듯이 사회적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구성물이요 결과물이란 겁니다. 동일한 사람이 20세기에 호텔을 경영하는 주체로서 존재하지만, 중세로 밀려가선 시종이란 주체로 존재하게 되듯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주체가 사고하는 내용이나 방식 역시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영주의 성을 사서 호텔로 만들겠다는 생각이 증세로 날아간 시종의 후손에게 과연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반면 20세기의 자유로운 공기를 맛본 시종은 이게 더 이상 영주의 명령을 절대적으로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되돌아가자는 영주의 명령까지 따르지 않지요. 이래서 맑스는 개인들이 갖고 있는 의식이나 관념은 사회관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데카르트의 말처럼 생각하기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어떤 사회적 관계에 속하느냐에 따라 사고 자치도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을 구정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철학적 전환에 힘입어 근대철학의 출발점을 이루던 주체 개념은 해체되고, 근대적 문제설정에서 연유하는 주체철학은 전복되고 맙니다. 이는 맑스가 근대적 문제설정을 넘어서는 또 하나의 결정적인 지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 주체철학의 지반을 떠나자마자 역사 개념 또한 변하게 됩니다. 이제 더 이상 역사는 어떤 주체 그게 절대정신이든 인간이든 간에 가 자신의 목적에 따라 만들어내는 무엇이 아닙니다. 역사 역시 이제 사회적 관계에 의해 정의되고, 그것의 변화와 대체 과정에 불과한 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란 주체도 목적도 없는 과정”(알튀세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헤겔과는 달리 맑스에게는 소외되거나 실현되어야 할 목적이나 정신같은 것은 없습니다. 물론 초기의 소외론적 저작은 소외의 해체라는 목적을 항해 나아가는 과정으로 역사를 이해한다는 점에서 목적론적 관점이 있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자본과 같은 맑스적저작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거기서는 다만 자본주의에서 자본축적의 역사적 경향만을 도출하고 보여줄 뿐입니다.

 

흔히 이러한 입론을 공산주의라는 이상적 상태를 목적으로 가정하는 목적론이라고 비판합니다만, 이는 목적론의 개념을 남용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경향을 말하는 것이나 어떤 상태로 되리라는 서술 자체가 목적론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목적론은 그러한 경향이 어떤 이념이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죠. 스피노자 말마따나 원인을 목적으로 대체하는 것, 즉 어떤 일의 원인을 정해진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것으로 간주하는 게 목적론이지, 어떤 경향을 갖는다는 게 모두 목적론은 아님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코민테른 기관지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Communist International) 1호의 표지

노동자의 주거문제를 해결하려는 파밀리스테르의 시도나,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발적 연합에 의해 공동의 삶을 만들어 가려는 코뮨적인 노력들은 두 가지 방향에서 공격을 받았다. 하나는 자금을 권 부르주아들의 공격이었고, 다른 하나는 입장을 달리하는 사회주의자들의 비판이었다. 당시 사회주의자들은 이런 식의 해결책이 자본주의라는 근본적인 생산관계는 바꾸지 않은 채, 부분적이고 국지적으로 주거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는 점에서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즉 노동자의 주거문제나 아이들의 양육문제 등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자체를 전복하는 혁명을 통해서만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라는, 저 그림의 맨위에 새겨진 맑스의 문장은 이처럼 주거문제는 물론 다른 모든 문제에 대해서도 그들이 내리려고 했던 유일한 해답이었다. 그것은 확실히 사실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혁명에 의해 자본주의가 타도되기 전에는 노동자의 삶은 코뮨적인 방식으로 조직될 수 없는가? 그것은 여전히 무의미하고 국지적인가? 만약 자본주의의 완전한 타도가 끊임없이 연기된다면,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발적 연합또한 똑같이 연기되어 마땅한가? 이는 현재의 지배적인 맑스주의에 대해서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으로 보인다.

 

 

인용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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