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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굴뚝청소부 - 제6부, 1. 구조주의와 철학 & 2. 레비-스트로스와 구조주의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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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굴뚝청소부 - 제6부, 1. 구조주의와 철학 & 2. 레비-스트로스와 구조주의

건방진방랑자 2022. 3. 26.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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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부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 근대 너머의 철학을 위하여

 

 

1. 구조주의와 철학

 

 

현대철학에는 다양한 흐름이 있고, 이 흐름은 이제까지 얘기해온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기도 합니다만, 이 자리는 어차피 한정된 것이기에, 그걸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일단 구조주의자, 혹은 포스트구조주의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사상 가운데 대표적인 것만을 간략히 다루려고 합니다. 물론 이러한 흐름이 현대철학을 대변하는 것이냐는 반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건 옳은 말입니다. 현상학이나 하이데거, 거기서 이어지는 해석학적 흐름, 혹은 좀 다른 방향으로 현상학을 발전시킨 실존주의, 그리고 영미권의 철학도 나름의 분명한 전통을 형성하고 있는 게 사실이며, 독일에서는 비판이론이라 불리는 철학적 전통이 독일 너머까지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근대철학의 문제설정과 그 경계들을 검토하는 게 우리의 주제라면, 이 한계를 넘어섬으로써 경계선을 드러내려고 한 시도가 명확하면 할수록 주제에 부합한다고 생각합니다. 구조주의나 포스트구조주의가 근대철학과의 관계를 명시적으로 드러낸다는 점, 그리고 근대철학의 한계를 의식적으로 넘어서려 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유독이 자리를 빌려 이야기할 이유는 충분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구조주의의 흐름에 들어서자마자 우리는 적잖이 당혹스런 사태에 부딪칩니다. 그것은 우리가 흔히 구조주의자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자신이 구조주의자임을 부정하고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레비-스트로스만이 예외일 따름입니다. 이런 사정은 포스트구조주의자라고 불리는 사람들도 마찬가집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태는 무엇 때문이며,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건 그들을 직접 만나본 일이 없는 저로선 감잡기조차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고 이게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도 의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사정의 원인이든 결과이든 간에, ‘구조주의라는 말 자체가 매우 모호하게 사용된다는 점은 언급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구조라는 말은 인문과학이나 사회과학에서 가장 흔히 사용되는 개념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언어구조니 사회구조니 경제구조니 정치구조니 하는 말들이 그거지요. 구조주의란 말을 가장 넓게 사용하는 경우는 이처럼 구조를 가정하고, 그것이 반복적으로 다양한 현상들을 만들어낸다는 전제 위에 다수의 현상들 근저에서 구조를 찾아내려고 하는 시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는 지시하는 내용이 너무 포괄적이어서, 이 말만으로 어떤 철학적 태도나 사상적 흐름을 변별하기는 곤란합니다.

 

반면 가장 좁게는 언어의 일반적이고 공통된 구조를 찾으려 한 구조언어학을 가리키며, 그 영향을 받아 구조언어학의 방법을 사용하는 경우를 가리킵니다. 이들은 어떤 하나하나의 항은 다른 항과의 대립적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고, 각각의 요소들은 전체 체계를 이루며, 이 체계 속에서만 의미나 기능이 정해진다고 합니다. 이런 의미로 쓴다면 아마 구조언어학자와 레비-스트로스 정도만이 구조주의란 이름에 적당하다는 결론에 이를 것 같습니다.

 

다른 한편 이들의 영향 아래, 다양한 것들의 근저에 있는 구조를 보편적이고 무의식적인 수준에서 찾으려는 시도들이 있었습니다. 이들 역시 요소가 아니라 관계를 강조하고 그 관계 속에서 요소를 이해했지요. 예컨대 다양한 지식이나 사고를 가능하게 해주는 무의식적인 (사고)구조를 찾으려는 시도(푸코의 에피스테메), 모든 인간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무의식의 구조를 규명하려는 시도(라캉의 타자), 혹은 다양한 사회에 공통된 요소들을 찾아내고, 그 요소들의 결합관계로써 사회의 본질적 구조를 찾아내려는 시도(알튀세르/발리바르의 생산양식)들이 이런 관점에서는 구조주의로 간주됩니다.

 

제가 지금 구조주의란 말을 사용한다면 세 번째 의미로 사용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을 단순히 구조주의자란 하나의 이름만으로는 충분히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그들은 이후 구조주의가 가지고 있는 중요한 가정을 해체하고 파괴했습니다. 예컨대 모든 인간에 공통된 무의식적 조건을 찾으려는 시도나, 모든 경우를 포괄하며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구조를 찾으려는 시도를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구조주의자로 불리기를 거부합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해체 역시도 구조주의를 통해 개척한 새로운 지반 위에서 행해진 것이며, 구조주의와 연속성을 갖고 있다는 것만은 완전히 부정할 순 없을 것 같습니다.

 

포스트구조주의라는 말은 그것이 대개(‘전부는 아니란 의미에서) 구조주의의 연속성상에 있음을 뜻하지만, 동시에 그 한계를 해체하고 넘어선다는 점에서 구조주의를 벗어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알다시피 포스트라는 말은 무엇의 라는 의미인데, 그것을 벗어난다는 것인지, 그것에 이어져 있는 부분이란 뜻인지 모호합니다. 이 모호함이 차라리 이 흐름이 갖는 이중적인 위치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해서, 저는 그냥 포스트라고 음독해서 쓸 생각입니다.

 

 

 

 

2. 레비-스트로스와 구조주의

 

 

구조언어학에서 구조주의로

 

 

레비-스트로스는 구조주의란 이름과 가장 긴밀히 결부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망명지 미국에서 구조언어학자인 야콥슨과 함께 지냈는데, 거기서 구조언어학의 영향을 매우 강하게 받습니다. 이후 그가 개척한 구조주의라는 흐름과 연구방법은 이때 야콥슨을 통해서 배운 것이었습니다. 그는 구조인류학이란 책에서 음운학 원론으로 유명한 트루베츠코이를 언급하면서 자기의 연구방법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첫째, “음운론은 의식적인 언어현상의 연구로부터 무의식적인 하부구조로 옮겨간다고 합니다. 음운을 구별하는 것은 의식적인 게 아니라 무의식적인 거고, 따라서 음운론의 연구대상은 의식적 현상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하부구조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레비-스트로스 자신 역시 친족관계나 신화 등에 대해 무의식의 차원에서 연구합니다.

 

둘째, “각각의 항을 하나의 독립된 실체로 연구하는 것을 거부하며 항과 항의 관계를 분석의 기초로 삼아야 한다고 합니다. 예컨대 음소들 하나하나는 그 자체로는 무엇인지 알 수 없으며, 다른 것과의 관계와 대비 속에서 구별된다고 합니다. 예컨대 이란 말에서 ㅂ은 ㅍ이나 ㅁ, ㅃ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 소리를 얻으며, 실제 소리도 다른 소리와의 대비를 통해서 구별됩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개개의 항이 아니라 그 항들 간의 관계입니다.

 

세째, “음운론은 체계의 개념을 도입한다고 합니다. 음소들은 체계를 이루며, 결국 음운론이란 음소들의 체계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체계의 개념은 나중에 구조란 개념으로 이어집니다.

 

넷째, “음운론은 일반적인 법칙의 발견을 목적으로 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귀납에 의한 것이든 연역적인 것이든 상관없습니다. 물론 어느 경우든 단순히 경험을 일반화하는 식으로 수행하는 게 아니라 경험적인 것속에서 일반법칙의 징후를 찾아내고, 그것들을 하나의 체계로 구성함으로써 법칙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언어학적 방법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점에서 구조주의의 형성에 기여한다고 합니다. 첫째, 언어학은 어떠한 인간집단도 예외가 될 수 없는 대상, 즉 분절화된 언어활동이란 보편적인 대상을 갖고 있습니다. 둘째, 언어학의 연구방법은 야만인이든 문명인이든, 현대인이든 고대인이든 동질적인 방식으로 적용됩니다. 셋째, 언어학의 방법은 다른 인문사회과학에 비해 훨씬 폭넓은 보편성과 엄격한 과학성을 지닙니다. 이제 레비-스트로스는 보편적이며 동질적인, 그리고 정밀하고 과학적인 것을 자신의 연구영역에서 추구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이런 방법을 통해 연구하려는 대상은 대체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그것은 모든 문화에 공통된 질서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동양문화든 서양 문화든, 현대사회는 고대사회든 인간이 존재하는 모든 문화에 공통된 보편적 질서를 발견하려는 것이죠. 마치 야콥슨이 모든 언어에 공통된 어떤 보편적 구조(그는 이를 메타구조라고 합니다)를 발견하려고 했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인간의 삶에 공통된 질서를 발견하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그는 다양한 종족의 문화를 연구하는 사회인류학을 택했습니다. 다시 말해 모든 문화에 공통된 질서가 바로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적 연구대상입니다. 이것을 흔히 심층구조라고 합니다.

 

다른 한편 그는 이러한 공통된 사회적 문화적 질서를 찾으려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그러한 공통적이고 보편적인 질서가 존재한다면,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공통된 보편적 사고구조가 인간에게 있으리란 생각을 끌어내는 건 차라리 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는 날 것과 구운 것서곡에서, 데카르트처럼 인간 이성의 보편적 형태에 대한 가정을 할 게 아니라 이성의 집합적 형태에 대한 경험적 연구를 통해서 그것을 찾아내자고 합니다. 그럼으로써 상이한 주체들이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게 해줄 그런 무의식적인 조건을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고요. 이를 그는 사회적 무의식또는 구조적 무의식이라고 합니다.

 

결국 그는 사회인류학이란 경험적인 연구를 통해 모든 인간이 공유하고 있는 이성을, 그리하여 인간이 진리에 도달할 수 있게 해줄 무의식적 기초를 찾아내려고 합니다. 이것은 레비-스트로스의 철학적 연구대상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시도는 경험적 연구를 통해 이성의 선험적인 구조를 찾아내려 하는 것이고, 이런 한에서 이는 선험적 주체를 구성하려는 칸트의 노력과 유사합니다. 그래서인지 레비-스트로스는 자신의 연구가 선험적 주체 없는 칸트주의라는 리쾨르(P, Ricoeur)의 비판을 흔쾌히 받아들입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철학적 작업을 정신의 보편적이고 불변적인 기초를 찾아내려는 칸트 철학적인 방식으로 진행하겠다고 하죠. 그의 연구가 인류학에 머물지 않고 사상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이처럼 그의 작업이 갖는 철학적 의미 때문일 것입니다.

 

여기서 한마디 덧붙이자면, 레비-스트로스는 인간이나 주체를 구성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해체하는 것이 이제 인문과학의 목표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근대철학에서 그러하듯이 주체나 인간이란 개념을, 혹은 보편적 이성을 출발점으로 가정할 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해체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경험적 연구를 통해 진리의 기초, 인간들이 하는 사고의 보편적 기초를 찾아내자는 거지요. 그의 이런 입론의 영향으로, ‘반인간주의반주체철학은 구조주의 이후 대부분의 사상가들이 받아들이고 공유하는 바가 됩니다. 이후 인간의 죽음’ ‘주체의 죽음이 여러 사람에 의해 여러 가지 방식으로 선포되지요.

 

더불어 그는 역사주의를 비판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는 야생의 사고 마지막 장에서 사르트르의 역사주의를 비판합니다. 역사란 그것을 사고하고 쓰는 사람들에 의해 취사선택된 것이지 객관적이거나 과학적인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반면 구조주의는 어떤 대상이 갖는 요소들을, 상호관계 속에서 체계화한다는 점에서 (공시적으로 연구한다는 점에서) 객관적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반역사주의 역시 한동안 프랑스 사상가들에겐 중요한 철학이 됩니다.

 

 

 

 

친족관계의 보편적 질서

 

 

그러면 그가 경험적 연구를 통해 도달한 곳은 어딜까요?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무의식적 기초는 무엇일까요? 그가 도달한 곳은 한마디로 근친상간 금지’(incest taboo)라는 규칙이었습니다. 이를 위해서 그는 자연과 문화가 만나는 지점을 주목합니다.

 

인간이란 생물학적 존재면서 동시에 사회적 존재지요. 그런데 그는 인간이 편입된 곳이 자연인지 사회인지, 자연인지 문화인지를 구별해 주는 것은 무엇인가 질문합니다. 즉 자연이 끝나고 문화가 시작되는 곳이 어디냐는 거죠. 그것은 또한 동물과 달리 어떤 규칙이나 질서가 안정성과 지속성을 갖도록 해주는 것은 무엇이냐는 물음입니다. 친족관계의 기본구조의 첫 번째 장은 바로 이 자연과 문화란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는 규칙’(rule)보편성’(universality)을 대비시켜 정의합니다. 규칙은 문화에 해당되는 특징이고, 보편성은 모든 인간이 자연적 존재로서 갖는 특징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규칙은 특수적이며 상대적이지만, 보편성은 자연발생적이고 절대적입니다.

 

그런데 어떤 규칙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으로 나타나는 보편성을 갖는다고 합니다. ‘근친상간 금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즉 그것은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하게 규칙과 보편성이란 양자를 결합하여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모든 사회적 집단에서 예외없이 발견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는 자연적 존재로서의 인간과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연결해 주는 축인 셈입니다. 근친상간 금지라는 선을 통과하면서 자연적 존재는 사회적ㆍ문화적 존재가 됩니다. 즉 그것은 문화의 출발점이자 모든 문화의 기초인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근친상간 금지는 우리를 안팎에서 둘러싼 이중의 질서를 기초짓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보편적인 사회질서를 기초짓는 것입니다. 근친상간 금지는 그 자체가 허용과 금지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일정한 범위 내에서는 성적인 결합을 금지하는 한편, 그 외의 범위에서는 결혼이란 제도를 통해 성적인 결합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근친상간을 금지하지 않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특정한 방식의 결합을 안정적으로 허용하지도 않는 동물적 세계와 대비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주시해야 할 것은 결혼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인간관계가 어떤 보편적 특징을 갖고 있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레비-스트로스는 결혼이란 근친혼 금지의 기초 위에서 여자의 교환으로 맺는 인간관계로 파악합니다. 즉 두 개의 집단이 여자를 주고받음으로써 친족관계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이 친족관계가 사회구조의 기초며, 사회구조는 이러한 친족관계와 동형적(同形的)이라고 생각합니다.

 

친족관계의 기본구조는 간단히 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친족구조의 기본단위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 자식, 그리고 외삼촌이란 네 항이 맺는 관계입니다. 아버지-어머니 간 관계, 아버지-자식 간 관계, 어머니-외삼촌 간 형제관계, 외삼촌-조카 간 관계가 그것인데, 이를 그림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습니다.

 

 
  △ ⩵ ○ ― △
╱④
 
     

는 남자, 는 여자, 는 결혼관계, 는 친척관계

 

 

여기에 대비되는 두 가지 친족관계의 유형이 있습니다. 하나는 트로 브리안드족이고, 다른 하나는 체르케스족입니다. 트로브리얀드족은 모계사회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들은, 아버지의 마을에서 살긴 하지만, 나중에 재산은 외삼촌의 것을 물려받습니다. 부부간의 관계는 매우 친밀하며,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도 친밀합니다. 이처럼 친밀한 관계를 레비-스트로스는 (+)로 표시합니다. 반면에 남매간의 관계(이는 어머니와 외삼촌의 관계를 포함하지요)는 매우 엄격하며, 또한 외삼촌과 조카의 관계도 엄격합니다. 이는 (-)로 표현합니다. 요약하면 (+), (-)지요.

 

체르케스족은 이와 정반대되는 관계를 보여줍니다. 여기서는 부부간의 관계가 엄격하며, 대신 남매(외삼촌-어머니)간 관계는 매우 친밀합니다. 그러나 아버지 아들 간 관계는 매우 엄격하며, 외삼촌과 조카 사이는 매우 친밀합니다. 요약하면 (-), (+)인 겁니다. 이를 그림으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
  △ ⩵ ○ ― △
(+) (-)
 
     

트로브리얀드족

 

  (-) (+)
  △ ⩵ ○ ― △
(-) (+)
 
     

체르케스족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부부간 관계가 친밀하면 아버지와 아들 간 관계도 친밀하며, 반대로 남매관계나 외삼촌-조카 간 관계는 엄격합니다. 그 반대로 부부간 관계가 엄격하면 아버지와 아들 관계도 엄격하고, 남매관계나 외삼촌 조카 관계는 친밀합니다. 요컨대 부부관계와 부자관계는 서로 같고, 남매관계와 외삼촌-조카 관계도 서로 같습니다. 그리고 전자와 후자는 서로 반대입니다. 따라서 어느 한 가지 관계가 나오면 다른 나머지 관계들은 자동적으로 연역됩니다. 이는 (+)(-)라는 두 개의 대립되는 기호로 친족간의 보편적 관계를 표시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대립자질로 음운론 전반을 설명하려는 구조언어학의 방법론이 여기서도 활용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레비-스트로스는 인간의 보편적이고 선험적인무의식을 기초로 친족관계의 보편적 구조를 찾아내며, 이로써 사회구조 전반을 관통하는 보편적인 사회질서를 찾아냈다고 생각합니다.

 

 

 

 

사고구조의 보편적 질서

 

 

다음으로 그는 자연과 사회, 자연과 문화, 인간을 관통하는 선험적 무의식을 통해 보편적인 사고질서를 파악하려고 합니다. 즉 그가 말하는 근친상간 금지는 보편적인 사고의 무의식적 기초요, 보편적인 사고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문화와 자연, 그리고 정신의 동형성(同形性)을 기초짓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가 주목하는 것은 원주민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사유방식입니다. 흔히 마술적, 주술적이라 불리는 이 사고방식은 자연을 기초로 전개되는데, 레비-스트로스는 이것을 야성적 사고’(la pensée sauvage, savage mind)라고 합니다. 이는 오랜 세월에 걸쳐 반복ㆍ지속적으로 자연을 관찰한 결과라고 합니다.

 

이러한 야성적 사고는 세계에 대한 지식을 획득하는 방법에서, 그리고 세계의 현상들을 바라보는 관심의 차이에서 과학과 구별될 뿐, 혼돈을 넘어서 나름의 질서를 파악하는 방법이란 점에서는 과학과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이래서 레비-스트로스는 야성적 사고를 구체적인 것의 과학이라고 부릅니다.

 

야성적 사고는 원시인 혹은 미개인의 사고방식이 아니라 오늘날의 우리도 공유하고 있는 근원적이고 무의식적인 사고방식, 일차적인 사고방식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야성적이란 말을 사용하는 것인데, 이는 모든 사람이 공유하고 있는, 사고의 보편적 기초인 셈입니다. 그는 이런 관점에서 토테미즘이나 카스트제도, 혹은 신화 등을 분석함으로써 토테미즘에도 나름의 논리와 체계가 있고, 보편화와 특수화라는 사고 메커니즘이 작동함으로써 사물을 분석 종합하는 사고구조가 형성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이러한 자연적 사고방식에 주술이나 마술이란 이름을 붙여 과학과 대립시키고, 비과학적이기에 불합리하다고 비난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이라고 비판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근대의 과학혁명이 본격화된 15~16세기 이전의 자신들의 역사도 이해할 수 없는 난관에 부딪친다는 것입니다. 서구인들이 내세우는 과학적 사고방식 역시 이런 야성적 사고에서 만들어진 게 아니면 어디 하늘에서 떨어진 거겠냐는 거지요. 이런 점에서 야성적 사고는 자연과 인간, 물질과 정신을 이어주는 매듭이며, 자연에 기초한 무의식적 사유라고 합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에 공통된 선험적 사고구조요, 보편적 사고질서를 뜻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런 점에서 그가 말하는 야성적 사고란 일종의 구조적 무의식 혹은 사회적 무의식인 셈입니다.

 

 

수피(樹皮) 책에 기록하고 있는 인디언들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가 그린 벽화다.

영화 미션을 보았는가? 저 원주민들이 자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인가 아닌가를 묻는 질문에, 이들이 신을 알며 예술을 안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사실 그건 교단에서 바라는 답이 아니었다. 결국 로버트 드 니로는 결사항전으로, 제레미 아이언스는 미제레를 노래하며 동정을 구하는 축음의 행렬을 인도한다.

비슷한 장면을 슬픈 열대에서 읽을 수 있다. 1517년 성 제롬 수도승단은 식민주의자들에게 원주민들이 그들 자신의 사회를 유지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식민주의자의 대답은 모두 부정적이었다. “원주민들의 손자 대에 가서나 자립생활이 가능할까, 현재의 원주민들은 악덕에 깊이 물들어 있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그 증거로 그들은 에스파냐 사람들을 회피하려고 하며, 보수 없이 일하기를 거부하지만 때로는 그들 자신의 소유물들을 남에게 모두 주어버리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 가운데 어떤 자들의 귀를 잘라 버렸을 때도 그들은 그 친구들을 버리는 법이 없다.” 따라서 원주민들은 자유로운 동물로 남아 있기보다는 인간의 노예가 되는 편이 더 낫다는 것이 식민주의자들의 한결같은 평가였다. 그래서 레비-스트로스는 두 집단을 비교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백인들은 원주민들이 동물이기를 바랐지만, 원주민들은 백인들이 신은 아닐 것이라고 의심하는 데 만족했다.” 그리고 역사는 헤겔 말처럼 악인들이 더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저 빌어먹을 역사에 저주를!

 

 

성공과 실패

 

 

요약합시다. 레비-스트로스는 앞서 본 것처럼 인간의 해체’ ‘주체의 해체가 중요한 문제라고 주장합니다. 데카르트나 칸트처럼 주체나 인간을 출발점으로 삼거나 그것을 철학적으로 규정하려는 근대적 노력에 대해 명시적으로 반기를 드는 것입니다. 이로써 그는 이후 반인간주의반주체철학이 자리잡을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해 준 셈입니다. 사르트르와의 논쟁을 통해 역사주의와 반대되는 과학으로서 구조주의를 정립한 것 역시 이후 반역사주의적 경향의 모태가 됩니다.

 

한편 레비-스트로스는 중요한 것은 인간을 구성해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해체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하면서 근대적인 인간개념을 해체하려고 합니다. 동시에 새로운 방식으로 인간에게 공통된 보편적인 요소를 찾아내려고 합니다. 알다시피 그는 경험적인 연구를 통해 자연과 문화, 자연적 질서와 사회적 질서에 공통된 무의식적 기초를 찾아내고자 했습니다. 즉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 위에 서야 할 공통된 보편적 사고구조를 발견하려고 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자신의 기획이 칸트의 그것과 본질적으로 유사하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 바 있지요. 근친상간 금지에 대한 지적에서 출발하는 그 이론은 의식과 사고의 무의식적 기초, 선험적 기초를 찾으려고 한 것입니다. 그것을 레비-스트로스는 야성적 사고라고 했던 거지요.

 

따라서 그의 입론은 주체를 그러한 심층구조의 효과로 본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으로 보았다는 점에서 명시적으로 탈근대적 입장을 취하고 있지만, 동시에 모든 인간에 공통된 어떤 보편적이고 선험적 구조를 발견함으로써 그것을 구성하려 한다는 점에서 철저하게 칸트적이며 근대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이는 야콥슨에게도 마찬가기로 나타나지요). 이런 점에서 볼 때 선험적 주체 없는 칸트주의보다는 야성적 주제의 칸트주의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결국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는 탈근대적인 문제의식을 가지고 출발해서 근대적인 기획으로 되돌아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가 제창한 구조주의는 두 개의 상반되는 얼굴, 상충되는 요소를 갖고 있는 문제설정으로 간주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사실상 그의 출발이 어떠했든간에 그의 이론적 기획이나 문제설정 전반에 걸쳐 지배적인 것은, 스스로도 인정했다시피 칸트주의적인 측면입니다. 따라서 레비-스트로스의 이론적 직업이 근대철학의 경계선을 정신분석학과 사회인류학을 통해 넘어보려 한 것이었다면, 그 결과는 오히려 칸트적인 방식으로 근대적 사고로 복귀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그의 인류학적 성공은 철학적 실패와 동전의 양면인 셈입니다.

 

 

아르마딜로를 탄 아메리카 여인

이 그림은 네덜란드 화가인 코르넬리우스 비쉐르(Cornelius Visscher)가 그린 것이라는데, 1639년 얀스준 비쉐르(J. Visscher)가 만든 세계지도에 아메리카를 상징하는 여인으로 다시 기입되었다. 아르마딜로라는 기이한 동물 등에 양손에 무기를 든 채 거의 나체로 앉은 여인, 이것이 16세기 중반, 아니 17세기 중반에도 유럽인들이 갖고 있던 아메리카인의 이미지였던 셈이다. 사실 이로 인해 이들이 과연 인간인지를 두고 15세기에 유럽 전체가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그것의 핵심은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동물처럼 노예로 사용해도 좋은가를 둘러싼 것이었다. 격하고 오랜 논쟁 끝에 인간의 범주에 속한다는 결론으로 끝나기는 했지만, 그 결론이 금광을 찾아나선 인간들의 탐욕에서 이들을 지켜주진 못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공동체에서 분리되어 금광으로, 은광으로 끌려가거나, 아니면 아예 북미 인디언들처럼 노동 대신 죽음을 선택했다. 그런데 이들이 인간인가를 두고 논란을 벌일 때에도, 흑인들에 대해서는 한 번의 토론도 없었다. 르네상스, 휴머니즘의 시대를 산 어떤 휴머니스트도 그들이 인간이란 생각은 전혀 해보지 않았던 까닭이다. 하긴 인간임을 선언하고 해방을 한들 무슨 소용인가? 여전히 노예적 억압과 핍박에서 자유롭지 못한 곳이 위대한 자본주의의 제국, 그곳이 아니던가! 인간중심주의(휴머니즘), 그 말에는 항상 하나의 형용사가 숨어 있다. ‘’(White)이라는 말이, 그러나 문제는 더 깊은 곳에 있는 게 아닐까? 인간이 아니라면 무엇이든 인간에게 봉사해야 마땅하고, 인간의 부림을 받아 마땅하며, 인간을 위해 죽임을 당해도 마땅한 것일까? 정말 지구는 인간을 위해 만들어졌으며, 동물이나 식물들은 인간이 먹으라고 존재하는 것인가? 슬픈 열대.

 

 

레비-스트로스의 귀향

 

 

다른 한편, 과학에 대한 그의 태도 역시 이원적입니다. 원주민들에 대한 애정이 진하게 배어 있는 그의 작업은 야성적 사고를 통해 주술과 과학의 대립을 깨려는 노력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서구적 관점에서 토템이나 주술을 과학의 이름을 빌려 매도하려는 시도를 정열적으로 반박합니다. 그의 입장은 서구적인 과학적 사고보다는 차라리 야성적 사고에 기울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은 야성적 사고를 보편적 사고로 위치 지으려는 그의 태도에서도 드러납니다. 이와 관련해 데리다는 그의 입장에서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일종의 루소주의적 향수를 읽어내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레비-스트로스에게서 반서구적이고 반과학적인 경향을 읽어내는 것은 그리 지나친 평가는 아닐 겁니다.

 

 

아메리고 베스푸치, 신대륙에 도착하다

그림들은 아메리고 베스푸치(A. Vespucci)의 책 이 책이 말하노니에 실려 있는 삽화

인간의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을 하나 꼽으라면? 나는 이른바 신대륙의 발견이라고 감히 확언한다. 금과 돈에 대한 탐욕, 식민지에 대한 욕심으로, 이미 사람들이 멀쩡히 살고 있던 곳에 도달해선 마치 무슨 고상한 것을 찾아낸 과학자처럼 신대륙을 발견했다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턱 없는 오만과 아집, 몰상식을 증명하는가 하는 것 때문만은 아니다. 얼마 안 되는 수의 백인들에게 호의의 친절을 베푼 인디언 들은 북미에서도, 남미에서도 모두 배신과 협잡, 사기와 강탈, 살인과거형에 의해 거의 멸종 당했기 때문이다. 동물기의 작가 시튼이 보여주듯이 평화로운 삶과 하나가 된 위대한 사상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 혹은 마야나 아즈텍 등의 거대한 문명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 유럽인이 가져온 탐욕과 아짐, 무기와 병균, 그리고 다른 신을 참지 못하는 질투심 많은 그들 신의 끔찍한 거주에 의해 때론 노예적 삶으로, 때론 전쟁으로, 때론 사기와 강탈로 몰살당했던 것이다. 90퍼센트에 가까운 원주민들이 죽었고(이 숫자의 의미를 아는가!), 살아남은 자들은 한 구석의 보호구역에 갇혀 코끼리나 코뿔소처럼 간신히 생물학적 명맥을 보존하고 있다. 그 끔찍한 비극을 발견이라고 하는 순간, 모든 진실은 사라지고 유럽 문명을 추동한 과학적 열정, 진리에 대한 열정이 지구를 하나로 연결한 위대한 사건이 된다! 아마도 인류사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추악한 거짓말이 이 신대륙의 발견혹은 지리상의 발견이라는 말일 것이다. 나는 이 말을 이렇게 바꾸고 싶다. “신대륙의 강탈” “신대륙의 물살” “신세계의 처형”.

 

 

반면 사르트르의 역사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그가 명시적으로 겨냥하고 있는 지점 중 하나는 바로 그것이 과학일 수 없으며, 해석하는 입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주관적인 것이란 점입니다. 다시 말해 역사주의 비판은 과학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 모두에게 공통된 보편적 기초를 찾겠다는 시도 자체도,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이 어떤 것을 진리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무의식적 기초를 찾겠다는 시도 자체도 어떤 초월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과학주의적 태도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레비-스트로스가 다른 입론을 비판하며 자신의 입론을 정당화하는 방식은 정확하게도 근대적인 과학주의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문제설정은 반과학(=반서구)적인 태도를 과학주의적인 방식으로 기초짓고 정당화하려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런 뜻에서 반과학적 과학주의라는 말로 요약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작업 전체에 방향을 부여하고, 그것을 움직이는 지배적 요소가 분명 과학주의적 동기임은 부정하기 힘들 것입니다. 따라서 인식론적 차원에서도 레비-스트로스의 문제설정은 근대적인 것 안에 머물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간단히 덧붙이자면, 그가 보여주는 반서구적이고 반문명적인 태도는, 과학적 이성을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그렇지 못한 것을 미개요 야만이며, 따라서 계몽되어야 할 것이라고 간주하던 계몽주의적 사고에 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는 이 이분법 자체를 넘어서 공통된 하나의 기초를 찾아내려고 하는 셈이지요. 그러나 그 공통된 기초의 자리에 야성적 사고를 갖다놓음으로써 야성의 입장, ‘반문명의 입장을 우위에 두게 되고, 결국은 예전의 계몽주의적 도식을 거꾸로 뒤집은 입장을 취하는 것 같습니다. 흔히 루소주의적 경향이라고 비판하는 점이 바로 여기일 텐데, 요컨대 계몽주의적 이분법 자체를 깨고 넘어서지는 못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보로로족(Bororo)의 마을 배치도

레비-스트로스에 의하면 가운데 있는 것은 남자들의 집이고 원을 그리며 배열되어 있는 것은 여성들이 소유한 기혼자들의 집이다. 보로로족은 다양한 반족(半族)들로 나뉘어지는데, 가령 수평으로 보이는 선을 따라 위쪽은 투가레족, 아래쪽은 세라족이고, 417번 집을 잇는 선을 따라 왼쪽은 강의 상류에 사는 족, 오른쪽은 하류에 사는 족 등이다. 투가레족의 남자는 세라족의 여자와 결혼하며, 낳은 아이는 어머니를 따라 세라족이 된다. 투가레족이 죽으면 세라족이 장례식을 해주는데, 부락민의 반이 죽은 자의 역할을 하고 나머지 반이 산 자의 역할을 한다. 두 명의 상반되는 성격의 주술사도 각각의 반족에 속해 있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어느 한쪽이 상대편의 도움에 의해 즐기고, 다른 한쪽은 상대편에게 도움이 되도록 해야만 하는그런 관계를 만들었고, 여기서 주거지의 배치는 결혼이나 사회생활은 물론 우주론과 종교에 이르기까지 모두 하나로 엮이는 지반이 되고 있었다. 이 지역에 들어온 살레지오회 선교사들은 이를 깨달았고, 그래서 그들의 주거지 배치를 바꾸어 버리려고 했다. 왜냐하면 보로로족을 개종시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들의 부락을 포기하도록 만들어, 오두막들이 평행 열을 이루는 다른 주거지로 옮기는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경우 그들은 모든 면에서 방향감각을 상실해 버리고 말 것이다. 그것은 사실 그들 삶의 모든 것을 파괴하고 빼앗는 것이다. 선교사들은 식민주의자들의 배를 타고 다니며 그들의 만행을 신의 이름으로 축복했을 뿐만 아니라, 많은 경우 이처럼 선교와 개종을 위해 원주민들의 삶 자체를 직접 파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마야의 거의 모든 책과 문서를 이단이란 이유로 태워버린 것도 프란체스코회 선교사였다). 그런데 이렇게 공동의 삶 전체를 파괴하고 나서야만 만날 수 있는 새로운 신, 새로운 종교란 정말 그들의 삶을 위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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