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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굴뚝청소부, 제6부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 근대 너머의 철학을 위하여 - 6. 들뢰즈와 가타리 : 차이의 철학에서 노마디즘으로, 차이의 철학 본문

책/철학(哲學)

철학과 굴뚝청소부, 제6부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 근대 너머의 철학을 위하여 - 6. 들뢰즈와 가타리 : 차이의 철학에서 노마디즘으로, 차이의 철학

건방진방랑자 2022. 3. 27. 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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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의 철학

 

 

들뢰즈의 철학을 특징짓는 많은 명칭들이 있습니다. ‘차이의 철학’, ‘사건의 철학’, ‘탈주의 철학’, ‘유목의 철학’, ‘생성의 철학’, 혹은 욕망의 정치학’, ‘분열분석학등등. 이 가운데서도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차이의 철학이란 명칭입니다. 사실 차이’(différence)라는 단어를 철학적인 개념으로 벼리어내고 그것을 시유의 중심적인 고리로 만든 사람이 들뢰즈였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물론 데리다 역시 차이라는 개념에 주목하지만, 이를 지연시키다와 결합하여 차연’(différance)이라는 개념으로 만들었지요. 불어에서 두 단어는 같은 발음을 갖지만, 우리는 사실 충분히 변별되는 개념으로 그 말을 이해하지요. 그래서 차연이란 말이 데리다의 개념이라면, ‘차이라는 개념은 들뢰즈의 개념이라고 말해도 좋을 겁니다. , 그리고 지금 말하긴 어렵지만 개념의 내용도 상당히 다르다는 점 정도는 언급해야겠군요.

 

아무튼 들뢰즈 이후 차이의 철학은 전반적인 수금의 단계를 넘어서 일종의 유행이 되어버린 감이 있습니다. 그래서 들뢰즈와는 생각이 많이 다른 사람들도 차이의 철학내지 차이의 정치학을 내세워 말하고 글을 써내고 있지요. 반면 차이의 철학이나 차이라는 말만 들으면 못마땅한 얼굴로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대개는 헤겔철학을 전공하거나 좋아하는 분들이지요. 이유는, 차이의 철학은 동일성의 철학내지 동일자의 철학을 비판의 대상으로 설정하고 있는데, 그런 철학 가운데서도 가장 교묘한 상대로 지목하여 비판하는 게 바로 헤겔의 철학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들뢰즈는 헤겔만이 아니라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이래 많은 철학자들을 그런 맥락에서 비판하고 있는데, 유독 헤겔 전공자들이 심하게 반발하고 못마땅해 하는 건 약간 기이한 현상이긴 합니다.

 

차이의 철학에 대한 반박은 대개 비슷비슷합니다. “헤겔철학이 차이에 대해 사유하지 않았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얘기다”, “헤겔철학에서도 차이가 고려되고 있다혹은 동일성 없는 차이 개념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 역으로 차이 없는 동일성 개념도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차이를 고려하지 않는 동일성의 철학이 대체 어디 있으며, 동일성을 포함하지 않는 차이의 철학이 대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동일성과 차이의 대립만을 본다는 점에서 차이의 철학은 잘못된 것이다등등.

 

물론입니다. 동일성은 차이를 전제하며, 차이 또한 마찬가집니다. 들뢰즈 역시 동일성의 철학이 차이 개념을 다루지 않는다거나 차이 개념을 제거한다고 할 정도로 단순한 사람은 아닙니다. 반대로 그의 철학이 차이만 말하려고 한다는 것도 사실이 아닙니다. 쉽게 말하자면, 문제는 차라리 동일성과 차이의 관계라고 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동일성에 귀속되거나 종속되는 위치, 혹은 동일성에 비해 이차적인 지위를 차이 개념에 할당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런 경우로 대표적인 것은 분류학에서 사용하는 종차개념일 겁니다(아리스토텔레스), 가령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라고 정의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여기서 동물이라는 유()개념 안에서 인간을 구별짓는 종적인 차이를 생각하는이라는 규정이 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동물이라는 유개념 안에서, 유적 동일성 안에서 인간이란 개념을 포섭하는 정의지요. 분류표의 선들이 보여주듯이 종은 속에, 속은 과에, 과는 목에, 목은 강에, 강은 문에, 문은 계에 포섭되는 선들을 그릴 뿐입니다. 이 경우 차이란 유적인 동일성을 보충하고 보완하는 개념일 뿐이지요.

 

다른 하나는 대립을 통해 차이를 포착하는 것입니다(헤겔). 그리너웨이의 영화 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그리고 그녀의 정부에 보면 식당에서 접시를 닦으면서 언제나 바로크 칸타타 풍의 노래를 보이소프라노로 부르는 소년이 나옵니다. 처음엔 여자 목소리처럼 들려서 노래하는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 모호하게 보이지요. 이 소년의 목소리는 여자 목소리일까요, 남자 목소리일까요? 소프라노니까 여성의 목소리지요. 음색도 여성적이고, 그러나 노래하는 사람은 분명 남자니, 남자 목소리라고 해야 하지 않나요?

 

우리는 이처럼 남성의 소리, 여성의 소리로 노랫소리를 양분해서 포착합니다. “아무리 그가 남자래도 저건 여자 목소리야!” 혹은 제니스 조플린의 노래를 들으면서 저건 동물의 소리야!”라고 말하게 되지요. 사람의 소리인가 동물의 소리인가 하는 이항적 대립개념 속에서 목소리를 포착하는 겁니다. 통상적인 남자의 목소리, 통상적인 인간의 목소리에서 벗어나는 특이한 소리를 우리는 어느새 두 가지 대립 개념 안에 가두어 포착하고 있는 거지요. 그 두 가지 대립항 속에서 목소리에 고유한 차이는 사라지고 여자 같은 남자, 동물 같은 인간이라는 대립에 동일화되고 맙니다. 이런 점에서 대립은 차이를 본질적 차이라는 이름 아래 두개 항의 동일성 안에 가두고 맙니다. 차이가 차이로서 포착되는 게 아니라, 대립적인 개념 안에 포섭되고 포획되는 거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차이의 반복 : 상이한 쿠사나기들

세 사람 모두 공각기동대의 주인공 쿠사나기 소령의 모습이다. 첫번째는 극장판 공각기동대의 쿠사나기인데, 무장을 하고 있는 장면인데도 우수의 파토스가 눈매에 서려 있다. 두번째는 TV판의 쿠사나기인데, 눈매와 입이 단호하고 강한 이미지고, 우수의 색채는 거의 없다. 세번째는 원작인 시로 마사무네의 만화에 등장하는 쿠사나기다. 모습은 비슷하지만, 우수보다는 장난기가 어린 형상이다. 이러한 차이는 내러티브의 색조상의 차이와 결부되어 있다. 극장판에서는 ‘9라고 불리는 기동대와 쿠사나기 사이에 일정한 거리가 있고, 쿠사나기는 자신의 삶과 정체성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인물이다. 반면 TV판에서는 기동대와 쿠사나기 간의 거리감은 사라지고 없으며, 쿠사나기는 대부분 천재적인 능력과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로서 등장한다. 만화에서 쿠사나기는 유능하지만 약간 속을 썩이기도 하는, 코믹한 성격의 인물이다. 동일한 내용의 작품에 쿠사나기는 반복하여 등장하지만, 이처럼 그 내용이나 조건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반복하여 등장한다. 차이의 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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