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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철학과 굴뚝청소부, 제6부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 근대 너머의 철학을 위하여 - 6. 들뢰즈와 가타리 : 차이의 철학에서 노마디즘으로, 특이성 본문

책/철학(哲學)

철학과 굴뚝청소부, 제6부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 근대 너머의 철학을 위하여 - 6. 들뢰즈와 가타리 : 차이의 철학에서 노마디즘으로, 특이성

건방진방랑자 2022. 3. 27. 0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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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성

 

 

어떻게 하면 이처럼 차이를 동일성에 포섭하거나 대립에 가두지 않고, 차이를 차이로서 포착할 수 있을까? 오히려 동일성조차 차이를 통해서 해명할 수 있을까? 이것이 차이의 철학이 묻는 것입니다.

 

먼거, 들뢰즈에 따를 때 차이의 철학이란 관점에서 차이를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예를 들어 늦가을, 단풍이 한창 익어갈 때 단풍잎들을 본다고 합시다. 여러분은 혹시 거기서 빨강색을 보시나요? 나뭇잎만큼이나 다른(different) 수많은 빨강색들을 본 적은 없나요? 어쩔 수 없이 빨강색이란 말을 사용하긴 했지만, 거기에는 정말 수많은 색들이 있지요. 차이를 본다는 것은 그 많은 색들을 섬세하게 포착하는 것이고, 하나하나의 나뭇잎이 갖고 있는, 혹은 한 잎의 각 부분이 갖는 차이를 보는 것입니다. 그 무상한 변화를 보는 것이지요. 모네는 이처럼 볼 때마다 무상하게 달라지는수련들의 차이를 매번 다르게 포착하고 그려냈지요.

 

물론 그저 다들 다르구나하는 말을 기대하는 건 아닙니다. 좀더 적극적으로 말하자면, 차이를 보는 것은 어떤 것이 갖는 남다른 특이성을, 다른 통상적인 것과 구별해 주는 특이성을 포착하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보는 저 단풍잎들의 남다른 특이성, 강렬한 인상을 주는 저 이파리들의 색채가 갖는 특이성 말입니다. 접시를 닦으며 노래하는 저 소년의 목소리가 갖는 특이성 말입니다. 노래마다, 구절마다 수많은 표정을 갖고 달라지는 한영애의 목소리를 유심히 들어본 적이 있나요? 금속성의 강한 목소리에서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감싸는 목소리, 장난치듯 웃음이 배어나오는 목소리, 능청스레 늘어지는 목소리 등등으로 천변만화하는 그 소리의 차이들을 느껴본 적이 있다면, 어떻게 그 목소리의 특이성에 매료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의 목소리를 그저 블루스 가수의 목소리라는 통상적인 관념으로 포착한다면 그것은 끊임없이 달라지는(스스로 차이화하는) 차이를 보지 못하고 놓치는 것입니다.

 

이는 단지 목소리만은 아닙니다. 맑스의 사유가 갖는 특이성, 수많은 얼굴을 갖는 그의 사유의 강밀한 특이성, 그렇기에 조건이 달라지면 또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그 특이성을 감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아니면 정통성의 틀 안에 갇힌 통념화된 맑스의 명제들만을 보게 될 겁니다.

 

 

사이보그, 혹은 기계와 인간

첫 번째 사진은 쿠사나기의 신체가 만들어지는 과정의 한 컷이다. 알다시피 쿠사나기는 고스트에 붙은 이름이고, 그의 껍데기(shell) 같은 신체는 이렇게 의체로 만들어진다. 기계와 근육이 섞인 이미지(물론 근육 역시 인조근육이겠지만). 하지만 좀더 중요한 것은 그의 고스트가 담긴 뇌, 혹은 전뇌(電腦)와 그의 의체가 결합된다는 점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신체가 인간적인 데코레이션을 거쳐 두 번째 사진과 같은 깔끔하고 고운 신체로 재탄생한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다. 신체의 일부를 기계화(의체화) 한 경우도 사이보그에 속한다. 세 번째 사진은 공각기동대의 속편인 이노센스에 등장하는 해러웨이 박사다. 기계와 인간의 경계에 대해 의문시하는 태도를 공유한다는 점에서 그는 아마도 사이보그 선언이라는 글로 유명한 도나 해러웨이를 패러디한 것일 게다. 그런데 여기서 해러웨이 또한 사이보그다. 일을 하기 위해 두 눈을 모자 챙처럼 걷어올리고 거기에 작업을 위한 검시경을 연결한다. 한편 토구사는 공각기동대 인물 중 의체회를 하지 않은 인물이다. 그러나 네 번째 사진에서처럼 컴퓨터 네트워크와 접속하기 위한 장치를 눈에 연결하여 네트의 바다를 서핑할 때, 그 역시 사이보그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의제화는 꿈도 꾼 적 없지만 컴퓨터와 인터넷과 접속해 네트의 바다를 서핑하는 우리 역시 사이보그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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