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것으로의 변이
다른 한편 들뢰즈의 차이의 철학은 차이를 긍정하는 태도를 제안하고 촉발하고자 합니다. 이는 차이를 제거해야 할 부정의 대상으로 보는 동일자의 사유, 나아가 차이를 인정하고 보존해야 할 것, 혹은 수용하고 용인해야 할 것으로 보는 그런 태도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먼저 차이를 부정하는 동일자의 사유, 동일성의 철학은 자신이 가진, 대개는 문명이나 진리라는 좋은 이름으로 불리는 척도에 맞추어 자신과 다른 것을 열등한 것으로 간주하고, 자신의 척도에 맞추어 동일화하려고 합니다. 동물의 탈을 쓰고 동물의 소리를 내며 춤을 추는 흑인들의 행동을 ‘미개한 것’ 혹은 ‘야만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문명’이라고 불리는 자신의 모습대로 동일화하려는 서구인들의 오랜 시도들이 바로 그런 태도를 가장 극단적으로 잘 보여줍니다. 학생들의 다양한 능력들, 상이한 자질들을 고려하지 않고 오직 ‘성적’이라는 하나의 척도에 비추어 동일화하려는 교육체제에서도 ‘동일자의 사유’ 내지 ‘동일성의 철학’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차이란 고무되고 긍정되어야 할 게 아니라 제거되어야 할 것이 되고 있지요.
이보다는 좀 낫지만, 그렇기에 들뢰즈가 생각하는 차이의 철학과 종종 혼동되는 ‘유사품’이 있습니다. 그것은 차이를 부정할 게 아니라 인정하고 용인하자고 하며, 차이에 대한 관용(톨레랑스)을 주장하기도 하며, 나아가 차이를 보존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요즘 특히 부각된 것이지만, 이슬람 문화에 대한 서구의 기독교적 비난에 대해 비판하면서, 그들과의 차이를 차이로 인정하고 그들과 공존하기 위해 관용의 윤리를 주장하기도 하며, 나아가 문화적 다양성을 증대시키기 위해서 그들의 문화를 일부러라도 보존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정과 용인, 심지어 관용에서조차도 사실 차이는 반갑고 고무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참고 견뎌야 할 어떤 것이란 점에서 여전히 부정적인 것에 멈추어 있습니다. 조금 더 냉정하게 말하면, “그래, 네가 갖는 차이를 인정하겠다”라는 용인/관용의 논리에는 “그러니 너도 내가 갖는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는 말이 암묵적으로 포함되어 있지요. 결국 “너는 너, 나는 나”라는 오래된 자유주의적 태도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다른 사람의 차이를 인정하는 방식으로 그와 다른 자신의 차이를, 사실은 자신의 동일성을 인정하고 용인하라는 동일성의 논리가 작동하고 있는 겁니다. 이와 달리 차이의 철학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 안에 차이를 만드는 것, 자신을 스스로 차이화하는 것입니다.
‘보존’의 관념을 사용하는 ‘차이의 철학’ 역시 약간 다른 방식으로 동일성의 메커니즘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가령 그들 말대로 서구와 다른 이슬람 문화를 유지하고 보존하기 위해선 이슬람 여성들은 계속해서 차도르를 쓰고 대학이나 공직에 진출하지 못한 채 갇혀 살아야 합니다. 전통에서 벗어난 삶을 꿈꾸는 사람 역시 보존되어야 할 전통에 갇혀 동일화된 채 살아야 합니다. 서구와 이슬람의 차이를 보존하는 것이 이슬람 문화 안에 사는 사람에겐 강력한 동일성을 보존하고 강요하는 것으로 귀착 되는 거지요.
들뢰즈에게 차이를 긍정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 다른 문화의 차이를 인정하거나 그것을 보존하는 게 아니라, 일차적으로 나 자신에 대해 ‘차이를 만드는 것’(make difference)이고, 나 자신이 다른 것으로 변이하는 것이며, 이런 이유에서 나와 다른 것이 만나서 나 자신이 다른 무언가가 되는 겁니다. 나와 다른 것을 통해 내 자신이 다른 무언가가 되려는 사람이라면, 나와 다른 것을 반갑게 긍정할 수 있을 겁니다. 나와 다른 것은 내가 변이하여 또 다른 것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뜻하니 말입니다. 이것이 차이에 대한 진정한 긍정일 겁니다. 반대로 나와 동일한 것 또는 유사한 것에서는 별 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건 나에게도 있는 거야!”
이런 점에서 들뢰즈가 말하는 차이는,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할 무엇이 아니라 새로이 만들어내야 할 무엇이며, 있는 그대로 보존해야 할 무엇이 아니라 현재와 다른 모습으로 변이함으로써 생성되는 무엇입니다.
그것은 A에겐 있지만 B에겐 없는 어떤 성질(property, 소유물!)이 아니라 A와 B가 만나서 새로이 만들어지는 어떤 것이지요. 이런 점에서 그것은 A-B라는 감산의 형식으로 표시되는 게 아니라(인정, 보존의 논리는 바로 이런 감산의 형식으로 차이를 이해하고 있습니다), 만남과 접속을 표시하는 +로, A+B라는 합산의 형식으로 표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굳이 있고 없는 것을 비교하는 통념에 따라 표시한다면, A가 B와 만나 변이된 A′이 새로이 갖게 된 차이란 점에서 A′-A로 표시하는 게 더 적절합니다. 이는 자기 자신 안에 만들어낸 차이란 점에서 ‘내재적 차이’라고 말해도 좋을 겁니다.
▲ 사이보그와 안드로이드
위의 사진은 모두 이노센스의 장면들이다. 고스트 더빙(사람의 고스트를 더빙하여 안드로이드에 주입하는 것으로, 원본인 사람이 죽기 때문에 금지되어 있다고 한다)을 해서 안드로이드를 만드는 ‘적’의 기지(선박)로 들어가는 바토와 ‘쿠사나기’(의 일부)를 저지하기 위해 ‘제어시스템’은 안드로이드들을 급파한다(첫 번째 사진), 안드로이드는 고스트가 없다는 점에서 사이보그가 아닌 단순한 ‘기계’들이다. 이전의 「공각기동대」가 인간과 기계의 경계에 사건화의 지점을 설정했다면, 「이노센스」는 안드로이드와 사이보그 사이에서 그렇게 한다. ‘좋은’ 안드로이드를 만들기 위해 ‘고스트 더빙’을 하는 ‘악당’들과 그것을 찾아내 처치하는 공안과의 대결, 그래서인지 싸움은 두 번째 사진에서처럼 사이보그와 안드로이드 사이에서 주로 벌어진다. 쿠사나기의 고스트가 들어간 ‘인형’과 바토는 자신을 둘러싸고 다가오는 안드로이드를 향해 총을 쏜다. 그런 대립의 와중에 ‘파괴’된 안드로이드의 형상이 처절하다(세 번째 사진), 고스트의 흔적이 없는 순수한 안드로이드는, 혹은 통상적인 기계는 마구 대하고 마구 부수어도 좋은 것일까??
이 영화는 사고를 치고 ‘자살’하려던 ‘안드로이드’(고스트 더빙된 것이란 점에서 경계가 모호한)를 바토가 ‘파괴’하는 데서 ‘시작’하여, 안드로이드의 방어를 뚫고서 고스트 더빙으로 경계를 흐리는 범죄의 진원지를 찾아내는 것으로 끝난다. 인간과 기계 사이의 경계로부터 사이보그와 안드로이드의 경계로 문제를 이전시킨 것일까? 그러나 「공각기동대」에서는 ‘악’의 편에서 출현한 인형사가 인간과 기계 사이의 경계를 의문시했다면, 이번에는 검시관인 해러웨이 박사나 ‘악당’ Kim의 입을 통해서 인간이 기계나 인형보다 낫다는 생각을 의문시한다. 가령 해러웨이 박사는 버림받은 안드로이드의 ‘감정‘에 대해 말한다(네 번째 사진), 안드로이드의 살해나 자살은 이런 감정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이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