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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도마복음한글역주, 제39장 -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쥐고 있는 지식의 열쇠 본문

고전/성경

도마복음한글역주, 제39장 -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쥐고 있는 지식의 열쇠

건방진방랑자 2023. 3. 22.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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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쥐고 있는 지식의 열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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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예수께서 가라사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지식의 열쇠들을 움켜쥐고 그것들을 숨겨버렸다. 2그들은 그들 자신이(지식의 세계로 들어가지도 않았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들이 들어가도록 허락하지도 않았다. 3그러므로 너희는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

1Jesus said, “The Pharisees and the scribes have taken the keys of knowledge(gnosis) and hidden them. 2They themselves have not entered, nor have they allowed to enter those who wish to. 3As for you, be as wise as serpents and as innocent as doves.”

 

 

본장의 1·2절은 큐복음서와 겹친다(Q44). 마태는 3절을 분리시켜 다른 맥락에서 활용하였다(10:16). 본 장이 공관복음서에 선행하는 원자료라는 것은 명백하다.

 

 

(23: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고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는도다.

 

(11:52)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았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들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누가자료가 도마자료에 더 충실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식의 열쇠라는 표현이 공통될 뿐만 아니라 종말론적 함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누가의 지식의 열쇠(tēn kleida tēs gnōsēos)’지식이라는 열쇠(the key that is knowledge)’로 해석될 가능성도 있다. 누가만 해도 지식의 열쇠를 천국과 관련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마태는 그것을 천국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는다라고 말하여 천국문의 열쇠라는 뜻으로 변형시켰다. 이러한 표현은 16:19에도 나타나고 있다. 시리아에서 성립한 클레멘트 위서(PseudoClementine Recognitions)(2. 30. 1)에도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또한 예수께서 그의 가르침의 마지막 시기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그들의 부적절한 행동과 부정확한 가르침을 야단치시면서 공격하시었다. 그리고 그들이 모세로부터 물려받은, 그것에 의하여 천국의 문이 열릴 수도 있는, 지식의 열쇠를 감추고 있는 것을 호되게 야단치시었다.

 

4복음서에는 유대인 지도자들, 서기관, 바리새인, 율법사, 제사장, 헤롯당원, 사두개인에 대한 비판이 가득 실려있다. 예수의 패션 드라마를 만드는 데 중요한 요소로서 등장시켰다. 예수의 적대세력으로서 이들을 활용한 것이다. 그러나 재미있게도 도마복음서에는 이들에 대한 적대적 언급이 거의 없다. 본 장과 102이 유일한 것인데, 이 두 장에서조차 예수의 적으로서 그려져 있지는 않다. 예수의 비판은 주로 자내적인 것이다. 즉 예수 도반들의 무지에 관한 것이다.

 

여기 그노시스란 말은 영지라는 신비스러운 그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지식일 뿐이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율법사들의 지식은 하늘의 문을 여는 신비로운 열쇠가 아니라, 토라에 관한 것이다. 그들은 토라(모세오경) 전문가들인 것이다. 사두개인들은 토라에 대한 구전(oral tradition)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바리새인들은 토라의 끊임없는 해석을 가능케 하는 구전에 대하여 개방적이었다. 바리새인들의 이러한 구전에 대한 너그러운 태도가 미쉬나와 탈무드의 성립을 가능케 한 것이다.

 

예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지식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리고 그것을 결코 부정적인 맥락에서 지칭하지 아니 한다. 토라에 관해서 그들은 풍요로운 전승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문제는 그러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지식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숨김은 지식의 독점(monopoly of knowledge)이며, 권위의 과시이다. 우리가 도마복음서를 읽을 때 가장 감명을 받는 것은 역사적 예수의 개방적 자세에 관한 것이다. 예수는 일체의 권위에 대해 도전적이었다. 기존의 야훼의 권위에 대해서도 예수는 도전적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말하지 않는다. 그냥 나라를 말할 뿐이다. ‘나라는 새로운 질서(Order)’이며 새로운 지배(Reign)’일 뿐이다. 바울은 철저히 야훼의 나라를 생각했고, ‘야훼의 지배를 생각했다. 유대교적 유일신론(Jewish monotheism)의 전제하에 새롭게 인류를 묶어낼 수 있는 보편주의를 구상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유대교적 유일신론을 사고의 전제로 가지고 있지 않다. 예수는 결코 유일신론자(monotheism-theorist)가 아닌 것이다. 그는 단지 아버지만을 말한다.

 

예수의 이토록 철저한 비권위주의는 예수의 사상에 개방성을 초래한다. 모든 것은 이미 예수의 도반들에게 열려져 있다. 아무도 지식을 숨길 수 없고, 지식의 열쇠를 독점하고 있다고 클레임할 수 없는 것이다. 지식은 높은 산 위에 지어진 요새(Th.32)처럼, 등경 위에서 모든 사람에게 비추어지고 있는 등불의 빛(Th.33)처럼, 발가벗은 아해(Th.37)처럼 개방적인 것이다.

 

따라서 지식을 숨기는 자들은 그들 자신 지식의 세계로 들어갈 수도 없고, 지식의 세계로 들어가고자 갈구하는 타인도 들어가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이러한 지식의 훼방꾼들 앞에서 예수의 도반들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라고 권유한다.

 

뱀은 소리를 내지 않으며 자기가 가는 곳을 남에게 알리지 않고 여유롭게 움직인다. 여기 지혜롭다(wise)’는 말은 교활하다(shrewd)’ ‘빈틈없다라는 뜻을 내포한다. 희랍어의 프로니모이(phronimoi)’신중하다라는 뜻도 내포하고 있다. 뱀처럼 지혜롭고 교활하고 신중한 반면, 인간은 비둘기처럼 순결해야 한다. 교활한 지혜는 반드시 성실한 순결을 전제로 해야 하고, 순결이 무지나 나이브함에 빠지지 않으려면 교활한 지혜를 전제로 해야 하는 것이다. 마태는 이 도마의 마지막 구절이 지식의 훼방꾼에 대처하는 말인데, 다른 맥락(제자 파송시의 당부말씀(the Mission Speech)에서 활용하였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떼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10:16).

 

 

안토니 수도원 수도원 공동식사의 한 전형을 나타내주는 장소. 이곳은 안토니 수도원의 식사 장소로서 고대 형태를 보존하고 있다. 우윳빛 강석회암 통돌을 깎아 만든 긴 식탁과 긴 의자가 너무도 깨끗했다. 앞쪽의 설교대와 같은 돌덩이는 식사시간 동안에 헤구멘이 성구를 봉독하는 곳이다. 그들은 성구를 들으며 밥을 먹는데, 밥 그 자체를 하나님의 아가페로 생각했다. 해설자는 루메우스 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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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성서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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