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장
옛것과 새것은 양립하지 않는다
제47장
1예수께서 가라사대, “한 사람이 동시에 두 말 위에 올라탈 수 없고, 한 사람이 동시에 두 활을 당길 수 없다. 2그리고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그렇게 되면 그 종은 한 주인은 영예롭게 할 것이나 또 한 주인은 거스르게 되리라. 3그 어느 누구도 오래 묵은 (양질의) 포도주를 마시고 나서 금방 새 포도주를 마시기를 원치 아니 한다. 4그리고 새 포도주는 낡은 가죽부대에 부어 넣지 않는다. 낡은 가죽부대가 터져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래 묵은 (양질의) 포도주를 새 가죽부대에 쏟아 붓지도 않는다. 그 (양질의 포도주의) 맛을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5낡은 천조각을 새 옷에다가 기워 붙이지 않는다. 그것은 새 천에 안 맞아 다시 터질 것이기 때문이니라.”
1Jesus said, “A person cannot mount two horses or bend two bows. 2And a servant cannot serve two masters, or that servant will honor the one and offend the other. 3No person drinks aged wine and immediately desires to drink new wine. 4And new wine is not poured into aged wineskin, or they might burst, and aged wine is not poured into a new wineskin, or it might spoil. 5An old patch is not sewn onto a new garment, for there would be a tear.”
약간의 의역을 가했다. 대강의 뜻은 독자들도 알아차릴 것이나 기존 복음서와의 병행관계가 매우 복잡하다. 한 절씩 해설해나가겠다.
제1절은 성서학자들은 아그라파(agrapha)라고 부른다. 문자 그대로는 ‘쓰여지지 않음’의 뜻인데, 쓰여진 4복음서에서 발견되지 않는 예수의 말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아그라파라는 말은 별로 듣기 좋은 말이 아니다. 그것은 4복음서의 편협한 권위를 전제로 한 말이기 때문이다. 아그라파는 그라파는 그것은 동등한 예수의 말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항상 문헌을 접근해야 옳다. 방대한 예수 말씀의 전승 속에서 4복음서는 그 일부가 추려진 것일 뿐이다.
전국(戰國) 말기의 문헌인 『여씨춘추(呂氏春秋)』에도 ‘집일(執一)’이라는 개념이 있다. 말이 여러 마리가 있어도 한 사람이 채찍을 잡고 몰아야 한다는 뜻인데, 『여씨춘추』는 말몰이의 통일성을 강조하고 있는데 반해, 여기 도마의 제1절은 ‘양립 불가능성’을 강조한 것이다. 제2절부터 진행되는 논리의 매우 탁월한 서론적인 아포리즘이라고 할 수 있다.
제2절은 마태와 누가에 병행구가 있으며 큐복음서에 속한다(Q74).
(마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길 것이기 때문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눅 16:13)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이기 때문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태에는 ‘종’이라는 표현이 없고, 도마와 누가는 ‘종’이라는 표현이 공통된다. 그리고 도마에는 마태와 누가에게 공통으로 나타나는 ‘하나님과 재물’이라는 해설적 언급이 없다. 도마에게서 과연 두 주인이 ‘하나님과 재물(mammon: 돈 신으로 의인화 됨)’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고대사회에서 한 종이 두 주인에 속할 수 없도록 제도화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노예가 두 주인에게 소유될 수 있는 상황은 얼마든지 있었다. 여기는 이러한 제도적 사실에 근거한 논의가 아니며, 노예가 주인에게 향하는 전심의 헌신(the exclusive loyalty)에 관한 것이다. 콥트어 텍스트에서 쓰고있는, ‘종’ ‘섬긴다’ ‘영예롭게 한다-거스른다’에 해당되는 낱말들은 모두 아람어 계통의 말이며, 따라서 도마의 문장이 희랍어 큐복음서보다 더 오래된 전승이라고 사료된다.
제3절은 ‘묵은 포도주(aged wine)’가 나쁜 술이 아니라, 아주 양질의 고급 포도주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요즈음 오래된 연도의 술이 더 고가인 것과 똑같다. 그러니까 제3절의 뜻은 발렌타인 30년을 마신 뒤 끝에 바로 연이어 싸구려 쇠주로 입가심할 미친 놈은 없다는 뜻이다. 여기 문장에서는 분명 새 것에 대비되는 묵은 것에 대한 예찬(禮讚)이 있다. 즉 예수 도반들이 추구하는 지식을 오랜 세월 동안 숙성된 묵은 술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새로운 메시아시대에 대한 예찬으로서 해석되는 공관복음서의 입장과는 매우 다른 표현이다. 그러나 누가복음에는 이 도마의 구절이 쌩뚱맞게 매우 모순적 문맥에 들어가 있다. 다시 말해서 눅 5:38에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라고 끝나는 문장 다음에 연접되어 있는 것이다.
(눅 5:39) 아무도 묵은 포도주를 마신 후에 새 포도주를 원하지는 않는다. 그는 묵은 포도주가 좋다고 말하기 때문이라.
여태까지 모든 주석가들은 이 파편의 단절성ㆍ고립성을 인정하지 않고, 적당히 부정적인 맥락에서 해석하여 왔다. 예수의 복음이라는 ‘새 포도주’를 맛보기를 거부하고 ‘묵은 포도주’, 다시 말해서 낡은 관습에만 집착하거나 전통에 빛나는 율법만을 예찬하는 보수적 인간들에 비판으로서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누가는 도마류의 원자료를 곡해하여 왜곡된 형태로 인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 않으면 후대의 주석가들이 문맥의 모순을 무마하기 위하여 적당히 얼버무린 것을 우리가 그냥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음 4절과 5절은 마가ㆍ마태ㆍ누가에 순서가 뒤바뀐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먼저 4절의 경우를 보자.
(막 2:22)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는 자는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마 9:1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지 아니 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눅 5:37~38)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는 자는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리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상기의 3 병행구를 비교해보면, 마태와 누가는 마가자료를 활용하면서도 마태와 누가에 공통된 큐자료가 또 있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그러나 이 경우 도마자료를 계승한 것은 마가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도마자료는 ‘새 포도주-낡은 가죽부대’의 용례를 다시 역전시켜 ‘묵은 포도주-새 가죽부대’를 병치시키는 ‘대구역병행법(對句逆竝行法)’을 쓰고 있는데, 이 용례에서 마가는 ‘새 포도주-낡은 가죽부대’의 용례만을 활용함으로써, ‘새 것’에 의하여 ‘헌 것’이 지양(止揚)된다고 하는 자신의 주제를 명료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도마의 양면성을 그대로 수용하기에는 복음서 기자의 종말론적 관심과 괴리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마의 양면성을 일면화해 버렸다. 그러나 도마는 ‘묵은 포도주’의 우수함을 계속 부각시키고 있다. 묵은 포도주는 양질의 고급 술인데 그것은 역시 있던 통에 그대로 있어야지 새 부대에 담으면 새 가죽의 냄새가 그 맛을 변질시켜버린다는 것이다. 새 포도주는 가스가 왕성히 발생하는 성질이 있어 낡은 가죽부대에 넣으면 낡은 가죽부대를 터뜨릴 수가 있다. 그러니까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넣는 것이나, 묵은 양질의 고급 포도주를 어설픈 새 부대에 넣는 것이나 모두 나쁜 것이다. 그러니까 도마의 사상에는 새 것이 좋은 것이고 헌 것은 다 나쁜 것이라는 분별적 사유, 직선적 사유, 이분적 사유가 없는 것이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라는 우리의 통념은 이 4절의 표현에 한정하여 보면 좀 유치한 왜곡일 수가 있다. 묵은 술은 묵은 부대에 보전되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다. 단지 도마는 새 것과 묵은 것의 양립불가능성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마지막 제5절에는 이러한 사유의 약간의 반전이 일어난다.
(도마 47:5) 낡은 천조각을 새 옷에다가 기워 붙이지 않는다. 그것은 새 천에 안 맞아 다시 터질 것이기 때문이다.
(막 2:21)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기워 붙이는 사람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헤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마 9:16)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사람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헤짐이 더하게 되기 때문이라.
(눅 5:36)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사람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합하지 아니 하니라.
마태와 누가는 마가자료를 원형으로 하고 있다고 보여지지만, 누가는 마가자료에서 본질적으로 빗나가 있다. 마가자료는 ‘생베 조각’을 말했을 뿐이며, 그것을 낡은 옷에 기워 붙이기 어렵다는 것을 말했을 뿐이다. 생베 조각(새 것)이 낡은 옷(오래된 것)에 비해 더 좋은 것이라는 특정한 가치판단을 명백히 내리고 있지 않다. 마태는 이러한 마가의 논조를 있는 그대로 계승한데 비하면 누가는 가치판단을 명백하게 하고 있다. 우선 ‘조각’ 자체가 온전한 새 옷에서 찢어낸 조각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온전한 새 옷마저 이미 버린 후의 사태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합하지 않는다’고 말함으로써 새 옷은 낡은 옷보다 본질적으로 ‘좋은 것’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 ‘새 옷’은 새로운 기독교(new Christianity)를 말하고 ‘낡은 옷’은 유대교와 유대인들의 낡은 삶의 방식(the old life of Judaism)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새로운 기독교의 천 조각을 낡은 유대교에 기워 붙이는 것은 넌센스라는 것이다. 병행구의 내면적 성격으로 볼 때 이 구절은 누가가 도마에 더 근접하고 있다. 아마도 누가와 도마는 공통의 어떤 자료를 각각 다르게 전승했을 수도 있다.
여기 천은 대개 양털로 짠 것인데, 양털은 물에 들어가면 심하게 수축한다. 그러니까 수축한 적이 없는 새 천은 심하게 수축하므로 주변의 천들을 잡아당겨서 망가뜨린다. ‘생베 조각’이라고 번역된 것은 영어로 ‘a piece of unshrunk cloth’이다. ‘수축되어 본 적이 없는 천 조각’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도마자료는 새 천 조각과 낡은 옷의 관계가 역으로 되어 있다. ‘낡은 천조각을 새 옷에다 기워 붙이지 않는다’로 되어 있다. 수축의 결론은 결국 똑같지만, 터지는 것은 낡은 조각이다. 도마의 문맥도 완벽히 스무드하게 연속적으로 진행된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1~4절에서는 양립불가능성만을 말하다가 제5절에 와서는 역시 새로 얻는 내면적 주체성이나 정체성(the new subjectivity and identity)은 낡은 삶의 방식으로 땜방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을 말함으로써 ‘새 것’에 대한 무게를 실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아타나시우스가 지은 교회의 폐허. 아부메나의 원래 터.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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