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장
산도 움직이리라
제48장
1예수께서 가라사대, “한 집안 속에서 둘이 서로 평화를 이룩할 수 있으면, 그들이 산을 보고 ‘여기서 움직여라!’라고 말하면, 산이 움직이리라.”
1Jesus said, “If two make peace with each other in a single house, they will say to the mountain, ‘Move from here’, and it will move.”
관련된 문구들이 기존 복음서 여기저기에 있다. 그리고 비슷한 내용을 전하는 로기온이 106장에도 있다.
(마 18: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리라.
이것은 예수 제자들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이루어주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 마태의 기술에는 예수 제자들(초대교회)의 내적 결속력이 강조되어 있고, 또 ‘땅의 제자들’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my Father in heaven)’라는 초월주의적, 이분론적 구원론이 전제되어 있다. 다음에 산 보고 움직여라 운운하는 것은 큐복음서에도 있다(Q79).
(마 17:20)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눅 17:6)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라’라고 말하여도,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이것은 모두 ‘믿음’을 강조하는 타력신앙적 사유 속에서 인용되고 있다.
(마 21:2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서 일어난 이런 일만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 산 보고 ‘번쩍 들려라! 그리고 바다에 빠져라!’라고 말하여도 너희 말대로 될 것이니라.”
(막 11: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번쩍 들려라! 그리고 바다에 빠져라!’라고 말하면서, 그 말하는 바가 이루어지리라고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이 모든 공관복음서의 말씀들은 ‘믿음’과 ‘기적을 일으키는 권능’을 연결시키는 논리를 강화하는 목적으로 쓰여졌다. 바울에 있어서는 ‘믿음’의 논리가 ‘기적’과 곧바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복음서의 저자들은 훨씬 더 용이하게 믿음과 기적을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초대교회의 신앙결속력이 아주 시급한 문제였을 것이다.
‘산이 움직인다’는 이러한 말은 예수의 특유한 말이라기보다는 중동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격언·속담 같은 것이다. 사막에서는 자연이 매우 불안정하다. 그래서 모래바람으로 산이 움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중원의 문화권이나 삼천리 금수강산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우뚝 솟아 있는 저 푸른 산이야말로 움직일 수 없는 존재의 근원이며, 뭇 생명의 근원이며, 인간 역사의 유구한 장의 상징이다. 『중용(中庸)』 제26장 ‘지성무식(至誠無息)’에 연이어 나오는 산에 대한 예찬을 한번 보라! 천지지도(天地之道)는 광박(廣博)하고, 심후(深厚)하고, 고대(高大)하고, 광명(光明)하고, 유유(悠悠)하고, 구원(久遠)한 것이다. 어찌 태산(泰山) 보고 ‘움직여라’ 명하여 움직인다는 넌센스가 가능할까보냐? 그 위대한 역사가 사마천(司馬遷)의 아버지 태사령(太史令) 사마담(司馬談)은 한무제(漢武帝)가 천하통일을 하느님께 고하는 태산의 봉선(封禪) 제식에 참가하지 못한 것을 괴로워하며 분사(憤死)하지 않았던가?
사도 바울은 그 유명한 고린도전서 사랑의 장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뮈스테리아)과 모든 지식 (그노시스)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피스티스) 이 있을지라도 사랑(아가페)이 없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고전 13:2).
여기 바울의 논리는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에 대해 부정적이다. 그것이 대수로울 것이 없다는 입장이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적 케리그마의 창시자인 바울이 오히려 복음서 저자들의 논리를 부정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기독교 신화를 만든 바울이 복음서 저자들보다 오히려 덜 신화적이라는 인상을 받게 된다. 바울이 여기서 예수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바울은 예수의 로기온을 거의 알지 못했다. 따라서 바울의 명제는 초대교회 당대의 천박한 믿음, 믿음만 있으면 기적도 마구 일어날 수 있다고 믿는 천박한 믿음을 비판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믿음을 영지주의 이단들의 경향이라고 보는 주석가들의 견해는 타당하지 않다. 이제 우리는 도마 자체의 원의를 논의해야 한다.
우선 여기 ‘한 집안 속에서 둘이 서로 평화를 이룬다’라는 표현을 집단적으로 해석하면 마 18:19의 의미가 가장 도마에 근접할 것이다. ‘한 집안’을 도마공동체, 혹은 예수운동의 도반들, 혹은 추구자들(seekers)의 집단으로 해석하면, 본 로기온은 그들 자신간에 평화를 도모하면 예수운동이 사회적으로 막강한 힘을 발휘하게 되리라는 상징적 표현이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 ‘한 집안’이라는 것은 공동체적 주체성을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방랑자’에 있어서 ‘코뿔소의 외뿔’과도 같은 개체적 주체성을 말하는 것이다. ‘한 집안’이란 ‘오직 하나인 이 집(this one house)’(Lambdin)이라는 뜻을 내포하며 그것은 제4장에 나타난 ‘하나된 자(a single one)’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이 주제는 4장뿐 아니라, 22장, 23장, 106장 등등에 나타나고 있다.
코뿔소(무소)의 외뿔은 보통 소의 뿔이 두 개인 것과는 달리 하나의 뿔을 가지고 있다. 두 개의 뿔이란, 삶과 죽음, 밤과 낮, 천당과 지옥, 본체와 현상, 어둠과 빛 등등의 우리 인간의 사유에 내재하는 언어적 분별의 가장 심오한 디프 스트럭쳐(deep structure), 그 아키타입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분별이 하나로 융합되는 경지, 그 원초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노자』 39장에도 ‘득일자(得一者)’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 득일자는 도마 4장, 23장의 ‘하나 된 자’와 같은 표현이다. 왕필(王弼)이 주석을 달기를, “‘하나'라는 것은 수(數)의 시작이며 물(物)의 극(極)이다[一, 數之始, 而物之極也].’”라고 했다.
도마복음서에는 이 원초적 하나의 융합을 아담과 이브가 분화되기 이전의 원초적 아담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선·악의 분별적 사유가 분화되기 이전의 ‘아기’로도 표현되고 있다(Th.46), ‘둘이 서로 평화를 이룬다’라는 표현은 그러한 원초적 융합의 상태로 복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에덴에서 아포칼립스까지’를 주장하는 섭리사관적ㆍ구속사적 직선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포칼립스가 없는 에덴’이며, ‘아포칼립스가 근원적으로 거부되는 에덴’이다. 나라(천국)는 미래에 있질 않고 항상 존재의 원점에 있다. 노자가 말하는 ‘원왈반(遠日反)’의 ‘반(反)’【시작으로 돌아감, 『도덕경』 25장】에 있는 것이다.
그러한 내면적 융합을 이룩할 때 산을 보고 ‘움직여라’ 외치면 움직일 것이라는 말은 ‘기적의 권능’을 말하는 것이 아니요, 제2장의 ‘모든 것을 다스리게 되리라’는 말씀의 상징적 표현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원효가 체험한 ‘일체개유심조(一切皆唯心造)’와도 같은, 그러한 식(識)의 작용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산을 움직인다’는 이러한 표현 때문에 과도한 독선, 과도한 전도주의, 과도한 용감성, 과도한 전쟁도발의 행동이 인류사를 물들여온 기독교의 죄악의 역사를 성립시켰다는 측면도 우리가 깊게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우가리트의 고대도시로 들어가는 문이 매우 독특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내부에 휘어지는 계단터널이 있으며 바로 왕궁(royal palace)으로 연결된다. 이 사실은 방어개념이 없는 평화로운 도시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미로와 같은 골목길 구조에 왕궁과 서민들이 섞여 살고 있다. 중간의 대로는 아크로폴리스(acropolis)로 뻗쳐 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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