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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도마복음한글역주, 제69장 - 가슴속의 박해, 나눔을 위하여 배고픈 자 본문

고전/성경

도마복음한글역주, 제69장 - 가슴속의 박해, 나눔을 위하여 배고픈 자

건방진방랑자 2023. 3. 25.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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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9

 

 

가슴속의 박해, 나눔을 위하여 배고픈 자

 

 

69

1예수께서 가라사대, “가슴속에서 박해를 당하는 그들이여, 복이 있도다! 그들이야말로 아버지를 참되게 알게 되는 자들이로다. 2굶주린 그들이여, 복이 있도다! 배고파하는 자의 배가 채워질 것이기 때문이로다.”

1Jesus said, “Blessed are those who have been persecuted in their hearts: They are the ones who have truly come to know the father. 2Blessed are those who are hungry, for the stomach of the person in want may be filled.”

 

 

1절은 앞 장과 대비된다. 68이 외면적 ·사회적 박해를 말하고 있다면, 69장은 내면적ㆍ정신적 박해를 가리키고 있다. ‘아버지를 안다는 것은 곧 나의 내면의 본래적 자기를 회복하는 것이며, 그것은 비본래적 자기를 핍박하는 것이다. 아버지를 참으로 안다는 것은 나의 욕망과 쾌락과 열정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며, 그 과정은 여기서 가슴속의 박해로 표현되고 있다. 모든 진정한 앎이란 내면의 갈등(internal conflicts)을 거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단순한 관조나 성찰의 문제는 아니다.

 

2절은 큐자료(Q10)와 병행하고 있다.

 

 

(6:21)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누가는 배고픔을 심령화(spiritualization)하지 않았다. 그것은 물리적인 배고픔이다. 그러나 과연 어떻게 이 물리적인 배고픔을 해결할 것인가? 사실 모두가 굶주린 갈릴리 농촌에서 쉬운 해결은 없다. 너희가 곧 배부르게 되리라는 선포만으로는 실제로 물리적 사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누가의 기술도 결국 하나님께서 그 배고픔을 해결해주신다는 선포일 뿐이다. 역시 이렇게 되면 메시아적 잔치(Messianic Banquet)’를 설정하지 않을 수 없다. 천국이 도래하면, 천국에서 하나님과 한자리에서 배부르게 먹게 되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아예 마태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라고 하여, ‘주림과 목마름을 심령의 갈망으로 대치시켰다.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굶주림과 갈증을 느끼는 자는 복이 있다는 것이다. 마태는 완벽하게 메시아적 기독론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 도마는 매우 리얼한 현실을 전제로 하고 있다. 예수의 도반들은 금욕하는 자들이며 나눔을 실천하는 자들이다. 그냥 배고프다고 해서 축복을 받는 것은 아니다. 타인과의 나눔을 위하여 굶주리는 자들이야말로 복되다는 것이다. 내가 먹을 것을 덜 먹음으로써 배가 고플 때, 내가 배고픈 만큼 배고파하는 타인들의 위장이 채워질 것이다. 아마도 예수의 원래의 가르침이 이 도마의 원의에 근접하는 그 무엇이었을 것이다. 매우 각박한 현실을 전제로 한 나눔의 메시지였을 것이다. 관념화된 천국의 배부름은 아니었던 것이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최대의 비극은 도처에 깔려 있는 비만현상이라는 사실도 여기 지적될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의 탐욕이 이러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의 몸뚱아리만 비만에 시달리는 것이 아니라 문명 전체가 비만증세로 파멸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여기 방랑하는 자들은 굶주림에 시달리면서까지도 나눔을 실천하고 배고파하는 타인의 배를 채워주려고 노력하는데, 오늘 현대인들은 비만에 시달리면서도 소식(少食)’조차 실천하지 못하고, 나눔을 실천할 생각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구나 한 피를 나눈 북녘 동포가 굶어죽어가고 있는데도, 자신들은 비만의 온갖 증세로 시달리면서도, 그들이 굶어뒤지게 두라고 열불을 올리며 반공(反共)의 기치만을 드높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치를 드세우는 자들이 대부분 기독교인이라고 한다면 도대체 이 땅의 기독자들의 신앙이란 무엇을 위한 것일까?

 

공자도 능근취비(能近取譬)’야말로 인지방(仁之方)’이라고 말했다(논어6-28). 비근한 사태에서 내 몸으로 느끼고 공감할 줄 아는 마음의 섬세함이 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이 성()의 경지에 이르려면 반드시 박시어민(博施於民)’하고 제중(濟衆)’해야 한다고 말했다. 백성에게 널리 베풀고, 대중을 구원하는 문제야말로 성(, das Heilige)의 경지라는 것이다. 본 장의 주제는 현대 에콜로지의 다양한 주제들과 연결되어 있다.

 

 

() 인도 데칸고원 아잔타 석굴사원 (아래) 터키 아나톨리아고원 괴레메 석굴교회. 인도 아잔타에서 아나톨리아까지 하나의 아시아대륙 문명권임을 확인케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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