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2장
나는 불이다
제82장
1예수께서 가라사대, “누구든지 나와 가까이 있는 자는 불과 가까이 있는 것이니라. 2그리고 누구든지 나로부터 멀리 있는 자는 나라로부터 멀리 있는 것이니라.”
1Jesus said, “Whoever is near me is near the fire, 2and whoever is far from me is far from the kingdom.”
동방의 사유나 가치관에 젖어있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로기온을 접할 때에, 이미 순간적으로 가슴에 다가오는 벅찬 감격, 어떤 위대한 인격의 열정, 진리에 대한 자신감, 그리고 생명의 약동(엘랑비탈, élan vital)을 감지할 수 있다. 구차스러운 설명이 필요없이 그런 육감이 다가오는 것이다. 그런데 서방의 주석가들은 이 장을 에니그마틱(enigmatic, 불가사의한)하게만 바라보고, 명료한 해석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불’이라고 하면 우선 ‘마지막 심판’이니 ‘이 세상을 태워버릴 저주의 불기둥’과도 같은 네가티브한 의미만을 먼저 연상하기 때문이다. 서구인들의 사유가 종말론적 인식의 틀로 인하여 얼마나 오염되어 있는가를 방증하는 것이다.
불트만은 종말론을 예찬하고, 종말론에 실존의 의미를 부여하고, 인간의 삶의 매 순간이 종말론적이라고 말했지만, 그것이 제아무리 우리 삶에 그럴듯한 의미를 부여한다 해도, 실로 종말론적 사유는 그 폐해가 너무도 큰 것이다. 인류의 문명은 이제 종말론적 독단의 잠(dogmatic slumber)으로부터 깨어나야 한다. 근원적으로 종말론을 대치하는 새로운 사유를 개발치 못한다면 전 세계의 크리스텐툼(Christentum)은 종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진실로 한 순간도 우리 삶에 종말론적 의미를 부여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종말론의 궁극적 진원인 예수가 종말론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 제2절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나로부터 멀리 있는 자는 나라(천국)로부터 멀리 있다’라는 명제는 명백하게 ‘나 예수’와 ‘나라’를 동일시하는 명제이다. 그리고 물론 이때 ‘나라’가 네가티브한 의미를 지닐 수 없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하다. 나를 멀리하는 것은 곧 나라를 멀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1절도 2절과 파라렐리즘의 의미맥락에서 이해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나 예수’와 ‘불’은 동일시되며, ‘불’은 네가티브한 의미를 지닐 수 없는 것이다.
도마복음에서 설파하는 예수의 아이덴티티에 관하여 가장 집요한 주제가 빛(Light)이다. 그런데 모든 빛이란 그 근원에 있어서 궁극적으로 불(Fire)이라는 것을 근동의 사람들도 너무도 잘 알았다. 배화(拜火)의 사상은 페르시아문명으로부터 팔레스타인문명에 이르기까지 공통된 것이다. 성전에 타오르는 영원한 불꽃을 하나님의 현현으로 인식하였던 것이다.
호렙산 떨기나무에서 모세에게 현현된 불꽃도 하나님의 현현의 상징이었고(출 3:22), 이스라엘민족을 이집트에서 구출해내는 과정에서도 하나님의 상징은 불기둥이었다(출 13:21~22).
황하문명의 사람들은 ‘불’을 ‘화(火)’라 하여, 단지 물리적 산화로서만 생각지 아니 하고 오행(五行)의 가장 근원적 상징체로서, 그것은 생명(Life)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생명의 모든 대사작용이 결국 화(火)를 생산하고 화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 몸에서 화가 떠나면 싸늘한 송장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화가 있고 없고가, 곧 생명의 유무를 의미하는 것이다. 구약의 ‘하나님’도 결국은 ‘생명’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생명은 결국 빛이며 불이다(시 104:2~4. 주께서 옷을 입음 같이 빛을 입으시며, 하늘을 휘장 같이 치시며, 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얹으시며,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날개로 다니시며, 바람으로 자기 사자使者를 삼으시며, 불꽃으로 자기 사역자使役者를 삼으시며 …).
구약의 하나님에서 나타나는 ‘불’이 네가티브하고 공포스러운 의미를 지닐 때는 대강 ‘야훼의 진노’와 관련된 것이지만, 그것도 알고보면 야훼라는 생명력의 짙은 발로일 뿐이다. 야훼가 전투적인 민족신의 성격을 지녔기 때문에, 야훼는 항상 이스라엘민족의 배반에 대한 ‘질투’의 격정을 표현한다. 이러한 진노의 불길도 결국은 야훼의 생명력의 표현이며, 하나님의 신성(holiness)의 메타포이며, 그것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생명의 ‘정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 예수가 자신을 ‘불’과 동일시한 것은 결국 예수라는 생명의 상징을 의미하는 것이다. 천국은 불이며, 생명이다. 그것은 예수라는 존재의 생명력의 전부인 것이다. 우리는 이미 도마 제10장에서 ‘불’이 심판의 상징이 아니라, ‘천국운동의 불씨’라는 것을 충분히 논의한 바 있다: “나는 이 세상에 불을 던졌노라. 그리고 보라! 나는 그 불이 활활 타오를 때까지 그 불을 지키노라.” 어찌 이것이 심판의 진노와 저주의 언사일 수 있으랴!
우리는 이제 종교의 본질을 네가티브에서 포지티브로, 저주에서 격려로, 율법에서 사랑으로, 사망의 위협에서 생명의 환희로 전환시킬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나를 가까이 하는 자는 불을 가까이 하는 것이니라. 나를 가까이 하는 자는 자신의 생명의 본질로 가까이 가는 자인 것이다. 이러한 로기온에서 예수의 불 같은 열정과 신념과 자신감, 그 파토스를 감지할 수 없다면, 어찌 그러한 자를 ‘크리스챤’이라고 말할 수 있사오리이까?
▲ 메렌디즈 강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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