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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도마복음한글역주, 제79장 - 예수여! 그대를 낳은 자궁과 그대를 먹인 유방에 감사하라! 본문

고전/성경

도마복음한글역주, 제79장 - 예수여! 그대를 낳은 자궁과 그대를 먹인 유방에 감사하라!

건방진방랑자 2023. 3. 25.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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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예수여! 그대를 낳은 자궁과 그대를 먹인 유방에 감사하라!

 

 

79

1무리 속의 한 여인이 예수를 향해 외쳤다: “너를 낳은 자궁과 너를 먹인 유방이여, 복이 있도다!” 2예수가 그 여인에게 말하였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참되게 지킨 자들이여, 복이 있도다! 3너희가 애기 밴 적이 없는 자궁과 젖을 먹인 적이 없는 유방이야말로 복되도다라고 말할 날이 올 것이기 때문이니라.”

1A woman in the crowd said to him, “Blessings on the womb that bore you and the breasts that fed you.” 2He said to her, “Blessed are those who have heard the word of the father and have truly kept it. 3For there will be days when you will say, ‘Blessed are the womb that has not conceived and the breasts that have not given milk.’”

 

 

외면적으로 얼핏 본 장만 떼어놓고 보면,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신비로운 문장 같이 느껴질 수도 있지만, 여태까지 우리가 논의해온 맥락을 따라 잘 살펴보면 논리가 매우 정연하고 유기적 통일성이 있는 명료한 장이다. 그러기에 복음서에 흩어져 있는 파편들의 오리지날한 모습을 여기서 목도하게 되는 것이다. 우선 1. 2절은 누가 11에 병행하는데, 그것은 큐복음서에 속하는 자료이다(Q40). 그리고 3절은 누가 23과 병행하고 있다.

 

 

(11:27~28) 이 말씀을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가로되, “당신을 밴 자궁과 당신을 먹인 유방이 복이 있도다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하시니라,

 

(23:27~29) 27또 많은 군중과 그리고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28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29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자들과, 아기를 낳아보지 못한 자궁과 젖을 빨려보지 못한 유방이 복이 있도다하리라.” (29절만 병행).

 

 

누가 11장은 도마의 맥락에서 크게 벌어져있지 않다. 그러나 누가 23장에 나오는 도마의 파편은 사실 너무도 퉁명스럽게 삽입되어 있다. 골고다의 언덕으로 십자가를 젊어지고(구레네 사람 시몬이 섞어졌다) 올라가는 예수의 최후의 장면에서, 애처로운 심정으로 그를 따라오는 예루살렘의 여인의 무리들을 향하여(이들은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여인들이 아니다) “나를 위하여 울지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라는 감동적인 메시지를 던진 후에 연이어 삽입된 이 구절은 도무지 왜 여기 이 말이 들어가야 하는지 그 당위성을 알기 어렵다. 주석가들은 그것을 종말론적 비극적 사태에 대한 예견으로 쉽게 해설하고 있지만 역시 어색하다. “나를 위하여 울지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라고 하는, 희생당하는 한 거대한 인간의 대자대비의 연민의 언어 이후에 왜 종말론적 협박의 언사가 끼어드는지 잘 이해가 가질 않는 것이다.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는 메시지는 전장에 나가는 병사가 아내와 자녀들의 운명을 염려하는 장쾌한 언어로서, 소포클레스나 세네카 등 희랍 비극에 유사한 구절이 나오고 있다(W. Grundmann, Das Evangelium nach Lukas 429). 그러나 이 말에 연접된 29절의 메시지는 종말의 날이 오면 어차피 다 비참하게 죽을 테니까, 애를 낳을 수 없는 불임의 여인이나 애를 낳아보지도 길러보지도 못한 여인들이 오히려 더 행복하게 느껴질 그런 날이 오리라는 이야기인 것이다. 이것은 도무지 설명하기 어려운 유치한 연접이다. 이런 모든 복음서의 어색함이 복음서 저자들이 기존의 파편들을 마구 맥락 없이 꼴라쥬해서 드라마를 구성한 데서 생겨나는 문제점인 것이다. 여기 도마의 원래 맥락은 그러한 종말론적 협박과는 관련이 없다. 그렇다면 본 장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가?

 

여기 군중 속에서 한 여인이 예수를 향하여 외치는 모습은 실로 감동적이다. 기나긴 고통의 세월을 강인하게 견디어 온 조선의 여인의 함성 같은 것을 듣는다. 갈릴리 여인의 강인한 용기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민중 속에서 민중에게 천국의 진리를 선포하고 있는 젊은 예수를 바라보는 여기 한 여인은 예수를 낳은 엄마 마리아와도 같은 나이 또래의 노경의 여인이었을 것이다(최소한 50살 이상?). 이 여인은 민중의 지도자인 예수를 자랑스럽게, 대견하게 바라보고 있다. 이 여인은 예수를 향해 외치는 순간 예수를 낳은 예수의 엄마 마리아와의 유대감을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젊은 예수여! 천국을 선포하는 그대이지만, 그대의 위대한 모습은 결코 그대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다. 너의 엄마의 자궁이 너를 낳느라고 고통을 겪었고 너의 엄마의 유방이 너를 키우느라고 수고를 하였다. 예수여! 우리를 축복하지 말고, 너를 낳은 자궁과 너를 기른 유방을 축복하여라!”

 

이 여인의 외침은 매우 인간적인 축복이다. 매우 소박하고 진실하게 인간적 진실에로의 회귀를 예수에게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구절에 담긴 역사적 정황을 너무 기독론적인 메시아 예수상에 가리워 정직하게 해석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 여인의 축복은 애틋한 혈육의 정의 표현이다. 예수는 이러한 축복을 외면할 수가 없다. 외면하면 그것은 위선이다! 기존의 누가 주석가들은 눅 11:28을 그 여자의 음성에 대한 반론으로써 해석하고 3:31~35의 단화와 같은 맥락에서 풀이하였다. 예수를 여인의 세속적 관심 속에 파묻어 둘 수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인간 예수를 신격화해야 하기 때문에 이러한 여인의 외침은 예수에게 난감한 상황을 던져준다고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난감한 상황에 대하여 예수는 결코 그것을 반박하거나 역전을 꾀하지 않는다. 예수에 대하여 그 여인이 축복한 방식으로 똑같이 그녀에게 축복을 해주는 것이다. 축복의 형식은 같으나 그 내용은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다. 예수를 향한 이 여인의 외침은 혈연적이고, 세속적이며, 물질적인 맥락(a physical perspective)에 고착되어 있다. 예수는 이러한 고착성에 굴복할 수가 없다. 예수는 이미 가족이나 혈연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사람이다. 지금 이 순간, 이렇게 몰두하여 도마복음과 씨름하고 있는 이 순간에 누군가 나에게 혈연적 정리(情理)에 고착된 축복을 던진다고 생각해 보자! 그 축복이 나의 생애의 일 순간을 스쳐지나 갈 수는 있으나, 나의 삶을 그러한 맥락에서 규정하려고 든다면, 나는 그 축복을 거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예수는 그 여인에게 말한다: “여인의 자궁이란 생산을 위함이요, 여인의 유방이란 기름을 위함이다. 그러나 진정한 창조와 진정한 양육은 낳고 기른다는 물리적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말씀을 생산하고 기르는 데 있는 것이다. 따라서 너희 여인들이 나 같은 자를 낳고 길렀다는 사실에만 자부감을 느낄 것이 아니라, 그대들 스스로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즉 고착된 관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질서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실천할 때(=지키다) 그대 여인들에게도 진정한 축복이 내리게 되는 것이다.” 예수는 노자생이불유(生而不有)’를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는 도마 2절의 내용을 충실하게 계승하였다. 단지 오히려라는 역전을 나타내는 부사를 첨가하였고 아버지하나님으로 바꾸어 초월적인 의미를 강화시켰다.

 

그 다음에 연이어 나오는 말은 결코 종말론적 맥락에서 해석되어서는 아니 된다. 여러분들을 이 3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미 22에서 충분히 해설된 예수의 말씀을 상기시켜야 한다: “너희들이 둘을 하나로 만들 때, 그리고 너희들이 속을 겉과 같이 만들고, 또 겉을 속과 같이 만들고, 또 위를 아래와 같이 만들 때, 그리고 너희가 남자와 여자를 하나된 자로 만들어 남자가 남자되지 아니 하고 여자가 여자 되지 아니 할 때, 그리고 너희가 눈 있는 자리에 눈을 만들고, 손 있는 자리에 손을 만들고, 발 있는 자리에 발을 만들고, 모습 있는 자리에 모습을 만들 때, 비로소 너희는 천국에 들어가게 되리라.”

 

예수 엄마의 자궁과 유방에 대한 축복을 아버지 말씀의 들음지킴에 대한 축복으로 바꾸었을 때, 예수는 이미 주체성의 차원을 바꾼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새로운 주체성은 분열에서 통합으로, 분화에서 미분으로, 분별적 질서에서 혼융된 카오스의 하나됨으로 복귀해야 하는 것이다. 여자라고 해서 애만 낳고, 젖만 주는 주체는, 단지 여자로서 머물 뿐이며 인간이 되질 않는다. 다시 말해서 우먼(wo-man)’일 뿐이며 우먼 이전의 (man)’이 되질 않는다. 여기 예수는 남자와 여자의 분별이 사라진 새로운 주체의 탄생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가 애기 밴 적이 없는 자궁과 젖을 먹인 적이 없는 유방이야말로 복되도다'라고 말할 날이 올 것이다.” 이 위대한 혼융의 언사를 누가는 천박한 종말론적 멘트로 써먹으면서 불임의 여인까지도 얹혀서 복이 있도다라고 해버린 것이다. 얼마나 복음서 저자들이 비맥락적천재들인가, 그리고 로기온 파편들의 무맥락적 분리와 연결을 자유롭게 감행하는 드라마 작가들인가 하는 것을 쉽게 통찰할 수가 있다. 이것은 불임여성이나 처녀들이나 애를 낳지 못해 안달하는 노처녀들에 대한 종말론적 위로의 축복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애기 밴 적이 없는 신선한 자궁과 젖을 먹인 적이 없는 싱싱한 유방이야말로 생산과 양육 이전의 혼융된 인간, 여자와 남자의 분별이 사라진 하나된 자(a single one), 모습 있는 자리에 새 모습을 지니게 된 정신적 메타모르포시스(metamorphosis)의 인간, 나라에 들어가는 그 인간의 상징인 것이다. 아이덴티티의 근원적 변화가 없이 우리는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여기 여자와 남자의 분별이 사라진 새로운 주체라는 말은 매우 신화적으로 들릴 수도 있으나 모든 금욕주의(asceticism)의 근원에는 이러한 여성성과 남성성의 초탈이라는 문제가 가장 구체적으로 선결되어야 할 문제로서 자리잡고 있다. 또 동시에 가장 어려운 최종적 과제상황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는 수녀를 여자로 바라봐서는 아니 되며, 스님을 남자로 바라봐서는 아니 된다. 여자와 남자는 많다. 왜 하필 수녀를 여자로서, 스님을 남자로서 바라보려고 애쓰는가? 여기 제79장의 사상에는 암암리 여성 수도승의 가능성이 암시되어 있다. 도마복음은 여자와 남자의 근원적 차별을 두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매우 21세기적 사유를 지니고 있다. 여성은 여성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금욕적 수행을 통하여 여성 남성의 분별이 사라진 새로운 몸으로 재건되어야 하는 것이다(Th. 114). 이러한 도마의 로기온사상이 초기기독교 여성 수도원의 형성을 가능케 한 것이다. 시몬 보봐르(Simone Beauvoir, 1908~1986)가 말한 2의 성(The Second Sex)’보다도 더 근원적인 혼융의 새로운 성을 이미 제1세기에 말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도마복음서의 가치는 새로운 페미니즘의 시각과 가능성을 여는 것이다.

 

 

안토니 수도원의 수사 루메우스와 담소하는 도올. 이들은 먹는 모든 것을 자급한다. 수사들이 만든 햄은 정말 맛있었다.

예수의 엄마인 마리아가 동정녀라는 것은 단지 복음서 저자의 신화체계 속의 상징적 표현에 불과한 것이었다. 동정녀 마리아의 이야기는 제1차 자료인 마가복음이나 제4복음서인 요한복음에는 나오지 않는다. 초대교회인들의 인식체계 속의 마리아는 아기 예수에게 젖을 주는 평범한 엄마였다. 동정녀가 아니라 호르몬이 분비되는 임신 여성이었을 뿐이다. 예수는 한 손으로 젖을 열심히 빨고 있고, 한 손으로는 젖을 몽실몽실 주무르고 있다. 마리아도 예수에게 젖을 주기 위해 두 손으로 풍만한 유방을 떠받치고 있다. 이 그림양식은 피카소의 그림처럼 매우 큐비스틱하다. [사진=임진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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