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사람들은 애매한 말을 쓰면서 소통한다
‘커뮤니케이션이란 내 생각을 100%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것’이라 정의했을 때, 문제가 되는 부분이 두 가지가 있다.
▲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이야기로 본격적인 주제로 들어가고 있는 동섭쌤.
‘사회의 언어’를 ‘과학의 언어’로 바꾸기
첫째는 ‘내 생각’이 무언지 확실히 알고 있다 할지라도, 그게 상대방에게 100% 오해의 소지나, 이해의 여지없이 전달될 순 없다는 것이다.
수학 공식처럼 단순화시켜 모두가 약속되어 있는 경우엔, 누가 봐도 하나의 해석만 가능하다. 그러니 이런 경우 정답과 오답으로 확실히 구분되기에 매우 명료해 보인다. 이와 같이 정답에 익숙한 과학자들은 사회에서 갈등이 일어나는 이유를 ‘사람들이 완벽한 표현을 쓰기보다 애매모호한 표현을 써서 해석의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하여, 그런 언어를 문제가 많은 언어로 취급한다.
과학의 언어는 모든 문맥을 초월해서 변하지 않는 의미를 갖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과학은 보편성을 주장할 수 없다. 그런데 이것이 물리학과 화학 같은 자연과학의 경우라면 언어 같은 건 처음부터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그 분야에서 나름 ‘엄밀하게’ 정의된 말을 만들어 내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사회학의 경우 그렇게 할 수 없는 사정이 있다. 사회학의 연구 대상영역은 일단은 일상 언어에 의해서 분절되고 구획 지워진 사람들의 일상적 행위의 다발이기 때문이다.
-H. Garfinkel
‘과학의 언어’란 진리를 주장하는 언어로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받아들이는 언어이며, ‘사회의 언어’는 일리(‘진리眞理-무리無理-일리一理’에 대한 이야기는 차후 후기에 나옴)를 주장하는 언어로 사람에 따라, 환경에 따라 전혀 다르게 받아들이는 언어다. 그러니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나 완벽한 의사소통(100%를 전달하는 것과 같은)을 원하는 사람들은 ‘사회의 언어’를 ‘과학의 언어’로 바꾸려 애쓴다.
▲ 2014년 IDEC 때 통역기를 낀 아이들. 친구가 "생각을 전해주는 기계가 발명되면 소통은 잘 될거야"라는 말을 듣고 의문을 제기한 적이 있다.
커뮤니케이션에서 ‘과학의 언어’가 불가능한 이유
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쓰는 말들은 절대로 ‘과학의 언어’가 될 수 없다. 상황에 따라, 뉘앙스에 따라, 높낮이에 따라 같은 말도 완전히 다른 말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메러비안 법칙Law of Mehrabian’에선 말의 내용은 7% 밖에 차지하지 않지만 언어적 요소(말투 38%)와 비언어적 요소(표정 30%, 태도 20%, 몸짓 5%)는 무려 93%나 차지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건 말이란 단순히 단어의 조합이나 내용의 전달만이 아닌, 복합적이며 심리적인 부분까지 모두 포괄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그런 부분들이 오히려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러니 이 말을 그대로 확장해서 생각해보면, 의사소통을 할 때 굳이 단어를 쓰지 않더라도 충분히 가능하다고도 할 수 있다. 갓난아기의 우는 모습을 보면서도, 어머니는 아기가 원하는 것을 척척 아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 메러비안 법칙은 의사소통이 여러 경로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학교에서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아이들이 아침에 학교에 등교하고 나면 수업이 시작될 때까지는 자유시간을 갖는다. 어제 못 다한 이야기를 친구들과 나누거나,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거나, 부족한 잠을 자기도 한다. 이때 한참 수다를 떨던 아이가 갑자기 할 말이 떨어졌는지 나를 뻔히 쳐다보며 “건빵쌤, 참 잘 생겼어요”라고 뜬금없는 말을 한다. 이 말은 내용으로만 보았을 땐 당연히 기분 좋은 말이다. 하지만 그 안엔 ‘대화할 주제가 떨어져 심심하니, 건빵쌤이나 놀리자’라는 생각이 숨어 있다. 이처럼 칭찬과 놀림은 성격 자체가 180도 다르지만, 같은 말에 교묘하게 숨겨 놓고서 아닌 척 놀리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사람이 하는 말은 단순히 내용만으로 이해하기보다 여러 상황들을 고려하고 말하는 대상의 태도까지 고려하여 재해석해야만 한다. 그래서 이때 나도 “맞아~ 내가 원래 한 미모하지~”라고 장난스럽게 맞받아쳐줬다.
▲ 내가 원래 한 미모한단다~
한자에도 정반대의 의미가 동시에 담겨 있다
이런 예는 한자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한자는 단순히 복잡스럽기만 한 문자가 아니다. 한자는 주술적인 의미(시라카와 시즈카白川靜 선생이 『주술의 사상』)와 그 시대의 사회상이 반영되어 있는 ‘역사가 담긴 글자’라 표현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하나의 한자에 무수히 많은 뜻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정반대되는 의미까지 지니고 있게 된 것이다.
‘난신亂臣’이란 한자어가 있다. 이 단어가 무슨 뜻인지 아는가? 우리가 자주 쓰는 ‘난신적자亂臣賊子’라는 말을 생각해보면, 그렇게 어렵지 않게 해석될 것이다. 이 단어는 ‘임금을 배신한 신하와 부모를 저버린 자식’이란 뜻으로 매우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亂’에는 ‘어지럽히다’, ‘거칠다’와 같은 부정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렇다면 ‘亂臣’이란 단어가 나올 때마다 부정적인 의미로만 해석하면 되는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논어』라는 책을 읽다 보면 완전히 반대되는 뜻으로 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다스리는 신하 열 명이 있다(亂臣十人. 「泰伯」 20).”고 쓰여 있으며, 주註(원문을 풀이해놓은 글)에는 ‘亂은 다스린다로 풀이해야 한다(亂, 治也)’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어지럽다’, ‘흐트러져 있다’라는 표현으로 쓰이던 한자가 ‘다스린다’, ‘가지런히 하다’와 같이 180도 다른 의미로 쓰이는 것이다. 그러니 이 경우에도 맥락에 따라 긍정으로 해석할 것인지, 부정으로 해석할 것인지를 정해야 한다. 이와 유사한 경우로는 ‘말이을이而’라는 한자가 있는데, 이 글자엔 영어의 ‘and’와 ‘but’의 뜻이 동시에 들어 있어서 맥락에 따라 해석해야 한다.
이처럼 글자든 언어든 하늘에서 뚝하고 떨어진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살아가는 중에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니 애초에 ‘과학의 언어’란 환상에서나 있을 뿐 현실에선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내 생각을 100% 전한다’는 말은 말도 안 된다.
▲ 하나라 수도인 은허에서 점을 친 기록물인 갑골이 나오면서, 한자의 연구는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됐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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