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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강해, 『금강경』에 대하여 - 6. 명심포니 본문

고전/불경

금강경 강해, 『금강경』에 대하여 - 6. 명심포니

건방진방랑자 2022. 6. 15.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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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명심포니

 

 

회고컨대, 푸릇푸릇한 청춘의 시기에, 지적인 갈구에 영혼의 불길이 세차게 작열하고 있었던 그 시기에 내가 반야심경을 포()하고, 금강경을 폄()한 것은 실로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금강경반야심경은 그 성립시기가 약 3세기 정도(정확한 시기를 추정키는 어렵지만)의 세월을 격한다. 비록 반야심경금강경에 비해 분량이 극소한 것이지만, 그 내용은 금강경보다 훨씬 더 복잡한 개념과 논리적 결구로 이루어져 있다. 금강경은 원시불교의 아주 소박한 수뜨라의 형태, 여시아문(如是我聞)’으로 시작하여 환희봉행(歡喜奉行)’으로 끝나는 전형적인, 소박한 붓다설법의 기술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반야심경은 성격이 전혀 다르다. 반야심경은 이미 이러한 초기 대중운동이 당대의 최고의 식자들에게 소화되면서 집필되기 시작한 모든 철학적 논서(論書)의 개념들을 소화하고, 그것을 압축하여 놓은, 실생활적 설법이 아닌 철학적 논설이다. 따라서 반야심경의 진정한 이해는 용수(龍樹)중론(中論)서와 같은 삼론(三論)의 논지라든가 반야경계열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공사상에 대한 역사적이고 개념적인 인식의 전제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반야심경금강경에서 표방하고 있는 사상내용의 4세기 동안의 개념적이고 논리적인 전개를 압축해놓은 것이라고 한다면, 금강경반야심경의 모든 가능성을 포섭하고 있는 비개념적ㆍ비논리적 배태(胚胎)와도 같은 것이다.

 

예를 들면, 반야심경하면 우리는 그 유명한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하는 공사상의 문구를 떠올리고,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不垢不淨), 부증불감(不增不減)’하는 팔불중도(八不中道)의 문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재미있게도 금강경에는 (, śūnya)’이라는 글자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금강경은 반야경전의 대표경전임에도 불구하고, ‘반야사상=()사상이라는 일반적 도식이 성립하기 이전의 초기경전인 것이다. 그리고 금강경원문에는 소승(小乘)’ ‘대승(大乘)’이라는 표현도 나오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표방하는 사상운동을, ‘소승(小乘)’에 대한 대승(大乘)’이라고 개념적으로 규정 짓는 역사적 의식이 형성되기 이전에 성립한 경전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대승경전이 사용하고 있는 일체의 상투적인 개념들이 금강경에는 개념화된 형태로 등장하는 바가 없다. 금강경은 고졸(古拙)하나 참신하기 그지없고, 소략하나 세밀하기 그지없고, 밋밋하나 심오하기 이를 데 없다. 개념과 개념의 충돌의 벌판에서 논리의 창칼을 휘두르는 호전(好戰)의 만용을 즐기었던 동승, 도올이 그러한 고졸한 청신의 맛을 흠상하기에는 너무도 어렸던 것이다. 삼십 년의 세월이 흘러서야 겨우 그 일단의 묘미(妙味)를 씹게 될 줄이야!

 

인도고어(古語)인 산스크리트어() 데와나가리(Devanāgarī)는 장음과 단음의 주기적인 배열, 우리말에서 보기 어려운 복자음의 중첩, 그리고 자음과 모음, 받침의 율동적인 배열, 그리고 모든 자음 뒤에 숨어있는 …… 하여튼 데와나가리를 따라가다 보면 그것은 의미를 전달하는 언어이기 전에 하나의 신적 영감을 표현하는 음악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 수뜨라)’이라고 부르는 원래의 최초의 의미는 구슬을 꿴 스트링, 코드라는 것인데, 이것은 바라문교에서 설교(說敎)의 내용을 짧은 문구로써 간결하게 압축시켜 암송에 편리하게 만든 것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최초의 의미는 ()’이라는 역사적 의미 전반에 남아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원래 산스크리트어의 교의전통은 일차적으로 써서 보는 것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암송하여 듣는 것을 위한 것이었다. 데와나가리를 전혀 모르는 사람도 우빠니샤드 전체를 정확히 암송하는 자가 많다고 한다.

 

예를 들면, 용수(龍樹, Nāgārjuna, AD 150~250년경 사람. 초기 대승불교의 대논사大論師)중론(中論)은 분명 문자로의 집필이 구전에 앞섰을 것이다. 그러나 금강경은 문자화되기 전에 구전(口傳)으로 성립했을 가능성이 크다. 다시 말해서 금강경은 보고 분석해야 할 철학서가 아니라, 듣고 즐기고 깨달아야 할 음악이요, 한 편의 시()인 것이다.

 

금강경을 잘 들여다보면, 제일품(第一品)으로부터 전체의 절반에 해당되는 제십육품(第十六品)까지가 하나의 단락을 형성하고(여시아문如是我聞 …… 과보역불가사의果報亦不可思議) 제십칠품(第十七品)으로부터 제삼십이품(第三十二品)까지가(이시수보리백불언爾時須菩提白佛言 …… 개대환희皆大歡喜, 신수봉행금강반야바라밀경信受奉行金剛般若波羅蜜經) 또 하나의큰 단락을 형성하여 전반(前半)의 주제를 후반(後半)에서 반복하고 있는 인상을 받는다. 이러한 금강경의 전반과 후반의 어구문의(語句文義)의 사동(似同)을 놓고 역사적으로 주석가들이 논의를 폈다. 그 유명한 구마라집(鳩摩羅什)의 수제자 승조(僧肇)는 전반(前半)은 중생공(衆生空)을 설()한 것이요 후반(後半)은 법공(法空)을 말한 것이라 했고, 지의(智顗)와 길장(吉藏)은 이를 중설중언(重說重言)으로 간주하고, 전반은 전회중(前會衆)을 위한 것이요 후반은 후회중(後會衆)을 위한 것이며, 또 전반은 이근(利根)을 위한 것이요 후반은 둔근(鈍根)을 위한 것이며, 또 전반은 연()을 진한 것이요 후반은 관()을 진()한 것이라 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논의가 결국 금강경이 보는 책이 아니라 듣는 음악이요 시라는 그 원초적 성격과, 그리고 문헌비평상 간파될 수 있는 구전문학 편집구도의 특이성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구차한 논설이라고 생각한다.

 

베토벤의 운명교향곡'을 잘 분석해보면, 처음에 베토벤의 멀어가는 귀를 두드리는 운명의 사자의 소리라 하는 따다다 따안~’하는 테마가 나온다. 그리고는 그 테마가 다양한 형식으로 변주되어 나타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베토벤의 운명교향곡 전체가 하나의 테마의 변주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주제와 변주라는 이러한 형식은 확대, 축소, 혼합, 세분, 생략과 부가, 반진행, 역행, 반진행의 역행 등의 다양한 형태를 취하는 것이다. 베토벤은 화성음악시대에 있어서 이러한 변주를 자유변주라는 아주 독특한 새로운 형식으로 개발하여 뛰어난 예술적인 경지를 개척했던 것이다. 주제의 각종요소를 성격적으로(음형, 화성, 리듬의 변화를 통하여) 변화시킴으로써 어떤 경우에는 본래의 주제와 전혀 다른 국면을 전개시키게 되는 것이다.

 

나는 금강경이 바로 베토벤의 운명교향곡과 같은 음악적 구성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교향곡을 들을 때, 많이 들은 사람들은 거개가 그 교향곡의 멜로디를 다 암송하고 듣는다. 마찬가지로 금강경은 현실적으로 그것을 다 암송하는 자들에게만 들리게 되어있는 명심포니 중의 명심포니인 것이다. 금강경은 외워야 한다. 금강경은 수지독송(手持讀誦)해야 한다. 금강경은 생활 속에서 느껴야 한다. 금강경은 그 향기 속에 취해 있을 때만이 그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 묘미는 곧 간결한 주제와 그 반복의 묘미인 것이다.

 

금강경은 어느 경우에도, 한 구절도 똑같이 반복되지 않는다.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조금씩 다 다르게 되어 있다. 그것은 반복이 아니라 변주다. 그리고 그러한 반복이 없으면 금강경금강경의 오묘한 맛을 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금강경은 워낙 심오하고 워낙 근본적이고 워낙 철저한 무아(無我)’의 주제를 설()하고 있기 때문에, 그 주제는 끊임없이 변주형식으로 반복되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인지될 길이 없다. 그것은 철학의 논서가 아니라 깨달음의 찬가이다. 그것은 번쇄한 개념의 나열이 아니라 득도의 환희를 불러일으키는 신의 부름이다. ~ 위대하도다! 금강의 지혜여!

 

 

 

 

인용

목차

금강경

반야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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