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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금강경 강해, 『금강경』에 대하여 - 8. 기존 주해서 본문

고전/불경

금강경 강해, 『금강경』에 대하여 - 8. 기존 주해서

건방진방랑자 2022. 6. 15.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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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기존 주해서

 

 

금강경언해는 소명태자가 분절한 라집한역본(羅什漢譯本)과 육조(六祖) 혜능(慧能)구결(口訣)이 실려있고 이 양자의 국역이 다 실려 있어, 나는 그 판본과 국역을 다 참조하였다. 불행하게도 세조언해본 금강경판본은 아주 후대에 성립한 열악한 판본이며 우리 해인사본과는 출입(出入)이 크다. 연세대학교 국문과 박사과정에 있는 장경준군(張景俊君, 도올서원 제12림 재생)금강경언해를 내가 활용할 수 있도록 일목요연하게 타이프치고 고어(古語)를 현대말로 옮겨주었다. 이 자리를 빌어 그 공로에 감사한다. 내가 금강경을 번역함에 있어 우리 옛말의 아름다운 표현이 참조될 부분이 있을 때는 그것을 살리도록 노력하겠다. 내가 참고로 한 판본은 홍문각(弘文閣) 영인본 금강경언해(金剛經諺解) (1992)이다.

 

우리나라에는 일찌기 원효(元曉)금강반야경소(金剛般若經疏)(산일散佚하여 전하지 않는다)와 같은 주석서를 남겼고 그 뒤로도 금강경에 대한 주석이 끊이지 않았으나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선초(鮮初)의 고승, 함허당(涵虛堂) 득통기화(得通己和, 1376~1433)금강경오가해설의(金剛經五家解說誼)를 든다. 여기 오가해(五家解), () 규봉종밀(圭峰宗蜜)금강경소론찬요(金剛經疏論纂要), 육조(六祖) 혜능(慧能)금강경해의(金剛經解義)(구결口訣), 양 쌍림부대사(雙林傅大士)금강경제강송(金剛經提綱頌), () 야보도천(冶父道川)금강경착어(着語)와 송(), () 예장종경(豫章宗鏡)금강경제강(金剛經提綱)을 지칭한다. 이 다섯 종의 책이 이미 중국에 단행본으로 존재하고 있었지만 이 다섯 종이 합본(合本)으로 등장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금강경오가해설의(金剛經五家解說誼)에서부터이다. ‘설의(說誼)’란 바로 이 오가해(五家解)에 대한 기화 스님의 주석이다. 설의(說誼)이전에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란 책이 기존하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으나 그것이 과연 중국에서 편찬된 것인지, 한국사람들이 그렇게 만든 것인지조차 확실치는 않다. 오가해(五家解)의 성립 자체가 기화(己和) 스님의 설의(說誼)를 위하여 편집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런데 기화(己和) 스님의 설의(說誼)’는 오직 금강경(金剛經)본문(本文)과 야보(冶父)와 종경(宗鏡)의 저술에 한정하여 주해했을 뿐, 나머지 규봉(圭峰), 육조(六祖), 부대사(傅大士)의 삼가(三家)에 대해서는 오자의 정정에 그칠 뿐 손을 대지 않았다. 이것은 기화(己和) 스님 자신의 사상적 경향과 관련이 있다. 즉 야보(冶父)와 종경(宗鏡)의 주해만이 선가적(禪家的)인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앞의 삼가(三家)는 선종적 입장을 드러내는 참고서적 가치밖에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기화(己和)금강경을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선풍(禪風)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후의 성종때 출간된 언해본인 금강경삼가해(金剛經三家解)는 야보의 송과 종경의 제강(提綱)과 기화(己和)설의(說誼)만을 따로 분리하여 국역한 것으로 우리나라의 금강경이해의 선적 취향을 잘 나타내준다고 하겠다. 나는 금강경오가해설의(金剛經五家解說誼)도 참고하였다. 우리시대의 존경스러운 석학, 고익진 선생(高翊晉 先生)의 피땀이 서려있는 동국대학교(東國大學校) 한국불교전서(韓國佛敎全書)(7第七冊)본을 썼다.

 

그런데 나는 본시 기존의 주해서들을 과히 좋아하지 않는다. 참으로 필요하지 않으면 쳐다보지 않는다. 원효(元曉) 정도나 된다면 혹 내가 심복할 것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과거 중국의 선지식이나 한국의 고승의 주해들을 쳐다보면 말장난이 심하고, 그 말장난의 이면에 그들의 심오한 뜻이 숨어있는지는 몰라도 이미 우리의 인식체계나 언어 표현과 맞지를 않아 크게 답답함을 느낄 뿐이다. 그리고 이들의 주해는 금강경산스크리트 원문과 그 인도철학ㆍ인도문화적 배경을 정확히 이해하질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 한계가 너무도 명백한 것이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금강경은 근본적으로 선풍(禪風)으로 접근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나는 내가 깨달은 바를 설()할 뿐이다. 본 강해는 나 도올의 실존적 주석이다. 나는 도올서원 제12림에서 금강경을 강의할 때 기본적으로 금강경라집역(羅什譯) 고려본과 산스크리트 원문 이외는 읽지를 않았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최근에 나온 모든 금강경해설서의 공통된 결함은 자기 자신의 이해를 빼놓고 객관적인 주석만을 달고 있다는 것이며, 따라서 본문의 해석에 있어서조차도 명료한 논리적 구조를 밝히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읽어봐도 뭔말인지 모르게만 문장을 구성해 놓고 있다는 것이다. 글 씀씀이가 아주 인색하여 금강경이 나에게 미칠 수 없는 먼 책으로 만들어 놓거나, 쓸데없는 남의 주석이나 나열해 놓거나, 그렇지 않으면 되도 않는 자기 말만 주절거려서 도무지 한문원전의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게 흐려놓고 있다는 것이다.

 

금강경은 범본(梵本)이 엄존한다. 엄밀하게 말하면, 금강경은 범본의 번역서이다. 그러나 우리가 금강경을 말할 때는 결코 범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우리에게 금강경이라는 인식을 형성해온 것은 라집(羅什)금강경(金剛經)이다. 그리고 그 의미 체계는 범본과 무관한 독자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범본의 의미체계가 라집본 금강경의 우리 이해를 돕기 위한 레퍼런스(참고서)가 될 수 있을지언정, 한문 금강경이 범본으로 환원되어야 비로소 그 정당한 의미가 드러난다는 논리는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해하려는 금강경은 일차적으로 라집(羅什)의 한역 금강경자체의 의미체계인 것이다. 그리고 그 정본(正本)은 오직 우리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는 장판이 유일한 것이다. 그것이 한문으로써 이해되어온 금강경의 절대적 기준이다. 그것의 역사적 의미의 총체를 명료하게 밝히는 작업이 금강경이해의 최초 관문이다. 그것에 준하여 타본(他本)이나 타범본(他梵本)을 비교연구함이 타당하다. 범본(梵本) 자체가 정본(定本)이 없는 상황에서(여러 이본異本이 있을 뿐이다) 어찌 본()을 밝히지 않으면서 말()의 잡화(雜華)만을 쫓을손가! 나는 라집(羅什) 한역 금강경의 한문의 정확한 의미를 나의 실존의 의미에 드러난 그대로 설할 뿐이다.

 

 

 

 

인용

목차

금강경

반야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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