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소명태자
『금강경』의 경우, 한역본으로 우리는 보통 다음의 6종을 꼽는다. 이를 시대적으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1. 후진(後秦) 구마라집(鳩摩羅什, Kumārajīva) 역(譯),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일권一卷), 402년 성립.
2. 북위(北魏) 보데류지(菩提流支, Bodhiruci) 역(譯),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일권一卷), 509년 성립.
3. 진(陳) 진체(眞諦, Paramārtha) 역(譯),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일권一卷), 562년 성립.
4. 수(隋) 급다(笈多, Dharmagupta) 역譯,
『금강능단반야바라밀경(金剛能斷般若波羅蜜經)』(일권一卷), 590년 성립.
5. 당(唐) 현장(玄奘) 역(譯), 『대반야바라밀다경(大般若波羅蜜多經)』 「제구능단금강분(第九能斷金剛分)」(일권一卷), 660~663년 성립.
6. 당(唐) 의정(義淨) 역(譯),
『불설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佛說能斷金剛般若波羅蜜多經)』(일권一卷), 703년 성립.
그런데 이 많은 판본 중에서(모두 내용이 조금씩 다르고 저본이 된 산스크리트 원어 텍스트 자체도 일치하지 않는다), 우리는 어떤 것을 과연 『금강경』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의 선택이 아닌 역사의 선택이었다.
우리가 보통 『금강경』이라 부르는 것은 현장역본(玄奘譯本)을 저본으로 삼지 아니한다. 역사적으로 『금강경』으로 유통되어 온 것은 바로 최고역(最古譯)이라 할 수 있는 꾸마라지바(鳩摩羅什)의 역본이다. 다시 말해서 신역이 아니라 구역인 것이다. 신역이 구역의 권위에 눌렸기 때문인가? 그렇지는 않다. 평심이론(平心而論)컨대 신역이 구역의 아름다움과 고결함을 따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대중의 선택이었다. 현재 다행스럽게도, 상기(上記)의 6종(六種)번역이 모두 말끔하게 정돈되어 『대정(大正)대장경』에 실려있다. 현장의 번역은 제7책, 980~985쪽에 실려있고, 나머지 5개의 번역은 제8책, 748~775쪽에 순서대로 실려있어서 아주 손쉽게 여섯 개의 텍스트를 비교검토 해볼 수 있다【보데류지(菩提流支, ?~527)의 역본(譯本)의 경우는 이본(異本) 2개가 실려 있다)】 이 6본(六本)의 텍스트의 본격적인 비교연구 또한 우리 불교학계의 주요한 연구테마가 될 것이다.
우리가 흔히 『금강경』이라고 부르는 텍스트는 라집(羅什)의 역본,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經)』을 양나라의 소명태자(昭明太子)가 삼십이분(三十二分)으로 분절(分節)하여, 각 분에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 분절이 반드시 학구적으로 올바른 나눔이라 말할 수 없는 상황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텍스트를 일목요연하게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줄 뿐 아니라, 그 이름 또한 모두 그 분(分)의 내용을 개관하고 있는 의미 있는 명칭으로 대체적으로 적절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이 소명태자(昭明太子, 501~531)가 누구인 줄 아는가? 그가 바로 『벽암록(碧巖錄)』 제1칙(第一則)의 주인공, 달마(達磨)와 초면(初面)하고 ‘몰라’(불식不識)의 일화를 남긴 그 유명한 대보살(大菩薩) 황제, 남조불교(南朝佛敎)의 극성(極盛)시대를 연출한 양무제(梁武帝, 464~549)의 장자(長子)였다. 명(名)은 소통(蕭統), 자는 덕시(德施), 태어난 다음해 바로 황태자(皇太子)가 되었고, 인품이 총명하고 인애롭고 호학(好學)의 일도(一道)를 걸었다. 그의 서재의 장서 3만(萬)! 유효작(劉孝綽) 등의 문학(文學)의 사(士)를 자택에 불러들여 같이 편찬한 그 유명한 『문선(文選)』은 만고(萬古)의 명저(名著)로 남아있다. 바로 그 소명태자(昭明太子)가 라집(羅什)의 『금강경(金剛經)』을 오늘의 삼십이분(三十二分) 텍스트로 만든 것이다. 그 다섯 자로 이루어진 분의 이름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법회인유분(法會因由分) | 제일(第一) |
선현기청분(善現起請分) | 제이(第二) |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 | 제삼(第三) |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 | 제사(第四) |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 | 제오(第五) |
정신희유분(正信希有分) | 제육(第六) |
무득무설분(無得無說分) | 제칠(第七) |
의법출생분(依法出生分) | 제팔(第八) |
일상무상분(一相無相分) | 제구(第九) |
장엄정토분(莊嚴淨土分) | 제십(第十) |
무위복승분(無爲福勝分) | 제십일(第十一) |
존중정교분(尊重正敎分) | 제십이(第十二) |
여법수지분(如法受持分) | 제십삼(第十三) |
리상적멸분(離相寂滅分) | 제십사(第十四) |
지경공덕분(持經功德分) | 제십오(第十五) |
능정업장분(能淨業障分) | 제십육(第十六) |
구경무아분(究竟無我分) | 제십칠(第十七) |
일체동관분(一體同觀分) | 제십팔(第十八) |
법계통화분(法界通化分) | 제십구(第十九) |
리색리상분(離色離相分) | 제이십(第二十) |
비설소설분(非說所說分) | 제이십일(第二十一) |
무법가득분(無法可得分) | 제이십이(第二十二) |
정심행선분(淨心行善分) | 제이십삼(第二十三) |
복지무비분(福智無比分) | 제이십사(第二十四) |
화무소화분(化無所化分) | 제이십오(第二十五) |
법신비상분(法身非相分) | 제이십육(第二十六) |
무단무멸분(無斷無滅分) | 제이십칠(第二十七) |
불수불탐분(不受不貪分) | 제이십팔(第二十八) |
위의적정분(威儀寂靜分) | 제이십구(第二十九) |
일합리상분(一合離相分) | 제삼십(第三十) |
지견불생분(知見不生分) | 제삼십일(第三十一) |
응화비진분(應化非眞分) | 제삼십이(第三十二) |
이 분명(分名)만을 일별하여도 소명태자가 얼마나 불교의 이치를 깊게 공독(攻讀)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때로는 이러한 분절(分節)이나 제명(題名)이 우리의 이해를 그르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아울러 병기(幷記)해둔다. 그리고 보통 제일분(第一分)을 서분(序分)이라 하고, 제이분(第二分)부터 제삼십일분(第三十一分)까지를 정종분(正宗分)이라 하고, 제삼십이분(第三十二分)을 유통분(流通分)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러한 규정은 『금강경』의 내적 흐름을 파악하지 못한 자들이 형식적으로 희론(戱論)하는데 불과하다. 『금강경』은 그러한 식의 서(序)- 정종(正宗)- 유통(流通)의 구조로 되어 있지 않다.
한 가지 텍스트 상(上)의 문제로 특기해 둘 것은 구마라집(鳩摩羅什) 텍스트에서 제이십일분(第二十一分)의 후반부분(‘이시혜명수보리백불언爾時慧命須菩提白佛言’부터 ‘시명중생是名衆生’까지의 62자)은 라집(羅什)텍스트에 부재했던 것으로 보데류지(菩提流支) 텍스트에서 빌려와 보완(補完)한 것이다【당(唐) 장경(長慶) 2년에 영유법사(靈幽法師)가 보입(補入)한 것】. 현재의 『대정(大正)』 및 『고려대장경』 라집(羅什) 텍스트는 보완(補完)된 상태로 실려 있다. 그 부분을 잘 들여다 보면 그것은 분명히 라집(羅什)의 역본(譯本)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선택한 용어와 문장스타일이 크게 다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이 부분에 대해 그릇된 주석을 달고 있는 상황도 쉽게 목격된다. 후학들의 주의를 요청한다.
내가 여기서 강해하려는 『금강경』은 물론 라집(羅什)이 역(譯)한 『금강경』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라집(羅什)의 『금강경』의 판본이 또 수없이 많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라집(羅什)의 『금강경』의 가장 정본(正本)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우리나라 해인사 장경각에 보존되어 있는 『고려대장경판본』인 것이다. 그리고 사계의 가장 정밀한 판본으로 통용되고 있는 일본의 『대정대장경(大正大藏經)』도 바로 우리의 『고려대장경』을 저본으로 한 것이다. 그런데 통탄스러운 것은 조선조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모든 『금강경』이 이 정본(正本)인 우리 『고려대장경』본을 거의 하나도 사용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나의 『금강경』 강해는 『고려대장경판본』을 최초로 사용한 우리말 『금강경』이라는데 무한한 자부감을 느낀다. 『고려』본을 원칙으로 하고 『대정(大正)』본과 비교해가면서 나의 텍스트를 정확하게 구성할 것이다. 그리고 이 텍스트에 소명태자(昭明太子)의 분절(分節)을 따른다. 콘체도 이 분절(分節)을 썼다. 이 『고려』본 라집(羅什) 텍스트를 주축으로, 가능한 모든 텍스트를 비교 연구하여 현재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 한국사람들에게 가장 의미있는 방식으로 나의 역문(譯文)의 문의를 창조해나갈 것이다.
『고려대장경이라 하는 것은, 현종때 새긴 초조대장경판(1011~1087)과 제2차 의천대장경판(1092~1100)이 1232년(고종19) 몽고군의 침입으로 불타자, 당시의 집권자인 최우(崔瑀) 등을 중심으로 고종23년(1236) 대장도감(大藏都監)을 설치하여 16년 만에 재조(再雕), 완성한 것이다(고종38년, 1251년에 완성). 『고려대장경』은 정확하게 말하면 ‘고려제국대장도감판(高麗帝國大藏都監版)’이라 해야 옳다. 우리의 『금강경』은 1238년(무술戊戌)에 조조(彫造)된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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