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군주들의 인간적 고뇌
『금강경』은 사람을 취하게 만든다. 천하의 명주보다도 더 사람을 취하게 만든다. 소명태자(昭明太子)가 이에 취해 그 유명한 분절(分節)을 창조했다면, 나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이 금강경』의 향기에 취했던 자로서, 두 얼굴의 사나이, 총명과 예지로 번뜩이는가 하면 탐욕과 음험한 살육의 화신인 사나이, 경세치용의 명군인가 하면 조선의 역사를 부도덕의 나락으로 떨어뜨린 사나이, 수양대군(首陽大君) 세조(世祖)를 서슴치 않고 들겠다.
우리나라 조선왕조의 초기의 사상적 형세는 실로 불교와 유교라는 양대(兩大) 의식형태의 충돌로 특징지워진다. 조선왕조가, 교과서에 나오듯이 1392년 7월 17일 무장(武將) 이성계(李成桂)가 왕(王)으로 추대되는 사건으로 성립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수 집단들 사이에서 일어난 권력의 변화에 불과할 뿐이요, 역사의 장이 한날 한시에 바뀌는 예는 없다. 박정희의 등극으로 하루아침에 우리나라가 경상도 왕국이 된 것도 아니요, 김대중의 취임 그날로 우리나라가 전라도 왕국이 된 것도 아니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하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박정희의 치세기간 동안에 사회각계각층에 경상도 사람이 점진적으로 득세한 것이 어김없는 사실이라면, 그에 안티테제를 걸고 나온 김대중의 치세기간에 경상도 일변도의 인재포진에서 전라도 사람들의 득세가 눈에 띄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간의 변화는 점진적일 뿐 아니라 많은 충돌과 타협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사태라는 것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조선왕조 초기의 불교와 유교의 대립형국은 이와 비슷한 것이다. 유교는 새로운 조선왕조의 이념기반이었다. 그리고 유교적 이념을 구현하고자 하는 유신(儒臣)들은 고려왕조에서는 권력층에서 비교적 소외되었던 신진세력이었다.
김대중정권의 성립과 동시에 전라도사람들의 입지가 싹 바뀌듯이, 이성계(李成桂) 정권의 성립과 동시에 유신들의 입지가 싹 바뀌었다. 조선왕조에 들어오면, 유교는 유신들을 중심으로 하는 엘리트 관료주의 철학이 되어버리고, 구왕조의 기반이었던 불교는 기묘하게도 역으로 민중사상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유교의 문치주의의 극성(極盛)을 과시하는 세종조의 찬란한 치세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그 만년에 세종이 불교에 기울어 불교식(佛敎式) 제례(祭禮)를 거행하고, 효령대군(孝寧大君)의 한강수륙재(漢江水陸齋)를 지원하고, 흥천사(興天寺)를 중수하고, 불경의 금서와 전경법회(轉經法會)를 강행하고, 세종(世宗) 30년에는 급기야 내불당(內佛堂)을 건립하였던 것은 그 나름대로 피치못할 역사의 아이러니를 잘 말해주고 있다. 광평(廣平)ㆍ평원대군(平原大君)의 두 아들이 죽고, 중궁(中宮) 소헌왕후(昭憲王后)를 연이어 잃고, 자신의 건강이 악화되는 인간적 연약함을 틈타, 유교적 합리주의(合理主義) 정신의 한계가 노출되었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세종의 호불(好佛)은 인간적 차원 이상의 조선왕조 초기 권력구조 자체의 구조적 갈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세종 자신이 집현전을 활성화시켰고 또 집현전을 통해 길러진 인재들의 활용으로 조선왕조의 유교적 기반을 공고하게 한 것은 사실이지만, 말년에 이를수록 집현전의 비대와 그 성격의 언론ㆍ정치기관으로의 변모가 왕권을 고립시키는 결과를 자초하게 되었다. 집현전의 권위가 팽대됨에 따라 원로학자들은 『주례(周禮)』적인 관념론이나 막연한 모화(慕華)주의에 빠져 현실감각을 상실해갔고, 정치적으로도 그들은 자연히 국왕전제(國王國制)체제보다는 유신권문(儒臣權門)에 의한 귀족정치를 원하게 되었다. 이러한 왕권(王權)고립, 특히 엘리티즘 속에 경색되어가는 왕권의 민중으로부터의 소외감을 막기 위한 세종(世宗) 말년의 두 가지 장치가 있었으니, 그 하나가 바로 ‘한글창제’인 것이요, 그 하나가 ‘호불(好佛)’인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지배권력을 대변하였던 불교가, 조선조에 내려오면, 민중의 갈망을 대변하는 형태로 바뀌는 것 또한 역사의 뉴전(扭轉)이다. 요즈음 현세적 권력과 결탁하는 대부분의 엘리트들이 기독교세에 직접ㆍ간접으로 가담하고 민중들은 불교에 노출되는 현상과, 당대의 유교-불교의 관계는 상응성이 있다.
재미있는 것은 바로 한글창제라는 우리민족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 할 수 있는 사건이, 집현전학사들의 외면과 반대 속에 진행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유교를 견제하는 의도에서 나온 호불(好佛) 정책과 맞물려 있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훈민정음이 창제된 후에 『금강경언해』 등의 불경국역사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는 사실,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이니 『석보상절(釋譜詳節)』이니 하는 우리말로 이루어진 위대한 불교서사시가 창작되었다는 사실, 또 인류역사에 유례를 보기 힘들 정도로 아름다운 우리민중 자신의 불교음악인 『영산회상곡(靈山會上)』이 작곡되었다는 사실 등등은, 억불숭유비(抑佛崇儒) 정책을 추구하는 유교이념국가인 조선에서 왜 언문과 불교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등장했는가에 대한 절묘한 역사의 틈새를 엿보게 하는 것이다.
세조는 원래 세종의 아들 중에서는 가장 영민하고 왕위에 걸맞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역사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렇게 흘러가지 않은 역사를 무단(武斷)으로 되돌린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세조(世祖)의 실책이다. 세조의 치세는 어느 왕 못지않은 훌륭한 면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러나 유교정치의 생명은 명분이요 도덕이다. 세조의 쿠데타는 이 땅의 많은 사림들을 변절자로 만들었고 이 땅의 지식의 도덕적 정통성을 크게 흔들어 놓았다. 세조의 업은 이방원이 지어놓은 업의 연속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방원의 악업은 그 나름대로 대의가 전제되어 있었고 역사적 필연성이 있었다. 그러나 세조의 악업은 개인의 탐욕에 불과했다.
세조는 이미 수양대군시절부터 세종(世宗)이 내불당(內佛堂)을 건립하는 일을 주도적으로 도왔고, 승려 신미(信眉)의 아우인 김수온(金守溫)과 함께 불서(佛書)의 번역을 감장(監掌)했다. 그가 군주가 된 후에는 그는 대호불왕(大護佛王)이 되었다. 그의 행적은 바로 『금강경(金剛經)』이 설하는 진리에 모두 위배되는 업(業)의 삶이다. 그러나 그는 『금강경』에 몰입했다. 오늘 우리에게 전해내려오고 있는 『금강경언해』는 바로 세조가 직접 한글로 토(吐)를 단 것이다. 『세조실록(世祖實錄)』 권32(卷三十二), 10년갑신 2월8일(十年甲申二月八日, 신묘辛卯) 조(條)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보인다.
공조판서(工曹判書) 김수온(金守溫), 인순부윤(仁順府尹, 인순부는 조선 초기 동궁에 딸렸던 관아) 한계희(韓繼禧), 도승지(都承旨) 노사신(盧思愼) 등에게 명하여 『금강경(金剛經)』을 역(譯)하게 하였다.
국역은 주로 한계희가 한 것이라 하고, 효령대군(孝寧大君)과 판교종사(判敎宗事)인 해초(海超) 등의 승려에게 교정케 하였다 한다. 애사(哀史)의 주인공 단종(端宗), 사육신 등, 세조의 잔악한 칼날에 베임을 당한 수없는 원혼의 피맺힌 한을 압구정 앞을 흐르는 도도한 한강물에 씻어보내기라도 할 셈이었나? 갠지스강의 모래알만큼의 칠보공덕의 무상함을 깨닫기라도 했단 말인가? 자신을 질타하고 있는 『금강경』의 무아상(無我相)의 명령에 무릎을 꿇을 줄 알았던 과거 군주들의 인간적 고뇌와 정신적 깊이를 다시 한번 새겨 본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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