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그리고 비
01년 10월 10일(수) 계속 비
엊그제 전광판에 ‘내일의 날씨, 전국적 비’라고 써 있는 걸 보면서, 난 굳이 믿으려 하지 않았다. 아니 전혀 믿기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이 찬란한 태양빛이 내리쬐다가 저녁엔 달빛과 별빛들이 온 하늘을 새하얗게 수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왠지 다른 때와는 달리 그 예보가 불길한 전조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왠지 불길함이나 여러 증조들이 보일 때는 그게 현실로 다가오든, 그렇지 않든 조심하라고 누가 그랬던가! 암튼 그건 현실이었고 거부하거나 피할 수 없이 직면해야 하는 현실이었다.
어제 오후는 1소초 작업지원과 사격으로 인해 꽤나 바빴다. 바쁜 건 그래도 좋다. 하지만 사격하러 이동하는 사이에 비가 온 것이다. 조금씩 비는 그렇게 내리기 시작했다. 선연한 방울방울의 비관주의를 형성하면서 예전의 암울한 과거와 현재의 암담한 현실을 일거에 나의 머릿속에 부각시키는 것이었다. 그런 가운데 신임 중대장의 명령에 따라 사격을 실시하게 되었다. ‘비 오는 날에도 전쟁은 일어난다’는 게 중대장의 지론이었고 거기에 따라 우린 즉각 조치적인 행동과 함께 사격을 하게 되었다. 빗속에서 하는 사격이 재밌을 리는 만무했고 도리어 짜증 나기만 했다. 거기다 난 양각대까지 놓고서 1소대에 갔다가 거기서 바로 3소대에 간 것이기 때문에 K3 사격을 안 하겠거니 했는데 중대장님의 지시로 사격을 해야 했다. 그것도 60발을 쏘는 거였다. 총을 워낙 안 닦은 터라 잘 나갈까도 걱정스러웠는데 이상하게도 잘 나가더라. 그렇지만 사격에서 형성되는 현실 비관주의는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사격을 그렇게 마치고 나서 비를 흠뻑 맞으며 소대에 복귀했다.
그렇게 전원투입의 시간이 다가왔다. 여전히 비는 온 대지를 삼키려는 듯 쏟아지고 있었다. 그 빗속에서 오랜만에, 아주 오랜만에 비가 나에게 있어서 또 하나의 방해물로 작용할 수 있음을 느꼈다. 저번 8월초의 그 암울함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전반야이다. 오랜만에 전반야이기 때문에 행복했다. 거기다가 비도 억수로 오기 때문에 차라리 빨리 근무를 서고 쉴 수 있음이 좋을 뿐이다. 영환이와 나는 퍼붓던 폭우를 뚫고 여섯 타임의 근무제에 적응하려 했다. 이미 전투화는 다 젖었고 전투복은 척척하고 눅눅했기 때문에 어여 소대에 북귀해서 자고플 뿐이었다. 기어코 시간이 흘러 철수를 했고 빗소리의 멜로디(왠지 나에게 영향을 주지 못하기에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진다. 이처럼 관조적인 자세를 자연을 대하는 인간의 이기적인 표현력이리라)가 그저 듣기 좋았다. 기상이란 소리와 함께 비극적인 현실에 마주쳤지만 후반야 대기자들에게 밖에선 비가 안 온다는 희망의 소릴 듣고 우의도 챙기지 않은 채 투입했다. 이슬비가 내렸고 철수 시간에 맞춰 조금씩 비가 더 맹렬히 퍼붓기 시작했다. 난 쾌재를 불렀다. 비가 오는 날엔 작업을 했던 선례가 없으므로 당연히 오늘도 오전 취침을 할 수 있으려니 했으니 말이다.
수요일이라 군대리아가 나왔고 그걸 먹고 어련히 자겠거니 하는 마음으로 편한 마음에 소대로 돌아왔다. 하지만 거기서 난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직접 들어야만 했다. 비극이랄까. ‘후반야’는 50분 내로 잘 준비하고 전반야는 작업 준비를 하도록 하라는 부소대장님의 말이다. 잔인하다는 생각이 내 뇌리에 깊이 각인되었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작업 지시는 신임 중대장님이 내린 거란다. 왜 그러는 걸까? 비가 그렇게 쏟아지는데 교통호상의 물을 퍼내는 작업과 전술도로상의 평탄화와 배수로 작업과 사다리 보수 작업 등을 나누어서 하게 되었는데, 사실 비를 피할 수 있다는 강점이 있었으나 난 그 작업엔 제외되고 세 번째 작업에 동참하게 되었다. 난 빗속에서의 작업이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의 하의를 입지 않았다. 거의 모두 다 그렇게 투입했고 날씨는 이상하게 추워서 내복으로 중무장을 했다. 그렇게 빗속에서 작업을 하다 보니 바지는 다 젖고 내복까지 다 젖어서 다리를 쫙 들러 붙었다. 작업은 사실 하나도 안 힘들었다. 하지만 그 추위가 장난이 아니었다. 온 몸을 감싸는 물기가 가득한 옷자락들, 그리고 그 속을 파고드는 한가들 때문에 가만히 있으려 해도 도저히 몸이 떨려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열기를 발산하기 위해 몸을 떨어야만 했고 조금이라도 더 열심히 작업하려 했다. 하지만 그 일시적인 따스해짐은 날 오히려 더 춥게 만들었으므로 웬만하면 가만히 있으려 했다. 진짜 인내의 극치를 달리는 시간이었다. 추위의 극치였고 내 인내심의 극치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쉬이 끝나지 않았던 작업은 오히려 짜증으로 이어졌고, 물바다를 맨발로 걷는 것만 같았던 척척하여 찝찝했던 전투화는 한 걸음, 한 걸음을 천근만근처럼 무겁게만 느껴지도록 만들었다. 정말 지금까지 느꼈던 것보다 더 심한 극악의 시간이었다. 거의 폭발하기 일보 직전에 작업 철수를 해서 복귀하여 따스한 밥을 먹고 따스한 온기로 가득 찬 내무실에 들어와 새 옷으로 갈아입고 침낭 안으로 들어간 건 이루 말할 수 없는 포근함이었고 행복이었다. 참고 이겨낸 뒤에만 맛볼 수 있었던 달콤함이었다. 고통은 쓰나 그 열매는 달다는 말이 새삼스레 몸소 느껴지는 날이었다.
꿀꿀한 날씨 속에 오랜만에 내렸던 비는 우리들의 기억 속에 절대 잊을 수 없는 선명한 추억만을 남긴 채 그렇게 물러가고 있었다. 비는 우리들의 기억 속에 암울ㆍ암담의 기억일 테지만, 그리고 비는 우리들의 기억에 인간의 인내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과 군 생활의 잊지 못할 진실한 추억일 것이다. 비 그건 군 생활과 떼려야 뗄 수 없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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