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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수양록, 일병 - 01.12.31(월) 제설 중 맞이한 새해 본문

연재/여행 속에 답이 있다

군대 수양록, 일병 - 01.12.31(월) 제설 중 맞이한 새해

건방진방랑자 2022. 6. 30.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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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설 중 맞이한 새해

 

011231()~11() 대설 후 맑음

 

 

그렇게 안 갈 것만 같던 2001년과 그렇게 오지 않을 것만 같던 2002년 새해가 드디어 오고야 말았다. 진짜 다사다난했던 2001년이 그렇게 가고야만 것이다. 연말이면 으레 교회에 가서 올라이트를 하고 새벽의 해가 뜰 때쯤 되어선 학산에 진규와 함께 올라 일출의 기쁨을 느꼈었는데 이젠 그럴 수 없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인 것은 후반야였기에 묵은해에서 새해로 접어드는 기쁨을 그나마 만끽할 수 있다는 것 정도이다. 연말인 오늘을 난 그저 평일처럼 맞이하고 있었다. 하지만 낮에 기상함과 동시에 밤엔 무지하게 많은 눈이 내리는 것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회였다면 기쁨의 한 획이었겠지만 적어도 여긴 그렇지 않다. 화려한 새해를 위한 연말의 준비식이라고나 할까! 혹 시베리아 벌판에 나온 것마냥 혹한의 칼바람과 함께 눈발이 휘날리며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엄청난 눈들을 보면서 눈앞이 캄캄해지는 걸 느꼈다. 그건 지금까진 볼 수 없던 그런 양의 눈이었을뿐더러 여전히 빗발치듯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랬었던 걸 거다. 조금의 눈만 와도 우리의 삶은 그렇게 버겁고도 힘들어지는 데 그걸 초월해서 저 정도로 많이 내리면 얼마나 더한 고통이 있을까나 하는 현실을 직면하고자 하는 사고관이 그렇게 나의 뇌리 속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사회에선 그저 현실을 회피하는 가치관이나 현실을 방관하는 가치관으로 현실의 버거움이나 삶의 혼란함이 나에게 다가올 때 별 걱정 없이 지냈기 때문에 군은 이러한 현실이 꽤나 힘겹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렇게 내리던 눈은 쉬이 그칠 생각을 안 했다. 치우고 또 치웠지만 뒤를 돌아보면 또 그만큼 쌓여 있으니 정말로 미칠 지경이었다. 그건 혹 그 여름 제초작업의 답답함을 떠올리게 하는 악몽일 뿐이었다. 그 땡볕의 더위 속에서 녹색과의 사투, 그건 자연에 조금이라도 대항하려 하는 인간의 소치적인 모습일 수밖에 없다. 자연의 섭리, 그건 인간의 영역이 아닌 신의 활동 영역이기에 그저 무모한 도전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난 여기서 무모한 도전을 강조하고 싶다. 그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언제나 패로 끝날 그런 승부이기 때문이다. 자르고 잘라도 그들은 왜 그리도 잘 자라나는지? 정말 짜증 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혹한의 바람이 부는 계절, 겨울이 다가와 인간의 낫을 든 손길이 아닌 매서운 한풍이란 신의 손길이 스치듯 지나가면 그들은 언제 그렇게 잘 자랐었냐 싶게 초록의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만다. 바로 이런 것이 자연이다. 시기적인 순응을 할 수 있는 게 말이다.

 

그럼에도 우린 그런 무모한 도전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 풀들의 무성한 자람은 전방관측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할 터이고 눈들의 무더기 쌓임은 지대한 지장을 초래할 터이기에 전투를 중시하는 군에선 특히나 제거해야 함이 옳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현실적인 생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작업 노선에 투입하려 하면 버겁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그건 사회에 있을 때, 그저 방관적인 사물들이었기에 그런 것이다. 눈은 전원투입 간에도 쉴 새 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건 지금까지의 눈과는 확실히 달라도 다른 것이었기에 과연 얼마만큼이나 쌓일까 하는 불안과 함께 기대의 이율배반적 감정이 동시다발적으로 들었다. 우린 그런 눈발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 열심히 눈을 쓸고 또 퍼냈다. 그건 눈에 대해 혐오감이 큰 군대이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우린 전원투입 시간 내내 눈과의 사투를 벌였다. 이를테면 눈이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하는 싸움이요, 좀 더 비하하여 말하면 신과 인간의 말도 안 되는 사투였던 것이다. 우린 나름대로 전력질주를 하며 쓸어 나갔지만 뒤를 돌아보니 여전히 그만큼의 눈이 그대로 쌓여 있지 않은가? 그때 느껴지는 허무함이란 십만원짜리 식사를 했음에도 라면 하나 끓여 먹었을 때의 포만감보다도 못할 때의 허무함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런 허무함이 우릴 짓누르고 있었지만, 어쨌든 결국은 다 우리가 해야만 될 일이었기에 그 허무함을 승화시키는 작업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정면으로 맞설 수밖에 없었고 얻어낸 것은 왠지 내가 살아 있다는 생동감 정도였다. 철수 시간이 임박해옴에 따라 우린 철수를 했다.

 

후반야 기상 시간이 됨에 따라 우린 일제히 찝찝한 심정으로 기상하게 되었다. 여전히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단다. 우린 그렇게 좀 찝찝함으로 새해를 맞이하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준이와 난 64초소 투입이었다. 그동안 열심히 치웠을 테지만 여전히 많은 눈이 쌓여 있었다. 구름이 잔뜩 낀 밤이었기에 다른 밤보다 역시 별로 안 추웠다. 하긴 그렇게 구름만 꼈으면 좋으련만, 이곳 철원은 겨울이 되고 나서 구름이 조금이라도 꼈다 하면 여지없이 눈이 내린다. 화딱지가 아니 날 수가 없다. 난 합동 근무에 투입하자마자 대공 후방쪽 눈을 열심히 쓸기 시작했다. 그렇게 조금씩 하얀 부분이 걷어지고 원래의 녹색(누수방지필름) 부분을 되찾아 간다는 건 희열이자 쾌락이었다. 그건 제초작업(해도 해도 똑같아 보일뿐더러 끝이 없어보임)과도 전혀 다른 작업적 도취감이었다. 다행히도 눈발은 이제 날리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많은 눈이 긴 시간동안 오다 보니 당연히 엄청난 적설량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후반야 근무를 서는 내내 쓸고 또 쓸었다.

 

그렇게 전원투입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우린 62초소에서 날개 진지 투입이었기에 무슨 작업을 어떻게 해야될 지 잠시 헤매고 있었다. 그 와중에 인터폰이 울린 것이다. 바로 근무 서던 초소에서 계속 근무를 서라는 것이었다. 그건 곧 전원투입간 작업을 하지 말라는 신호였기에 정말 기쁠 수밖에 없었다. 우린 안도의 한숨을 쉬며 전원투입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근무자들은 투입하지 않고 있었다. 바로 제설작업에 투입된 모양이라 생각하며 열심히 근무를 서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월스토리는 거기서 참혹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소대장님이 62초소에 옴과 동시에 우린 여지없이 제설작업에 투입된 것이다. 교통호상의 쌓인 눈들을 퍼내고 얼었던 얼음들을 삽으로 열심히 까낸 것이다. 제설작전(제설작업이란 말로 굳이 표현하고 싶지만 중대장의 지시사항이다. 작전일 수밖에 없는 까닭은 눈으로 인해 발이 묶이고 외부와 차단되는 것을 막기 때문이란다)을 그렇게 열심히 하고서 철수하기를 꿈같이 바랐다. 하지만 눈이 너무 많이 왔기 때문에 지금 전후반야 합동으로 제설작전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게 새해 벽두부터 웬 김 빠지는 소리인지. 여긴 군대지 않은가. 지휘관의 명령은 곧 법이요, 우리들의 행동지침이기에 우린 그저 따라야만 했다. 모두 피곤하고 아침도 먹지 않아 허기졌지만 결국 언젠가는 우리가 해야 될 일이었기에 꾹 참고 해나가야만 했다.

 

그렇게 열심히 작업만 하고 있으려니 지금이 새해 첫 날이라는 생각도 전혀 들지 않고 그저 평이한 날 같게만 느껴지더라. 하지만 간혹 사회에 있을 때 그렇게 뜬 가슴으로 부풀게 하던 새해임을 자각할 때면 지금 이렇게 전혀 시덥지 않은 것으로 끙끙 대고 있는 우리들이 그렇게 한심해 보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예전에 그런 새해를 맞이했던 것도 현실이라면 어쨌든 지금도 현실은 현실이지 않은가! 그래서 그런 식으로 내 자신을 위로하며 새해를 쭉 같이 맞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그땐 너무하다 싶을 정도였다. 피곤한 건 둘째치더라도 배고픔은 정말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제설작업을 11시까지 하고서 복귀하여 맛있는 떡국은 좀 식었음에도 맘껏 퍼서 먹었다. 역시 금강산도 식후경이요, 식은 밥도 배고플 땐 진수성찬이란 것을 그제야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맛나게 밥을 먹고 총기수윕(sweep)왜 피곤하담서 총기를 수입하냐고? 난들 하고 싶어서 했으면 말도 안 하지. 글쎄 어제 주간에 제설작업을 전망대 앞에서 펼치다가 영곤이가 총을 모두 가지고 가길래 당연히 내 총도 가지고 갔겠거니 했다. 그래서 작전 후에 그냥 복귀했는데 글쎄 내 총은 가지고 오지 않았다는 거다. 그래서 나가려는데 연탄을 같이 나르자고 하더라. 기다리다가 왜 안 가냐고 본부 분대장(병장 임종훈)이 말하는 바람에 분대장(병장 이규희)에게 걸리게 되었고 총기불량 관리자로 찍혀서 이번 주 내내 취침전엔 총기를 수윕하라는 명을 받았다. 잘못을 충분히 알기에 쉽게 순응한다을 하고서 1130분에 잠을 잤는데 130분도 아닌 110분에 기상해야 했다. 제설작전이 미진하기에 다시 끝을 보라는 거다. 그래서 찡그려진 두 눈을 내심 짜증 섞인 양 비비며 일어나야 했다. 새해 첫날 치고는 암울하지 않으려야 암울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제 과연 올해 한 해의 지표를 그저 보여주는 것일까? 아니면 전화위복(轉禍爲福)을 몸소 보여주려는 것일까? 과연 그런 기대를 하면서 우린 작전에 돌입하므로 새해가 그렇게 지나가는지도 모르게 지나갔다.

 

 

사진출처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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