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을 빼놓을 대로 빼놓던 유격을 마치다
02년 9월 19일(목)
목요일 오전에는 화생방이 있었다. 솔직히 끔찍했다. 저번 주 분반에서의 그 악몽이 어렴풋이 떠올랐기에 정말이지 너무 하기 싫었다. 하지만 교육 자체는 월이었다.
방독면 쓰기, KD-1 제독 방법, 보호의 작용, 가스실 이렇게 순서로 진행했는데 PT도 하지 않고 이 과정만을 하면 되니 지난 삼일 동안의 시간에 비하면 수월했다. 하지만 공포는 가스실에서 였다. 방독면을 쓰고 들어가 정화통만 바꾸고 나온다는 걸 익히 들었기에 좀 안심하고 있던 터에 조교에게 소리를 내지 않은 게 걸려서 맨 몸으로 가스실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동주하고 3P장을 따라 들어갔는데 가스실에 하얀 연기가 보이지 않아서 그나마 안심하고 있었는데 구석에 보니 C/S 캡슐이 터져 있었다. 그제야 눈이 따가워지고 목이 아프기 시작했지만 분반의 화생방에 비하면 솔직히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군가를 크게 부르며 나왔는데 찬 공기를 맞게 되니 더 쑤시고 아프더라. 그 다음엔 방독면을 쓰고 들어갔는데 정화통을 뺀 그 잠시의 고통이 약간의 아픔이었지만 바로 정화통을 연결해서 그나마 살 만했다.
갑자기 오후가 되니 복귀행군을 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출발할 때만 해도 복귀행군은 없다고 했는데 정말 어떻게든 최악의 상황을 만들지 못해 다들 안달이구나. 이게 웬 마른하늘에 날벼락 떨어지는 소리인가. 그것도 오후까지 교육을 받고서야 간다니 이걸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비극 중 비극이었다. 세 개의 코스를 대충 마치고 기꺼운 마음으로 퇴소식을 한 다음에 바로 군장을 꾸렸다. 하지만 그렇게 엄청 기쁘진 않았다. 복귀행군을 진짜로 할 뿐더러 지금까진 걸어 다녀본 적도 없는 최장의 코스인 40km를 간다고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깡과 악으로 유격과 그 말로도 할 수 없는 생활을 잘 이겨낸 나인데 여기서 무너질 쏘냐.
필승의 의지를 다지고서 우린 끝도 없을 것 같던 복귀행군의 여정에 올랐다. 유격장 → 77포대 → 19R 1BN → 27포대 → 88포대 → 7R 1BN → 7R 독립중대 → 2R HQ → 5검 → 1BN으로 총 8시간 정도를 걸어서 왔다. 저녁 6시에 출발해서 새벽 4시에 도착했으니 엄청난 노력이다 할 것이다. 하지만 한 명의 낙오도 없이 우린 해냈다. 나만 해도 정말 죽을 지경이었지만 19R 1BN에서 88포대 쪽으로 빠질 때하고 대위리로 가는 길에서 7R 1BN 쪽으로 빠질 때와 2R HQ에서 연대장님 관사가 아닌 5검 쪽으로 갈 때 조금의 융통성도 없이 그렇게 정석대로 가는 대대장님이 정말이지 싫었다. 하지만 그 순간순간의 고통과 짜증, 쉴 때의 그 기쁨과 무섭게 달려들던 추위, 다시 걸을 때의 그 일어나기 싫은 마음과 어떻게든 가야 한다는 현실감, 한 발자욱씩 내딛을 때의 그 짜릿짜릿한 통증. 그 모든 기분들을 한 순간에 느끼며 대대에 복귀했고 유격을 끝마쳤다. 몸은 완전히 파김치가 되어 죽어버리겠다. 군 생활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유격이 그렇게 끝났다.
3박 4일간의 유격을 오늘 새벽(20일 金) 3시 30분에 복귀행군을 통해 부대에 복귀하므로 끝마치게 되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인 유격을 끝마치고 난 한마디 소감이 뭐냐면 ‘짱난다. 화딱지 난다. 열불 난다’ 이 정도이다. 아무래도 아직까지 열외할 수 있었는데 괜히 뛰었다는 생각이 드니, 유격에 대해 좋은 감정이 있을 리 만무하고 짜증스러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떻게든 유격을 끝냈고 군생활의 백미(?)를 경험해본 것에 만족하며 지금 후련함을 느끼며 이렇게 소감을 쓰고 있다.
마지막 텐트를 정리하며 한 컷. 막상 끝났지만 끝난 게 아니라 기쁘진 않더라.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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