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
(金剛般若波羅蜜多經, Vajracchedikā-Prajñāpāramitā-Sūtra)
요진 천축삼장 구마라집역(姚秦 天竺三藏 鳩摩羅什譯)
무술세고려국대장도감봉칙조조(戊戌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1. 법회의 말미암음
법회인유분(法會因由分)
1-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부처님께서는 사위국의 기수급 고독원에 계셨는데, 큰 비구들 천이백오십인과 더불어 계시었다.
如是我聞. 一時, 佛在舍衛國祇樹給孤獨園, 與大比丘衆千二百五十人俱.
여시아문. 일시, 불재사위국기수급고독원, 여대비구중천이백오십인구.
여시아문(如是我聞)과 일시(一時)
제일 먼저 소명태자가 나눈 분(分)의 이름을 설(說)하겠다. 소명태자의 분명(分名)은 글자수를 모두 네 글자로 맞추었다. 따라서 문법적으로 약간의 무리가 있는 상황도 있다. 인(因)과 유(由)는 같은 뜻의 반복일 뿐이다. 둘 다 ‘말미암다’는 뜻이다. 따라서 ‘법회인유(法會因由)’란 법회(法會)가 일어나게 된 상황의 설명 정도로 번역하면 그 뜻이 명료하게 될 것이다.
다음 ‘1-1’ 식으로 번호가 매겨져 있는 것은 내가 최초로 시도하는 장절(章節)의 구분이다. 『성경』도 장절이 있어 인용에 편리하듯이, 우리 불경도 이렇게 장절번호가 매겨지면 아주 활용에 편리하다. 앞의 번호는 소명태자의 분단에서 온 것이다. 그리고 하이픈 뒤의 번호는 전통적 구분을 참고하여 내가 최초로 다시 문의의 흐름에 따라 매긴 것이다. ‘1-1’은 ‘1장 1절’ 혹은 ‘1분(分) 1절(節)’에 해당되는 기호라 생각하면 된다.
‘여시아문(如是我聞)’은 ‘에밤 마야 슈루땀(evaṃ mayā śrutam)’이라는 초기원시경전의 정형화된 표현의 한역이다. 『금강경』은 부처님과 장로(長老) 수보리 사이에서 일어난 문답의 형식이다. 그러나 물론 여기서 ‘여시아문(如是我聞)’의 ‘아(我)’는 수보리가 아닌 수보리와 부처님 사이의 대화를 목격하고 기술한 제3자일 수밖에 없다. 전통적으로 ‘여시아문(如是我聞)’의 ‘아(我)’는 아난(阿難) 존자로 여겨지고 있다. 그것이 사실인지는 확인할 수 없어도, 부처님의 십대(十大)제자의 일인(一人)인 아난(阿難, Ānanda)은 귀가 밝아 잘 듣고 또 기억력이 탁월한 것으로 유명해 ‘다문제일(多聞第一)’로 꼽히었고, 석존(釋尊)의 멸후(滅後), 왕사성(王舍城)의 불전제일결집(佛典第一結集, 544 BC ?) 때 경전송출(經典誦出)의 위대한 역량을 발휘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아마 이것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라고 한 것은 곧 아난 자신이 나의 날조가 아닌 부처님의 말씀을 들어 기억하여 송출(誦出)한다고 하는, 그 객관성과 오리지날리티를 높이기 위한 표현인 것이다. ‘결집(結集)’이란 ‘삼기티(saṃgīti)’를 말하는데, 그것은 ‘더불어 같이 노래 부른다’의 뜻이다. 오백결집(五百結集) 때의 장관을 우리는 상상해 볼 수 있다.
육조(六祖)가 ‘여시아문(如是我聞)’의 아(我)를 추상화시켜 “아(我)는 성(性)이요, 성(性)은 곧 아(我)다. 내외동작(內外動作)이 다 성(性)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니, 일체(一切)를 다 듣는다는 뜻이 된다. 그러므로 아(我)가 듣는다(아문我聞)라고 한 것이다[我者, 性也. 性卽我也. 內外動作, 皆由於性, 一切盡聞, 故稱我聞也].”라고 해(解)한 것은 참으로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일고(一考)의 가치도 없는 잡설에 불과하다. 아무리 그것이 일리가 있는 이야기라 하더라도 원의의 소박한 뜻에 위배하여 애써 현묘해지려고 노력하는 소치는 참으로 구역질나는 것이다. 야보(治父)의 송(頌)도 때로 번뜩이는 기지가 엿보인다 해도 참고의 가치가 없다. 내가 『금강경』을 선(禪)으로 접근해서는 아니 된다 함이 바로 이런 뜻이다. 『벽암록」을 해석하는 식으로 『금강경』을 설(說)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야보(治父), 종경(宗鏡), 함허(涵虛)의 주해가 모두 이렇게 무원(務遠)하여 망이(忘邇)하고, 측미(測微)하여 유현(遺顯)하는 말폐에 빠져 있으니 어찌 그러한 말폐를 취하리오?
세조본에는 ‘여시아문(如是我間聞’이 ‘이 같음을 내 듣자오니’로 되어 있다. 아름다운 우리말 옛 표현이다.
‘일시(一時)’의 해석에 관해서도 승조(僧肇)는 그것이 반야시(般若時)라 하고[一時者, 說此般若時也], 이문회(李文會)는 설법의 이치가 상황에 맞아 감응이 일어나고 도(道)가 교감되는 때[一時者, 謂說理契機感應道交之時也]라 하고 야보도천(治父道川)은 그 ‘일(一)’을 ‘건곤이 혼돈하여 나뉘기 전’이니 운운하며 아주 현묘(玄妙)하게 해석하고 있으나 이 모두가 그릇된 해석이다. ‘일시(一時)’는 ‘한 때’ ‘어느 때’ ‘at one time’이란 아주 일상적인 소박한 뜻 외에는 아무 뜻도 없다. 불특정한 시점을 가리키는 말일 뿐이다. 산스크리트 원문에는 ‘일시(一時, ekasmin samaye)’가 의미상으로 뒤로 붙지 않고 위로 붙는다. 그렇다면 ‘일시(一時)’는 ‘한 때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가 된다. 콘체의 번역은 그렇게 되어 있다: “Thus have I heard at one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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