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무아와 소승
그렇다면, 금강의 지혜 즉 반야란 무엇인가? 그것이 곧 부처의 삼법인(三法印) 중의 가장 궁극적 법인이라 할 수 있는 ‘제법무아(諸法無我)’에 대한 가장 심오하고 가장 보편적인 규정인 것이다. 『금강경』이야말로 ‘무아(無我)’의 가장 원초적 의미를 규정한 대승의 가르침인 것이다. 내가 많은 중생을 제도한다고 하는데 보살의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많은 중생을 제도하는 내가 있지 아니하다고 하는 아상(我相)의 부정, 「금강경』에서 말하는 사상(四相: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의 부정에 곧 그 보살의 원초적이고도 진실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현금 한국의 대부분의 스님은 소승이다. 따라서 한국불교는 소승불교다. 왜냐? 그들은 법당(法堂)에 앉아 있는 스님이고 절깐에 들락이는 신도들은 스님 아닌 보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스님이 스님이라고 하는 아상(我相)을 버리고 있지를 않기 때문이다. 밥먹을 때도 따로 먹어야 하고, 법당에 들어갈 때도 따로 들어가고, 수도할 때도 따로 결제(結制)를 해야하고, 옷도 따로 입어야 하고, 방석조차도 다른 방석에 앉아야 하고, 모든 진리의 척도가 그들 중심이 되어있는 것이다. 공양주보살은 당연히 공양을 바쳐야 할 아랫것들이고, 자기들은 당연히 공양을 받아먹어야 할 윗것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스님들은 신도들에게 절받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자신은 절하는 마음자세를 잃어만 간다. 한국의 스님들이 자신을 보살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을 보살이라고 부르는 것을 나는 보지 못했다. 그들은 아라한이지 보살이 아닌 것이다. 성철당은 성철 스님이 되어서는 아니된다. 성철 스님은 곧 성철보살인 것이다. 현재의 스님과 보살의 개념이 바뀌어야 한다! 부엌깐의 공양주보살이야말로 스님이요, 료사채의 자신들이야말로 보살이 되어야하는 것이다. 한국의 승려들은 모두 이름을 바꾸어야 한다. 아무개 스님이 아니라, 아무개 보살로 모두 그 이름을 바꾸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대승이 되는 것이다. 대승의 기준은 ‘큰 수레’가 아니다. 대승의 기준은 ‘무아(無我)’일 뿐이다. 무아(無我)의 반야를 실천 못하는 자, 남북(南北)을 무론(無論)하고, 동서(東西)를 막론(莫論)하고, 고금(古今)을 물론(勿論)하고 다 소승(小乘)일 뿐인 것이다! 어찌 소승ㆍ대승이 고정된 함의나 대상을 가질 수 있으리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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