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보살이 불토를 장엄하게 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아니 되느냐?”
“須菩堤! 於意云何? 菩薩莊嚴佛土不?”
“수보리! 어의운하? 보살장엄불토불?”
10-4.
“아니 되옵니다. 세존이시여! 어째서이오니이까? 불토를 장엄하게 한다 하는 것은 장엄하게 함이 없기 때문에, 비로소 장엄하다 이름하는 것이오니이다.”
“不也. 世尊! 何以故? 莊嚴佛土者, 則非莊嚴, 是名莊嚴.”
“불야. 세존! 하이고? 장엄불토자, 즉비장엄, 시명장엄.”
여기에 나오는 ‘장엄(莊嚴)’이라는 말은 ‘vyūha’에 해당되는 말인데 그 원의는 ‘건립(formation)’, ‘보기 좋은 배열, 배치(distribution, arrangement)’, ‘수식, 장식’, ‘구조물(structure)’, ‘군대의 질서정연한 사열(military array)’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이 ‘kṣetra-vyūha(국토國土의 건설)’라는 말은 명사화되어 있고, 이것을 목적으로 갖는 본동사로서는 ‘niṣpādayati’가 쓰여지고 있다. 이는 ‘성취한다, 완성시킨다, 성숙시키다’(to accomplish, perfect, achieve, ripen and mature)의 뜻이다.
따라서 ‘장엄불토(莊嚴佛土)’라는 말에 해당되는 산스크리트 원문은 ‘불토(佛土)의 건립을 성취한다’라는 뜻이며, ‘장엄(莊嚴)’이라는 한문의 동사적 형태는 ‘…의 건립을 성취한다.’ ‘…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을 완성한다’의 복합적 뜻을 내포하고 있다.
한자(漢字)의 ‘장(莊)’ ‘엄(嚴)’ 모두 ‘엄숙하고 질서정연하게 정돈한다’ 의 뜻으로, 불국토(佛國土)나 불(佛)의 설법의 장소를 아름답게 꾸민다, 또는 부처나 보살이 복덕(福德)ㆍ지혜(智慧)로써 자기 몸을 꾸민다는 등의 뜻으로 일반적으로 널리 쓰인다.
그런데 제일 마지막의 문구 ‘시명장엄(是名莊嚴)’을 모두 한국의 번역자들이 애매하게 오역하고 있다. 그리고 산스크리트 원문의 의미와도 합치하지 않게 번역하고 있다.
그 이름이 장엄하기 때문입니다(이기영).
이 이름이 장엄하기 때문입니다(석진오).
그 이름이 장엄입니다(무비).
이 번역들이 모두 한결같이 ‘시명장엄(是名莊嚴)’의 ‘시명(是名)’을 ‘이(그) 이름으로 명사화시키고 있다. 이것은 한문의 고유한 문법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두리뭉실 학문’의 오류(The Fallacy of Inarticulate Learning)에 속하는 것이다. 여기서 아주 결정적인 오류는 그 문맥이, ‘장엄’이란 이름뿐이며, 그 이름으로서의 장엄은 부정된다는, 부정적인 맥락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산스크리트 원문의 의미는 용수가 말하는 『중론(中論)』적인 언어적 표현의 부정을 말하고 있질 않다.
우선 ‘시명장엄(是名莊嚴)’의 ‘명(名)’은 명사가 아니라 ‘이름한다(to name)’는 동사이다. 그리고 그 앞의 ‘시(是)’는 지시대명사로서 앞의 문장 전체를 받는다. ‘이것을 장엄이라 이름한다’의 뜻이다. 여기에는 장엄이라 이름하는, 그 이름하는 행위에 대한 부정의 의미가 전혀 내포되어 있지 않다. 다시 말해서 ‘장엄불토자(莊嚴佛土者), 즉비장엄(則非莊嚴), 시명장엄(是名莊嚴)’은 ‘불토를 장엄하게 한다는 것은 즉 장엄하게 내가 불토를 만들고 있다고 하는 아상(我相)이 없을 때 우리는 비로소 이것을 장엄하게 한다라고 표현해 줄 수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불토(佛土)를 장엄하게 한다는 우리의(보살의) 현실적 행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궁극적으로 긍정되어야 할 사태며, 부정되어야 할 것은 ‘장엄하게 만들고 있다’는 나 보살의 의식이다. 다시 말해서 장엄하게 만든다고 진정하게 이름할 수 있는 우리의 행위는 철저히 긍정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제일 마지막 구절 ‘시명장엄(是名莊嚴)’은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장엄은 이름뿐이다’의 뜻이 전혀 아닌 것이다. 『금강경』에 대한 우리사회의 오해의 오류가 모두 이 ‘시명(是名)’에 대한 그릇된 해석에서 비롯되고 있으며, 스님들이 너무 쉽고 안일하게 ‘알음알이’니 ‘헛된 이름 뿐’이니 하는 식으로 보살의 사회적 행위를 내쳐버리는 공병(空病)에 빠져있게 되는 병폐가 바로 이러한 해석의 오류에서 기인하게 되는 것이다.
라오쯔는 말한다:
길을 길이라 이름하면
그것은 항상 그러한 길이 아니다.
道可道, 非常道.
도가도, 비상도.
해인사판본에는 ‘장(莊)’을 모두 ‘장(㽵)’으로 썼는데, 장(㽵)은 장(莊)의 속자(俗字)이므로 그냥 장으로 표기한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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