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깨끗한 땅을 장엄케 하라
장엄정토분(莊嚴淨土分)
10-1.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네 뜻에 어떠하뇨? 여래가 옛날에 연등부처님의 곳에서, 법에 얻은 바가 있느냐? 있지 아니하냐?”
佛告須菩堤: “於意云何? 如來昔在然燈佛所, 於法有所得不?”
불고수보리: “어의운하? 여래석재연등불소, 어법유소득불?”
여기 ‘정토(淨土)’란 이름이 분명(分名)으로 나오고 있는데 본문(本文) 속의 ‘불토(佛土)’와 동일한 뜻이다. 정토(淨土)란 말은 한역(漢譯) 『무량수경(無量壽經)』에 나오는 ‘청정국토(淸淨國土)’라는 말을 두 글자로 압축시킨 것이다. 정토(淨土)란 ‘부처님의 나라’ 즉 깨달은 자들의 나라며 정복(淨福)의 영원한 이상향이다. 불계(佛界), 불국(佛國), 불찰(佛刹)로도 쓰이는데, 이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인 ‘예토(穢土, 더러운 땅)’와 상대적으로 쓰이고 있다. 불교사상사에서 이 정토는 ‘내세정토(來世淨土, 앞으로 갈 정토), ‘정불국토(淨佛國土, 지금 이룩하는 정토)’, ‘상적광토(常寂光土, 이미 있는 정토)’의 삼종류(三種類)로 대별된다.
그런데 과연 이 예토와 정토란 무엇인가?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국(天國, the Kingdom of God)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천국론(天國論)은 바로 예수의 복음의 핵심적 멧세지이며, 이것은 ‘재림사상’【파루시아(parousia), the Second Coming of Christ】, 그리고 종말론(Eschatology), 그리고 교회론(에클레시아, Ecclesiology), 그리고 ‘예수의 몸(the Body of Christ)’ 사상 등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천국(天國)이란, 히브리어나 희랍어의 원의에 즉해서 이야기하면 그것은 문자그대로 ‘하나님이 왕이 되어 다스리는 나라’이다. 즉 세속적 왕의 불완전한 다스림이 아닌, 의롭고, 평화롭고, 보편적이며, 영원한 어떤 새로운 기준에 의하여 다스려지는 축복된 나라이다【실제로 이런 나라는 추상적 질서(basileia)를 의미한다】. 이러한 나라에 대한 염원은 우리 세속(윤회의 나라)에 살고 있는 모든 인간들에게 항시 주어지는 보편적인 갈망이다. IMF로 나라가 기울어질 때, 6ㆍ25전쟁으로 서로가 살상을 일삼을 때, 우리는 얼마나 온전한 나라의 모습을 갈망했던가? 나 도올은 말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정토’와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국(天國)’은 동일한 개념인 것이다.
淨土(佛土, 佛國) 정토 |
= | 天國 천국 |
정토는 곧 불법(佛法)의 모든 가능성이 실현된 깨끗한 나라요, 그것은 하나님의 법(法)이 실현된 왕국(王國)이다. 예수는 인간세에, 천국(天國)이 가까왔다는 외침으로써 등장했다【‘하나님 나라가 가까왔다! 회개하라! 그리고 이 기쁜 소식을 믿으라!’ 「마가」 1:15】. 그리고 그는 이렇게 기도했다. ‘당신의 나라(basileia)가 임하옵시며’【「누가」 11:2, 그 유명한 ‘주기도문’ 중에서】.
그러나 문제는 천국이 언제 어떻게 오는가이다. 예수의 삶의 시간동안에 과연 천국은 도래했는가? 그것은 역사적 사실이었는가? 그런데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אלי אלי למה סואחטאני)’를 외치고 죽었다. 결국 천국은 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 천국의 도래에 대한 믿음을 포기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여기에 다시 등장하는 것이 예수의 재림(Parousia)이다. 다시 말해서 초림(初臨)에서 선포한 복음의 완성을 위하여 부활하신 예수가 다시 온다는 것이다. 이것은 미륵의 하생(下生)이나 거의 동일한 생각이다. 그러나 초기기독교 교회의 사람들은 56억 7천만 년 후에 나타나는 미륵의 하생(下生)처럼 그렇게 시간을 멀리 잡지 않았다. 예수가 곧 내려온다고 생각했다. 그 유명한 예수의 사도, 바울의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좋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데살로니가전서」 4:16~18).
사도바울은 본시 로마시민권의 소유자로서(요즈음 말로 하면 미국시민권을 소유한 교포) 매우 합리적인 희랍교육을 받고 자라난 사람이지만【희랍어, 그러니까 요즈음 말로는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었다】, 그에게는 매우 신비적인 비젼이 있었다. 깊은 합리적ㆍ개념적 사유와 아주 비합리적이고 신비적인 통찰이 절묘하게 결합된 좀 이해키 어려운 인물이었다. 사도바울은 이러한 재림의 비젼을 문자 그대로 믿었고 그것이 자기 삶의 당대에 이루어지리라 믿었다. 또 그러한 믿음 때문에 당대의 자기가 세운 교회의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면서 재림의 대비를 권면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예수의 재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예수는 오지 않았다! 아아! 실망스럽다. 이러한 민중의 실망을 또 다시 깨우치고 나오는 사상이 ‘교회론’이다. 즉 믿음을 가진 자들의 모임으로 이루어진 콤뮤니티, 그 공동체가 바로 천국의 도래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공동체가 바로 예수의 몸이라는 것이다. 그 공동체에 속한 성원은 그 몸의 지체(肢體)라는 것이다(「로마서」 12:4~5, 「고린도전서」 12:12).
그런데 이러한 교회론의 맹점은 또 다시 교회에 부여된 재림적 의미의 특수성 때문에 교회가 다시 특수화되고 신비화되고 선민화되고 제식화되어 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말틴 루터의 도전에까지 이어지는 기나긴 카톨릭의 역사, 그 후에 이루어진 신ㆍ구교의 모든 역사 속에는 이러한 초기기독교의 기본적 문제들이 해소되지 않은 채 남아있는 것이다.
천국(天國)이나 정토(淨土)의 가장 기본적 문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즉 사바세계, 즉 예토(穢土)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있다.
‘내세정토(來世淨土)’는 곧 우리가 사후에 갈 곳으로 설정된 극락세계이다. 여기서 불토(정토)는 우리가 살고있는 예토와 전혀 다른 실체로서 설정되어 있다.
그러나 ‘정불국토(淨佛國土)’는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정토화(淨土化)를 의미한다. 이것은 바로 천국의 현실적 실천이다. 바로 현실 속에서 정토를 만들어 가는 행위가 곧 ‘보살행’인 것이다. 정불국토(淨佛國土)의 ‘정(淨)’은 불국토(佛國土)를 깨끗이 한다고 하는 우리 삶의 현실적 행위를 가리키는 동사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영원한 진행형이다.
‘상적광토(常寂光土)’는 일체의 한정을 넘어선 절대정토이며, 그것은 나의 신앙을 통하여 지금 여기 있는 정토이다. 그것은 곧 법신(法身)의 토(土)이며, 법성(法性)의 토(土)인 것이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이미 있는, 이미 도래되어 있는 정토인 것이다. 바로 여기서 ‘사바측적광(娑婆卽寂光)’이라는 사상이 도출된다. 이 마지막 절대정토야말로 바로 『금강경』이 설(說)하고 있는 사상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 하나의 대승의 궁극적 의미이다.
기독교도나, 불교도나 일반신도들이 신앙의 대상으로 믿는 것은 ‘내세정토(來世淨土)’이다. 그러나 그것은 승가를 유지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또 죽음을 앞둔 연약한 인간들의 위로로서 설정되는 방편이다. 정토사(淨土史)에 있어서 내세정토(來世淨土)는 정(正)이요, 정불국토(淨佛國土)는 반(反)이요, 상적광토(常寂光土)는 합(合)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천국을 상적광토(常寂光土)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변증법적 궁극이다.
천국론의 궁극적 해결은 바로 천국의 존재라는 그 실체성을 해소시켜버리는 데 있다. ‘파루시아’는 초대교회 사람들의 결집을 위한 하나의 권면적 수단이었다. 천국은 곧 나의 마음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나의 마음속에 천국이 있다고 하는 생각조차 없애야 하는 것이다. 천국이 곧 나의 마음이라고 하는 생각조차 없는 상태, 그때 비로소 천국은 실현되는 것이다.
예수의 복음의 멧세지를 깊게 살펴보면, 예수도 천국이라는 의미를 매우 상징적으로 사용했다. 그것은 미래적 사건이기도 하였지만 동시에 항상 현재적 사건이었다. 종말론적인 동시에 현세론적이었다. 그가 ‘천국이 가까왔다’고 외친 것은 오로지 그 다음에 오는 멧세지를 위한 방편이었다. 그 주 멧세지를 위한 조건적 설정이었다. 그것은 바로 ‘회개하라’라는 현재적 명령이다. 회개의 요청의 전제로서 천국의 도래의 임박성이 설파된 것이다. 따라서 회개 없는 천국은, 전혀 의미없는 것이다. 공관복음서의 천국의 도래의 외침은 한결같이 모두 ‘회개하라’의 조건절이 되어 있는 것이다. 어찌 회개함이 없이 천국만을 바라고, 십자가 없이 부활만을 희구할 것인가?
여기 제1절에 연등불(然燈佛)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Dīpaṅkara Tathāgata’의 의역이다. 이 부처님은 과거세(過去世)의 불(佛)로서 ‘수기(授記, vyākaraṇa) 사상과 관련되어 있다. 이것은 ‘화가라나(和伽羅那)’, ‘파가라나(婆伽羅那)’, ‘폐가란다(弊伽羅那)’ 등으로 음역된다. 수기(授記)는 ‘예언’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과거세(過去世)에 있어서, 과거불(過去佛)이 수행자(修行者)에게 미래(未來)의 세(世)에 있어서 반드시 부처(佛, 각자)가 되리라고 하는 보증을 확약하는 예언을 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 연등불은, 타오르는 등불과도 같은 부처님으로서, 석존 이전의 과거세에 존재(存在)했던 이십사불(二十四佛) 중의 한 사람이었다.
이 ‘연등불’의 이야기는 불교설화문학에 속하는 것이다. 석가모니는 전생에 있어서 ‘수메다’【선혜(善慧), 미각(彌却), Sumedha】라는 이름의 고행자였다. 이 고행자는 당대의 부처님이었던 연등불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뛰어갔다. 그런데 연등불이 지나갈 도로가 수선하는 바람에 아주 질펀하게 더러운 물이 고여 있었다. 그래서 수메다는 그 곳에 몸을 뉘여 연등부처님이 몸을 밟고 지나가시도록 했다. 일설에 의하면 머리를 풀어헤쳐 길을 덮어 연등부처님이 젖지 않고 지나갈 수 있게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일곱 자루의 연꽃을 헌화하였다. 즉 수메다는 연등부처님과 같은 각자를 존경하는 마음이 지극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때 연등부처님은 기(記)를 내리시는(수授) 것이다: “그대는 후에 샤카족의 성자가 되리라.” 이 ‘산화해발(散花解髮)’의 본생담은 여러 곳에 다양한 형태로 기재되어 있다.
지금 이 정토분의 대화의 시작은 바로 석가가 자신의 전생의 일을 회상하며 묻는 것으로 시작되고 있다. 그러나 여기 중요한 것은 바로 연등부처님으로부터 어떤 보장이나 확약을 받았다고 하는 그 법이 실체화되어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깨달음의 도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수보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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