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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금강경 강해, 제십삼분 - 13.3 所以者何 ~ 如來有所說法不 본문

고전/불경

금강경 강해, 제십삼분 - 13.3 所以者何 ~ 如來有所說法不

건방진방랑자 2022. 11. 17. 0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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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 “그 까닭이 무엇이뇨? 수보리야! 부처가 설한 반야바라밀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여래가 설한 법이 과연 있다고 생각하느냐?”

所以者何? 須菩堤! 佛說般若波羅蜜, 則非般若波羅蜜. 須菩堤! 於意云何? 如來有所說法不?”

소이자하? 수보리! 불설반야바라밀, 칙비반야바라밀.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유소설법불?”

 

 

여당봉지(汝當奉持)’에서 멋있게 끝난 피날레를 억지로 논리를 붙여내어 끌어간 느낌이 역력하다. 그러나 퍽으나 자연스럽게 논지를 펼쳐가고 있다.

 

그런데 여기 중요한 판본의 문제가 하나 있다. 우리나라 시중에서 통용되고 있는 많은 금강경이 라집역본(羅什譯本)임을 표방하고 있으면서도 그 잘못된 의취(義趣)에 따라 제멋대로 가감(加減)한 비선본(非善本)을 저본으로 취하고 있기 때문에 의도치 않은 큰 오류들이 발생할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라집역본(羅什譯本)의 정본(正本)으로서는 우리 해인사 고려대장경본 이상의 것은 없다. 그리고 그것을 저본으로 한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본이 가장 가깝게 오는 것이지만 우리가 보아 왔듯이 해인사본의 정밀성에는 미칠 수가 없다. 바로 우리나라가 금강경의 세계적 기준이 되는 제일 좋은 판본을 가지고 있는데, 한국사람이면서 우리 고려대장경본을 들쳐 보지 않는다는 것처럼 수치스러운 일이 어디 있는가? 우리나라 불교가 금강경을 가장 중요한 소의(所依)경전으로 삼으면서도 우리나라가 자체로 소유하고 있는 가장 위대한 고려대장경본을 텍스트로 한 금강경이 역사적으로 희유(稀有)하다는 이 사실을 도대체 무엇이라 설명해야 할 것인가?

 

그런데 여기 3절의 불설반야바라밀(佛說般若波羅蜜), 즉비반야바라밀(則非般若波羅蜜)’이 우리나라에서 나온 거개의 금강경에는 불설반야바라밀(佛說般若波羅蜜), 즉비반야바라밀(卽非般若波羅蜜), 시명반야바라밀(是名般若波羅蜜).’로 되어 있다. ‘()’ ()()’으로 되어 있고, 끝에 시명반야바라밀(是名般若波羅蜜)’이 첨가되어 있다. 무비 스님본이 그렇게 되어있고, 또 여러 판본을 비교연구하신 석진오 스님본이 그렇게 되어 있고, 이기영본은 나카무라본을 그대로 옮긴 것이기 때문에 대정본(大正本)의 모습대로 되어 있으나, 그 우리말 해석에는 그 이름이 반야바라밀이니라라는 구문을 첨가해놓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물론 그 첨가해놓은 상황에 대한 특별한 설명도 없다. 다시 말해서 해석할 때 자기 자신의 텍스트를 보지 않고 한국의 통용본을 따랐다는 얘기밖에는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것은 모두 근본적으로 있지도 않은 것을 적어놓은 아주 단순한 허위의 오류에 속하는 것이다.

 

우리 해인사 고려대장경본에도 대정(大正)본에도 시명반야바라밀(是名般若波羅蜜)’이라는 구문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오가해(五家解)에 기초한 세조(世祖) 언해본에 나타나고, 현암신서(玄岩新書)의 김운학(金雲學) 역주(譯註), 신역(新譯)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속에 영인되어 있는 일제시대판본으로 보이는 현토본에 나타날 뿐이다. 고익진 선생(高翊晉先生)이 책임교열한 동국대학교 한국불교전서속에 들어가 있는 득통(得通) 기화(己和)금강반야바라밀경오가해설의(金剛般若波羅蜜經五家解說誼)본 속에도 시명반야바라밀(是名般若波羅)’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문제가 사소한 것 같이 보일 수도 있지만, 이는 학문의 기저가 왔다갔다할 수 있는 매우 중대하고 심각한 사태에 속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많은 불교학 논문들이 금강경의 논리를 논구할 때에 바로 이 구절을 대표적인 것으로 인용하여 선()의 사구게적(四句偈的) 논리나, 중론(中論)의 논리(論理)와 대비시키고 있는 사례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것은 판본의 무검토에서 생겨난 단순한 오류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학문의 국제적 신빙도를 추락시키는 아주 부끄러운 사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일본 학자들에게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이러한 사례들이 우리나라 논문에는 비일비재한 것이다. 나는 동경대학교(東京大學校) 중국철학과(中國哲學科)에서 학창생활을 거치면서 일본 학자들이 너무도 뼈저리고 가혹하게 이런 문제에 관한 비판의식을 축적해가면서 학문여정의 일보 일보를 쌓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우리나라 학자들은 이러한 문제에 관해 너무도 무지하고 무감각한 것이다.

 

시명반야바라밀(是名般若波羅蜜)’하나쯤 삽입한다고 금강경』」의 대의가 변화가 없을 뿐아니라 오히려 금강경의 의취가 더 일관되고 풍부해지는데 뭐가 그렇게 야단법석이냐? 그리고 산스크리트 원문에는 그것이 오히려 들어가 있는 형태로 문장이 구성되어 있다면 그것쯤 첨가된다고 금강경이 잘못될 것은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 우리가 말해야하는 것은 라집한역본(羅什漢譯本)의 사실이다. 학문에 있어서 사실은 사실일 뿐이다. 없는 것을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없는 것을 첨가할 때는 그 첨가하는 정확한 이유를 밝혀야 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고려시대에 팔만대장경의 판각을 누가 했는가? 필부필녀가 했을 것이요, 선남선녀가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목판이다. 한 글씨 한 글씨 써서 파넣은 것이다. 그런데 한 글자도 쉽사리 어긋남이 없는 선본(善本)이다. 우리에게 처절하게 반성되어야 할 문제는 바로 오늘날 우리나라의 대석학들의 수준이 고려말기 대장경 판각을 관장했던 학인이나 공인들의 수준에 못미치고 있다는 사실인 것이다. 과연 우리의 학계가 이토록 기본을 무시하는 학통 속에서 우리의 자녀들을 기르고 있다면 이런 민족의 손끝에서 세계를 리드하는 전자산업이나 여타 정밀산업이 나올리 만무한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 자신의 학문의 토대가 쌓여가고 있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일본을 따라 잡느니 어쩌니 말하기 전에, 도서관에 가서 고려대장경의 판본을 정밀하게 검색해보는 기초적 학문의 자세부터 점검해야 할 것이다.

 

후학들에게 다시 한번 반성을 촉구한다. 고전이나 여타 문헌을 다룰 때 반드시 판본의 문제를 고려할 것이다. 그리고 판본의 선택의 기준을 세우고, 그 기준에 따라 타 판본들을 비교검토할 것이다. 논문을 쓸 때에, 우리나라에 통용(通用)’되고 있는 어떠한 책도 함부로 반성없이 베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 해결은 매우 단순하다. 조그만큼의 성의와 육체노동이면 족한 것이다. 도서관에 가서 성실하게 조사해보면 그것으로 모든 문제는 해결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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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금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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