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언(眞言)
那謨婆伽跋帝 鉢喇壤
나모바가바떼 쁘라갸
波羅弭多曳
빠라미따예
唵 伊利底 伊室利 輸盧馱
옴 이리띠 이실리 슈로다
毗舍耶 毗舍耶 莎婆訶
비샤야 비샤야 스바하
진언은 진언일 뿐이다. 그것은 인간의 의미로 헤아려서는 아니 된다. 진언은 나의 신(神)과의 대화다. 그때 나는 바로 다름 아닌 신(神)이다. 진언은 그 자체로서 신성한 힘을 갖는 것이다. 진언, 그 자체가 브라만인 것이다. 삼라만상 이 우주가 모두 진언이다. 이 진언에 의하여 곧바로 성불한다고 믿는 것이 진언종(眞言宗)의 신념이다. 그러나 이 진언에 참으로 도달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이 기나긴 금강의 지혜의 여행을 했어야만 했다는 것을 마음에 되새기자! 『금강경』을 못 외우더라도, 이 마지막 진언이라도, 어려울 때나 괴로울 때 나 기쁠 때나 즐거울 때나 항상 내 마음에서 떠나지 않게 하자!
이 진언의 구성은 나모(Namo)로 시작되어 스바하(Svāhā)로 끝나고 있다. ‘나모’는 ‘나무(南無)’라고 음역하기도 하지만, 이는 여기서 존엄하신 지혜의 완성의 여신(Bhagavate Prajñāpāramitaye)에게 경배(귀의)하는 인사의 말이다. ‘지혜의 완성’이 여성명사화 되어 신격화 되고 있다.
마지막 ‘스바하’는 기독교의 ‘아멘’과도 같은 의미를 지니는 말이다.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행복이 깃들기를’, ‘축복이 있기를’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인도에 가면 사람들이 성스러운 곳에 향을 뿌리면서 ‘스바하’를 외친다.
기독교의 진언이라 할 수 있는 ‘아멘’도 히브리말로 ‘확실히’, "그렇게 될지어다’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 『금강경』에서 상대방의 말에 대해서 ‘여시여시(如是如是)’라고 한 것과 같은 의미를 내포하는 양식으로 이미 『구약성서』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이 히브리말을, 희랍어를 말하는 초기 기독교 교회에서 쓰면서 유포된 것이다.
중간의 ‘옴(암唵)은 우주의 소리로 ‘AUM’을 표기한 것이다. A는 소리의 시작이며, U는 지속이며, M은 끝이다. 이것은 우주의 탄생과 지속과 소멸을 다 함축하는 진언인 것이다.
중간에 슈로다(輸盧駄)는 슈루띠(śruti)의 변형일 것으로 추측되지만 정확하게 재구(再構)하기는 어렵다. 실담(悉曇)자모 표기에 의하면 ‘馱(駄)’는 dha(드하)음이다. 그냥 ‘다’로 적는다. 슈루띠는 ‘듣는다’는 뜻이다. ‘하늘의 계시’, ‘신성한 교의’의 뜻도 된다.
『금강경』은 논리의 전개가 아니다. 이것은 깨달음의 찬가요, 해탈(mokṣa)의 노래다. 그 노래가 이 진언 속에 다 함축되어 있다. 진언을 말할 때는 반드시 리드믹한 노래로 불러야 한다. 장음과 단음, 억양의 고하의 묘합을 살려!
나모바가바떼 쁘라가 빠라미따예
음 이리띠 이실리 슈로다
비샤야 비샤야 스바하
이것으로 나의 강해는 끝난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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