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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강해 - 경후설(經後說) 본문

고전/불경

금강경 강해 - 경후설(經後說)

건방진방랑자 2022. 11. 23.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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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후설(經後說)

 

 

나는 어려서부터 궁금한 게 많았다. 모르는 게 너무도 많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머리가 나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너무도 쉬운 이야기들을 잘 이해하지 못했고, 누가 농담을 던져도 같이 따라 웃지를 못했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아둔하다고 생각했고 나 역시 동감이었다. 어머님 말씀이 서너 살 때부터 길거리를 지나다가도 풀한 포기가 궁금하면 거기에 덥쑥 주저앉아 떠날 줄을 몰랐다 했다. 그런데 날이 가면 갈수록 궁금증들은 깊어져만 갔다. 그러나 아무도 나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사람들이 없었다. 선생도, 책도, 나뭇잎도 나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바가 없었다. 나는 그렇게 성장하였다.

 

나는 대학에 들어와서 불교강의를 여러 선생님으로부터 들었다. 그런데 도무지 불교라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느날 나는 중이 되리라고 결심했다. 나는 너무도 머리가 나뻤기 때문에 직접 중이 되어 불교의 세계를 체험해보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나의 고향 산골 어느 폐찰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승복을 입었다. 그리고 열심히 도를 닦았다. 그렇게 삼 개월이 흘렀다.

 

나는 승복을 입은 채 상경(上京)을 시도했다. 갑자기 서울에 계신 엄마가 보고 싶었던 것이다. 완벽한 스님의 모습을 하고 여장(旅裝)을 차렸다. 스무 살 남짓했던 나의 푸른 청춘이 그 잿빛 승복조차 푸르게 만들어 버리고 말 그런 활기찬 모습이었다. 나는 대로를 행진했다.

 

나는 이때 너무도 깊은 충격을 받았다. 길거리에 지나가는 너무도 많은 아줌마, 할머니들이 그 어린 소년인 나에게 공손히 절을 올리는 것이 아닌가? 내가 절을 해야 할 그 사람들이 나에게 절을 올리는 것이 아닌가? 나는 승복을 한번 입고 크게 깨달았다. 그 얼마나 우리 민중 속에 불법에 대한 신앙이 깊게 자리잡고 있는가 하는 것을. 나는 그것을 처음 몸으로 깨달은 것이다. 엄격한 청교도적인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난 나, 그리고 당시 신학대학을 갓 나왔던 나에게는 더 이상의 충격이 없었다.

 

드디어 서울에 왔다. 신촌 엄마 집 문에 왔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엄마가 이 내 꼴을 보고 얼마나 놀라실까? 우리 엄마는 평생을 무섭도록 정통적인 기독교신앙에 헌신해 사신 분인데 이런 마귀 모습을 하고 나타나다니! 대문을 짤칵 열고 들어서는 순간! 계단 위에 엄마가 서 계신 것이 아닌가? 나는 깜짝 놀랐다. 그때 나의 엄마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엄마는 여느 때와 아무 다름도 없이 날 빙그레 미소로 반겨주셨다. 참으로 엄청난 충격이었다. 아무 말도 없으셨다. 그 순간에 대하여 오늘날까지 아무 말도 없으셨다. 그 순간의 엄마의 미소! 그것은 가섭의 미소보다 더 소중한 나의 깨달음의 순간이었다.

 

그때 엄마의 그 미소가 없었더라면, 오늘 이 금강경은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종교는 체험이 없이는 무의미하다. 여기 이 금강경강해는 나의 지식의 나열이 아니다. 이것은 나의 삶의 깨달음의 역사요, 나의 무지의 체험의 역사요, 나의 삶의 환희의 기록이다. 기독교와 불교에 깊은 신앙체험이 없었더라면, 오늘 이 금강경은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기독교의 본질을 십자가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 그것이 기독교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오늘의 기독교가 십자가를 말하지 않고 부활과 성령의 은혜를 말하며, 회개와 사랑을 말하지 않고 천국의 도래를 말하는 것은 참으로 유감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깊은 신앙인으로 컸다. 나는 성경을 다 외웠고, 나는 엄마를 따라 고사리손을 호호 불면서 매일 매일 새벽기도에 나가, 뭔지도 모르면서 애통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나는 성스러운 방언도 했다. 그래서 나는 주님의 사도가 되기 위해 신학대학에 갔다. 나는 신학대학에 다니면서 이미 여기저기서 명설교자로서 이름을 날렸다. 나는 나의 언설의 카리스마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나의 언어는 뭇 대중들에게 성령을 베푸는 마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도 내가 신학대학을 나와서 목사가 되었더라면 최소한 빌리 그래함보다는 더 위대한 전도사가 되었을 것이다. 지금쯤 아마도 엄청난 성전을 지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를 너무도 잘 알기에, 분명 신의 뜻이 다른 데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신학대학을 나왔다. 너무도 내 목소리가 신의 음성을 닮았기에 나는 나를 더 이상 기만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신학대학을 걸어나오면서 내가 흘렸던 눈물은 지금도 후회함이 없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고독하게 살았다.

 

나의 무지는 계속되었다. 아무리 아무리 묻고 찾아봐도 이 세상에 대한 궁금증이 풀리지를 않았다. 그렇게 나는 천지를 헤맸다. 그렇게 지천명(知天命)의 나이가 지나갔다.

 

그런데 요즈음 좀 이상한 일이 생겼다. 조금 무엇인가 아는 듯한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동안 머릿속에 궁금해서 집어 넣어 놓은 지식들이 서로 춤추면서 어떤 모습을 지어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한 느낌을 받기 시작하고 내가 처음 집필한 붓이 아마도 이 금강경 강해가 아닌가 생각한다.

 

나는 이 방대한 원고를 꼭 스무 날 만에 썼다. 초가을의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지루하게 비가 쏟아지는 9월에 이 글을 썼다. 다른 원고에 대한 피치 못할 약속을 지켜야 하기에, 7월 한 달 강의하면서 느꼈던 생각들이 멀리 도망가 버릴 것을 두려워하여, 그리고 한번 붓을 놓아버리면 영원히 못쓸 것 같아 결사적으로 붓을 놀렸다. 반야 지혜의 여신이 내 붓을 움직여 주시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 원고를 스무 날 만에 탈고하는 그런 무지한 짓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의 관심은 우리 이 조선땅에서 계속 살아갈 젊은이들이다. 요즈음같이 젊은이들이 보수화되어가고, 역사의 대의나 진실에 무관심해져가는 사태를 나는 방관할 수 없다. 우리 조선의 역사는 젊음을 상실해서는 아니 된다. 나는 이 땅의 젊은이들이 이 금강경의 벼락 같은 회초리를 맞고 정말 크나 큰 마음을 가지는 위대한 사람들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스바하!

 

 

 

 

인용

목차

금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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