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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선생 중용강의, 2장 - 1. 골드민(Golden mean)과 중용(中庸) 본문

고전/대학&학기&중용

도올선생 중용강의, 2장 - 1. 골드민(Golden mean)과 중용(中庸)

건방진방랑자 2021. 9. 16.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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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골드민과 중용

 

 

仲尼曰: “君子中庸, 小人反中庸.

중니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중용(中庸)을 하고 소인은 중용(中庸)을 거스른다군자는 에서 깨달음을 얻고 소인은 에서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이다. 즉 깨달음의 층차의 단계적 고하를 말했을 뿐이다. 따라서 군자는 위대한 통치자이고 소인은 우매한 백성이라는 식의 논리는 유교에 없는 논리이고, 또 있어서도 아니 되는 논리이다. 군자와 소인은 결국 동일한 인간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군자가 수양을 게을리하거나, 판단을 잘못하거나, 일시적 탐욕에 치우치거나, 처신을 잘못하면 곧바로 소인이 되고 마는 것이다. 결국 군자나 소인이나 모두 ()’라는 일정한 수준의 교양인들을 놓고 하는 말이지, () 밖의 밭가는 농부를 보고 소인이라는 표현을 쓰는 법은 없다. -김용옥, 중용한글역주, 259

 

中庸者, 不偏不倚, 無過不及而平常之理, 乃天命所當然, 精微之極致也. 唯君子爲能體之, 小人反是.

중용이라는 것은 치우치지 않고 기울어지지도 않고, 과함도 미치지 못함도 없는 것으로 평상의 이치다. 그래서 천명의 당연한 것으로당연이라는 것은 ‘~에 당하여 그러하다는 뜻인데, 그 일차적인 의미는 오히려 서양언어로 ‘Sein’에 가까운 뜻이며 ‘Sollen’의 의미를 별로 내포하지 않는다. 나무가 저기 서있는 모습은 그 상황에 당하여 그러한 것이므로, 그것을 마땅한 모습이라고 표현할 수는 있으나 그것은 나무가 나무로서의 마땅한 모습이며 그것이 어떤, 그래야만 한다는 윤리적 가치를 포함하지는 않는다. 실상 당연(當然)’자연(自然)’, 스스로 그러함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중략) 오히려 필연이나 가치를 운운한다면 소당연(所當然)’이 아닌 소이연(所以然)’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소이연이란 ‘AA이게끔 만드는 것이라는 뜻이며, 문자 그대로 풀이하면 그것으로써 그러함이란 뜻이다. 본체론적이고 현대말의 당위적인 것은 오히려 소이연의 의미에서 찾아야 한다. -김용옥, 중용한글역주, 263, 정일하고 은미함의 극치다. 오직 군자는 그것을 체득할 수 있지만, 소인은 이것에 반대가 된다.

 

君子之中庸也, 君子而時中; 小人之中庸也, 小人而無忌憚也.”

군자가 중용(中庸)을 함은 군자로서 때로 맞게 하는 것이요. 소인의 중용(中庸)이란 소인으로서 기탄이 없는 것일 뿐이다.”

 

王肅, 小人之反中庸也‘, 程子亦以爲然. 今從之.

왕숙본에선 소인지반중용야(小人之反中庸也)’라고 쓰여 있는데, 정자께선 또한 그러하다고 여기셨기 때문에, 이제는 그걸 따른다진사이(仁齋)가 바른 지적을 하였다: “지금 있는 그대로의 문장에다가 왕숙본처럼 반() 자를 보태놓으면 전체 문장이 맛이 없어지고 맥이 풀린다. 더구나 그렇게 되면 앞머리의 두 구절은 필요없는 문장이 되고 만다.” -중용한글역주, 265.

 

君子之所以爲中庸者, 以其有君子之德, 而又能隨時以處中也. 小人之所以反中庸者, 以其有小人之心, 而又無所忌憚也.

군자가 중용을 할 수 있는 까닭은 군자의 덕이 있고 또한 때에 따라 중()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인이 반중용을 하는 까닭은 소인의 마음이 있고 또한 꺼리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蓋中無定體, 隨時而在, 是乃平常之理也. 君子知其在我, 故能戒謹不睹恐懼不聞, 而無時不中. 小人不知有此, 則肆欲妄行, 而無所忌憚矣.

대저 중용엔 정해진 형체가 없어 때에 따라 있는 것이니, 이것이 곧 평상의 이치다. 군자가 나에게 있음을 알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에서 경계하고 삼가며, 들리지 않는 것에서 두려워하니, 때마다 중()하지 않음이 없다. 소인은 이것을 알지 못해 욕망을 방자히 하고 행동을 망령되이 하여 꺼리는 것이 없는 것이다.

 

荀子』 「不苟: “凡人之患, 偏傷之也. 見其可欲也, 則不慮其可惡也者; 見其可利也, 則不顧其可害也者. 是以動則必陷, 爲則必辱, 是偏傷之患也.

순자』 「불구편에서 사람의 근심은 치우쳐 상하는 데에 있다. 하고자 하는 것을 보면 안 좋아질 것을 생각하지 않으며, 이익이 될 만한 것을 보면 해가 될 만한 것을 고려하질 않는다. 이런 이유 때문에 움직이면 반드시 함정에 빠지며, 행위를 하면 반드시 욕받이가 되니, 이것이야말로 치우쳐 상하는 근심인 것이다.”라고 말했다.

 

右第二章. 此下十章, 皆論中庸以釋首章之義. 文雖不屬, 而意實相承也.

오른쪽은 제2장이다. 이 이하 10장은 다 중용을 이야기하며 1장의 뜻을 푼 것이다. 문맥이 비로 이어지지 않으나 문장의 뜻은 실제로 서로 이어진다.

 

變和言庸者, 游氏曰, “以性情言之, 則曰中和’; 以德行言之, 則曰中庸’.” 是也. 然中庸之中, 實兼中和之義.

()’를 바꿔 ()’으로 말한 것은 유씨가 성정으로 그것을 말하면 중화(中和)’이고, 덕행으로 그것을 말하면 중용(中庸)’이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그러나 중용(中庸)의 중()은 실제로 중화(中和)의 뜻까지 겸하고 있다.

 

주자 주를 보면 왕숙(王肅, 195~256 삼국시대 에서 벼슬을 함, 子雍)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왕숙(王肅)이란 사람은 당대(當代)에 일가견을 가지고 금고문 논쟁에 참여했던 대학자입니다. 노자에 주를 단 왕필(王弼, 226~249, 輔嗣, 삼국시대 )과 먼 친척이죠. 그 왕숙본(王肅本)에는 소인지중용(小人之中庸)’의 사이에 반()자가 들어가서 소인지반중용(小人之反中庸)’으로 되어 있다고 하는데 나는 구태여 반()자를 넣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앞 구절의 소인반중용(小人反中庸)’을 받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냥 해석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중니(仲尼)는 공자의 자()이고 구()는 이름입니다. 중니라는 자()로써 공자를 칭했다는 것은 친근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집안사람들이 인용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방편적 이분(二分), 우주적 실체로의 이분(二分)

 

1장에서는 중화사상(中和思想)이 나왔는데, 2장에서 갑자기 중용(中庸)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죠?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삶은 항상 평범하게 보입니다. 뭔가 자극적이고 흥분되는 일이 있을 수 없어요. 지루함이 일상화된 것만 같은 이런 상태를 소인들은 견디지 못합니다. 그래서 군자는 중용(中庸)을 하지만 소인은 반중용(反中庸)을 하지요. 여기서 중용(中庸)은 동사적으로 쓰였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군자와 소인의 매우 명백한 이원론을 가지고 논리를 전개하고 있는 걸 볼 수 있는데, 동양에는 이원론이 없다고 하는 것은 헛소리입니다. 모든 논의의 전개에 있어서 이원론적인 대립이 없으면 논리가 전개되지 않아요. 군자가 있으면 소인이 있고, 선인이 있으면 악인이 있어야 되고, ()가 있으려면 비도(非道)가 있어야 됩니다. 금고(今古)의 대비라든가 군자(君子소인(小人)의 대비는 모두 동일한 이원론적인 논법입니다. 군자와 소인의 문제는 이미 논어(論語)에 잘 쓰였던 이분적 논리이기 때문에 이 구절은 상당히 오래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허나 논리전개상의 방편적 이분(二分)과 우주의 실체로서의 이분(二分)은 좀 다른 문제라는 것만 기억해 두세요.

 

 

 

시중(時中)이라는 상황성에 대해

 

여기서 시중(時中)’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인간의 삶에는 항상 상황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약속 어기지 않는 것을 철칙으로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어느 날 다리 밑에서 애인을 만나기로 했는데, 마침 그때 폭우가 내려서 갑자기 물이 쏟아지듯 밀려 왔는데도 불구하고 그 사람은 약속을 지키겠다고 용감하게 계속 그 자리를 지키다가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尾生之信). 이것이 과연 중용(中庸)일까요?

 

인간의 행위에는 반드시 상황성이 있고, 그 상황성은 시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라는 것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중간미들(Middle)의 개념이 아니예요. 아리스토텔레스의 ‘Golden mean’감정은 매우 넓은 행동의 영역을 갖기 때문에, 인간은 과다와 과소의 조화를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적절한 중용(中庸)을 발견해야 한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역설하였다이라는 것을 버틀란트 럿셀이 웃기는 얘기라고 비판한 적이 있습니다. 아고라에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소크라테스는 문답법으로 사람들을 깨우쳐 주었습니다.

 

용기가 무엇인가?”, “무서운 것을 모르는 것이다”, “그러면 절벽에서 떨어지는 것도 용기냐?”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은 문답을 통해서 자기가 알고 있었던 것이 무지스러웠다는 것을 자각하게 하는 것인데 문답법의 과정도 중용(中庸)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가 있어요. 무지를 자각해 가는 과정을 근세에 헤겔은 변증법으로 설명했습니다. 자기가 처음 생각했던 것이 정()이고 거기 새로운 질문으로 반()이 주어지며 그 안티테제에 대해서 ! 그것이 아니구나하고 깨달아서 정()도 반()도 아닌 신테제(synthesis, )로 가게 되는 것을 변증법(Dialectic)이라고 합니다. 다이알로그(Dialogue)와 다이알렉틱은 어원적으로 같은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용기란 만용과 비겁의 골든 민이라고 했는데, 매우 그럴 듯한 것 같지만 너무도 유치한 말입니다. 서양 사람들은 덕목에 기하학적인 중()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떤 L.A시장의 퇴임연설에서 나는 시장 재임기간 동안에 정직(Honesty)과 부정직(Dishonesty)의 중도를 걸어왔다B. Russell, A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 pp.173-174. 최민홍()서양철학사(서울: 집문당, 1989) 264는 말을 했는데, 럿셀이 이것을 인용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론(中庸論)을 비꼬았습니다. 그 말은 깡패들하고 적당히 해쳐먹고 살았다는 말밖에 안 되는 거예요. 동양인들이 생각하는 중()은 기하학적인 직선상의 가운데가 아니고 동적 평형(Dynamic Equilibrium)입니. 즉 변화하는 세계에서 기하학적 발란스가 아닌, 동적 평형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하는 문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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