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1. 지나침과 모자람
子曰: “道之不行也, 我知之矣, 知者過之, 愚者不及也; 道之不明也, 我知之矣, 賢者過之, 不肖者不及也.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도(道)가 행하여지지 않는구나. 나는 그 이유를 알지. 뭘 좀 안다고 하는 놈은 지나치고, 어리석은 자들은 못 미치기 때문이다. 도(道)가 밝아지지 않는구나. 난 그 까닭을 알지. 현명하다고 하는 자는 지나치고 그렇지 못한 자는 못 미치기 때문이지. 道者, 天理之當然, 中而已矣. 知愚賢不肖之過不及, 則生稟之異而失其中也. 知者知之過, 旣以道爲不足行; 愚者不及知, 又不知所以行. 此道之所以常不行也, 도라는 것은 천리의 당연함으로 중(中)일 뿐이다. 지혜로움, 어리석음, 어짊, 불초의 과하거나 미치지 못하는 것은 태어나며 품부 받은 다름으로 중(中)을 잃은 것이다. 지혜로운 자는 앎의 지나쳤고 이미 도를 행하기에 부족하다고 여기며, 어리석은 자는 앎이 미치질 못하고 또한 행할 줄을 모른다. 이것이 도가 항상 행해지지 않는 까닭이다. 賢者行之過 旣以道爲不足知; 不肖者不及行, 又不求所以知. 此道之所以常不明也. 어진 자는 행동이 지나쳤고 이미 도를 알기에 부족하다고 여기며, 불초한 자는 행동이 미치질 못하고 또한 알 것을 구하지 않는다. 이것이 도가 항상 밝지 못한 까닭이다. |
2~11장까지는 모두 공자의 말을 인용한 형태죠? 이건 어느 정도 본래 공자가 한 말을 근거로 해서 후대에 만든 것일 수도 있고, 본래의 말이 그대로 내려온 것일 수도 있으나, 나는 중용(中庸)의 저자가 공자가 본래 한 말(original fragment)을 드라마틱하게 재구성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이 문장을 오래된 단편(Old fragment)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용한 것들을 보면 말이 대개 간략해요. 그래서 나는 원래의 말들이 문장으로 기록되면서 짧게 되었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최영애 교수에 의하면 그게 아니라 이런 문장들은 당대에 실제로 통용된 구어(口語) 같다는 거예요. 그럼 그때에 말이 이렇게 짧았을까? 짧았지! 옛날 사람은 말이 적었어요. 20세기 인간과는 달리 당시 사람들은 아구의 근육이 발달하지 않는 문명 속에 살고 있었던 겁니다.
여기서 ‘아지지의(我知之矣)’라는 말이 상당히 끊어지는 느낌이 드는데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요새 도(道)가 없어! 난 알지” 이런 투예요. 왜 이 말이 갑작스럽게 끼어들어갔느냐 하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공자 시대의 구어 속에서 문맥을 이해해야 할 겁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오는 두 구절은 의미의 맥락상 위로 붙게 되어 있습니다.
‘지자과지(知者過之)’ 맞는 말이죠. 출판계, 문화계를 보면 화가를 보든, 연극인을 보든, 김용옥을 보든 너무 지나치거든요. 특히 요새 주위를 보면, 발악이야 발악! 왜 책들을 그렇게 많이 써 가지고 사람을 괴롭히느냐 이겁니다. 생각해 보니까 나도 책을 지나치게 많이 썼어요. 왜냐면 나도 교수월급이 떨어진 상태에서 생계를 이어야하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죠. 하지만 이런 것이 문제가 있다 이겁니다. 여러분, 여기 대학로를 지나다녀 보면 알겠지만 연극 포스터들을 한 번 보세요. 쌩 지랄 발광들이야! 관객을 동원하기 위해 벼라별 아이디어를 내서 포스터를 만들어 붙이는데 한 시간쯤 지나면 딴 놈이 와서 그 위에 다른 것을 붙이니까 또 붙여야 되고…. 이거 괴롭기가 그지없는 노릇이죠. 그래서 안다는 놈은 경향성이 도에 넘친(excessive)단 말이야.
그런데, ‘우자불급야(愚者不及也).’ 여러분이 시골에서 살다 보면 처음에는, 시골 사람들이 순박하고 착해서 ‘이렇게 좋은 사람이 있냐!’고 찬양하지만 좀 지내다 보면 ‘아이고 이 답답한 새끼들하고 내가 어떻게 사냐. 못 미쳐도 이렇게 못 미칠 수가 있냐?’ 이렇게 되거든. 제가 전주만 가서 살아도 이런 걸 쉽게 느끼게 됩니다. 서울과 지방도시의 차이는 말이죠, 그 외면을 떠나서 내재적인 수준과 문화적인 수준이 가히 하늘과 땅 차이라구요. 너무 낙후되었어요. 이것 참 큰일 났어요.
4장 2. 대학 교육 자율화
엊그제 김삼룡 원광대 총장님하고 신라호텔에서 불란서 요리를 먹으면서 얘기를 나누는데, 그 분은 교육부 장관인 우리 누나한테 불만인 거야. “어쩌자고 대학 입학 정원을 풀어주는 겁니까? 원광대학만 해도 서울에서 오는 학생이 보통 40%나 되는데, 정원이 풀리면 우리 대학의 상당과가 폐과를 하게 되어서 대학을 지탱할 수 없을 겁니다. 우리 대학뿐만 아닙니다. 지방대학들이 다 문제가 있고 특히 전문대학들은 난리가 났어요…” 맞는 말이죠. 재수생 25만이 정체되었다는데, 정원이 풀리면 지방으로도 안 가겠고 전문대학에도 안 들어가려고 하겠죠. 전문대 가는 이유가 뭡니까? 4년제 대학정원을 풀어버리면 어떤 바보가 전문대학에 가겠느냐구요. 그리고 지방대학의 문제도 심각하겠지요. 그런데 내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선생님, 왜 그리들 걱정하십니까? 학생들이 안 오면 폐과를 하고 교수를 내쫓으면 될 거 아닙니까? (재생 웃음) 그렇게 간단한 걸 가지고..”
“아니, 도올선생,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나야 교수가 아니니까 맘 편하게 얘기할 수 있죠. 그러나 내 말은 당연한 거예요. 회사가 부도가 나면 직원들이 회사를 떠나야죠. 대학교수라고 영구직이라는 그런 엉터리 보장이 어딨어요? 학생이 없으면 자연히 교수는 없는 겁니다. 도올서원에 학생 안 오면 도올서원은 당장 없어져요. 어떻게 지네들만 성역이라고 생각하느냐 이 말입니다.
지금 한국지성풍토에도 근본적인 사고의 변화가 와야 해요. 앞으로 대학 세계에도 자유 경쟁 시대가 오면 학자가 그저 학자라는 이유만으로 보호받을 수가 없습니다. 폐업할 놈들 폐업하고 문 닫을 곳들은 문 닫어야지. 여러분 남미 같은 데는 말이죠, 대학 문을 열어놓고 “오십쇼, 오십쇼” 해도 대학에 안 와요. 근데 우린 25만의 재수생이 정체되고 머리가 터지도록 대학만 가려고 난리들인데 국가 제도 때문에 못 간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학생들이 대학에 가고자 하면, 어떤 경우라도 그 해에 들어갈 수 있어야 됩니다. 그것만은 최소한 문교부가 보장해야할 일입니다. 자기 돈 내고 대학가고 싶다는 국민의 욕구를 충족 못 시킨 데서야 말이 됩니까? 도대체 뭐가 정치예요? 그러고 나서는 대학이 어떻게 운영되든 말든, 대학이 도태되든 말든, 학생들이 데모해서 총장실을 깨엎든 말든 놔두라 이겁니다. 교육부는 그런 거 개의하는 데가 아녜요. 그것은 대학의 자체 플랜에 속하는 문제입니다. 이제는 개념이 바뀌어야 합니다. 너무도 당연한 것을..
그래서 총장님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요. 원광대 교수도 떠날 분들 떠나셔도 원불교의 종교정신이나 조용히 지키셔도 될 텐데 뭘 그렇게 걱정하십니까? 그러나 원광대 정도만 되도 이미 훌륭한 특성을 갖춘 대학이기 때문에 정원 푼다고 해서 쉽게 무너질 수는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기존 대학이 함부로 정원을 풀 리도 없고.. 결국 대학 자체의 자율에 의해서 조정되어 가게 될 겁니다.”라고 제 생각을 말씀드렸어요.
그리고 어느 과든 4년을 공부해야 된다는 것도 웃기는 거야. 이게 도대체 누가 만든 법칙입니까? 커리큘럼 짜다보면 교과과정이 5년도 될 수 있고 3년도 될 수 있고 2년도 될 수가 있는 거지. 각 과마다 그 특성에 따라 공부해야 하는 기간이 다를 수밖에 없는데, 이런 엉터리가 어딨어요! 또 초급대학, 전문대학, 일반대학의 구분이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아까 그 문젠 이렇게 해결할 수 있다 이 말이야. 왜 꼭 대학을 4년 댕겨야 되요? 무슨 놈의 비서학과를 4년씩이나 하고 있어야 하냐고. 앞으로는 교육부가 획일적으로 묶어 왔던 제도들을 과감히 다 풀어버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나라 교육은 살 수가 없어요. 당분간은 혼돈이 오겠지만, 할 수 없는 거 아닙니까? 너무도 당연한 것을 이해하지 못해서 잘못되고 있는데. 이것 참! 내가 무얼 하다가 이렇게 삼천포로 빠졌지? 삼천포 재생이 또 항의하시겠네?(웃음) 또 샛길로 빠져 버렸어!….
4장 3. 지자(智者)ㆍ우자(愚者)는 인간세의 문제다
어쨌든 지자(知者), 우자(愚者)의 문제는 항상 인간세에 있는 문제라는 겁니다. 과(過), 지나치고, 불급(不及), 미치지 못해! 여기서 지자(知者), 우자(愚者) 문제는 물론 내가 말한 바이오로지칼(Biological, 생물학적)한 것이라기보다는 문명이라는 조건 속에서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문명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행동방식을 살펴보면, 대개 지혜로운 자들은 익세시브 트렌드(Excessive trend, 과도한 경향)가 있고, 어리석은 자들은 인서피션트 트렌드(Insufficient trend, 부족한 경향)가 있다는 말이겠죠?
근데 도가(道家)는 여기에서 어느 쪽을 찬양했느냐 하면, 우(愚) 쪽으로 치우쳤어요. 노자의 ‘큰 지혜는 마치 어리석은 것과 같다[大智若愚].’란 말이 기억납니까? 우(愚)를 유가(儒家)는 불급(不及)한 상태로 보았으나, 도가는(문명에 대한 안티테제가 있기 때문에) 오히려 완정(完整)한 걸로 보는 겁니다. 그니깐, 유가사상은 기본적으로 문명론적 철학이라 할 수 있고, 그런 의미에서 중용(中庸)은 유가 정통주의지! 그러기 때문에 중용(中庸)이란 것이 주자에게 아필된 거예요. 그럼 본문을 다시 풀어봅시다.
‘두지불명야(道之不明也, 따오즈뿌밍이에)’, 도(道)가 밝혀지지 않고 있다는 탄식이죠?
‘아지지의(我知之矣, 워찌즈이)’, 왜 그런지 난 알아. “현명하다는 놈은 지나치고, 불초한 놈은 거기에 못 미치기 때문이지.”
4장의 문장은 하나의 중국적인 맛이 들어있는데, 문장을 나란히 병행시켰죠? 모든 문장의 레토릭에는 패러릴리즘(Parallelism, 대구법)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말 두 마리가 나란히 달리고 있는 스타일을 보여준다고 해서, 이런 형태를 변문체(騈文體)라고 해요. 이것은 강조의 뜻도 있고, 반복의 뜻도 있고, 바리에이션(Variation, 차이) 등 여러 가지가 연결되는 테크닉입니다. 공자님 말씀이건 맹자(孟子)님 말씀이건 옛 성현들의 말에 담긴 레토릭의 다이네믹스(Dynamics, 역동성)는 대단합니다. 예수는 무식한 사람이래서 그랬는지 그 희랍어를 보면 이런 양식적 기교는 비교적 적은 편입니다. 좀 더 진솔하다고 할 수도 있겠죠.
‘도지불행야 아지지의 도지불명야 아지지의(道之不行也 我知之矣 道之不明也 我知之矣)’라는 변문(騈文)을 일단 내걸고 다음에 마무리 짓는 말이, 캬, 결정적인 말을 가지고 딱 쳐버리고 있죠? “현자과지 불초자불급야(賢者過之 不肖者不及也)” 여기 불초(不肖)에서 초(肖)는 ‘같다’는 의미인데. 아버지한테 자기를 불초소자(不肖小子)라고 말할 때, 이것은 “아버지와 같지 못한 부족한 저”라는 뜻이고, 일반적으로 말할 때는 ‘수준 미달’의 의미입니다. 어떤 문명적 의미의 준거(criteria)에 비춰 봤을 때, 평균 수준(average standard)에 못 미친다는 뜻이죠. 여러분들 ‘같지 않은 새끼’란 말 쓰지? 그게 불초(不肖)라는 의미예요. 비슷하지 않은 새끼가 비슷한 것처럼 폼 낸다고 할 때 쓰는 거죠. “그런 같지 않은 새끼는 못 미친다” 이 말이죠. 전에 말했다시피 중용(中庸)은 과불급(過不及)의 사태에 대한 다이내믹 이퀼리브리엄(Dynamic Equilibrium, 역동적 평형)이라고 했죠.
4장 4. 그 맛을 아는가?
人莫不飮食也, 鮮能知味也.” 사람들이 먹고 마시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 맛을 아는 이가 드물구나.” 道不可離, 人自不察, 是以有過不及之弊. 右第四章. 도는 떠날 수 없지만 사람이 스스로 살피지 않기 때문에 과함과 미치지 못하는 폐단이 있는 것이다. 오른쪽은 제4장이다. |
그래서 그 다음에 명언이 나옵니다. 공자님 말씀이 “인막불음식야 선능지미야(人莫不飮食也, 鮮能知味也).” 음식을 먹고 마시지 않는 사람은 없지만 그 맛을 아는 이가 드물다라고 했습니다.
최근에 중국의 리얀 감독이 만든 영화 중에 『음식남녀(飮食男女)』란 게 있죠. 그거 한 번 꼭 보세요. 걸작입니다. 평범한 자기의 음식문화를 가지고 그렇게 심미적(aesthetic)인 화면을 구성한다는 것이 대단한 것이거든요. 영화 자체의 내용은 멜로드라마에 불과하지만, 난 상당하다고 평가하는 작품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알고 있는 중국음식은 중국음식이 아냐. 그냥 기름에 지지고 볶은 것에 불과해요. 중국요리는 기본적으로 기름에 볶고 튀기는 게 많지만, 중국요리의 미학은, 북경 고급요리로 갈수록, 기름을 쓰되 어떻게 기름의 느끼한 맛이 느껴지지 않도록 만드느냐 하는 데 있어요. 뿐만 아니라 다양한 한약재에서 개발된 향료를 쓴다는 거예요.
이에 반해 한국요리의 가장 불행한 사실은 향료개념이 없다는 겁니다. 한국음식의 향료는 마늘, 파 밖에 없어요. 이 지겨운 마늘, 파에 중독이 돼서 도대체 음식이 뭔지 몰라! 이런 몰상식한 인종이 어딨냐 이거야! 이게 큰 문제예요. 우리 어머니 세대까지만 해도 요즘처럼 무지막지하게 조미료를 쓰지 않았습니다. 한국여자들의 성장과정을 보면 어릴 때는 남자들과 비슷하게 지내다가 중ㆍ고 시절에도 그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공부밖에 없어요. 그래서 엄마들은 자기 딸이 부엌에 들어오면 큰일 나는 줄 알뿐입니다. “얘야 너는 손에 화장품이나 바르고 공부나 열심히 할 일이지 부엌에는 얼씬도 하지 말아라….” 그렇게 대학 들어가서 4년 보내고 뭐하다 보면 스물 대여섯에 시집가. 그렇게 되면 정말 ‘갑자기’ 얘가 엄마가 되는 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얘들이 갑자기 엄마가 되니 엄마 노릇이 되냐 이 말이요. 부인 노릇하고 엄마 노릇한다는 것이 얼마나 도(道)가 필요한 건데, 거기에 대한 준비가 일체 없어요. 이런 것까지는 좋다고 쳐. 이런 것까지는 좋은데, 이것의 결과로 결국 한국 여성들에게 이어져 오던 문화가 전멸해 버렸어요. Korean food culture is gone!
내가 말이죠, 이리에 있을 땐 그렇다 치고, 전주를 갈 때는 기대를 좀 했어요. 그곳은 예로부터 유명한 양반 도시고, 전주비빔밥이니 어쩌고저쩌고 손꼽았던 데가 아닙니까? 근데 야?? 이거 큰일 났어! 음식점이 한군 데도 제 맛을 내는 데가 없어요. 20년 전에 내가 전주 갔을 때만 해도, 어느 음식점을 가든지 음식이 수준급이었는데, 20년이 지나니까 완전히 변했드만. 이런 문제는 심각한 거예요. 이런 말이 있거든. ‘귀명창이 있어야 소리명창이 있다.’ 판소리에 재능을 가진 사람이 없는 게 아니라, 문제는 대한민국 문화수준에서 송만갑이를 길러낼 수 있는 귀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판소리꾼이 생겨날 수가 없어요. 생각해 보십시오. 노래를 부르면 비평이 들어와서 평가가 되고 해야 차츰 자신을 다듬으면서 송만갑처럼 되는 거지, 판소리를 돼지 목 따는 소리로 부르든, 오페라식으로 하든 그런 데는 전혀 신경을 안 쓰고 그저 어린애들이 얼굴 예쁘다고 영화에 나와서 부르면 그걸 또 판소리인 줄 알고 좋아하니 그 수준이 말이 아니라고. 이래 가지고서야 우리 문화가 제대로 되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음식문화에서도 미식가가 없기 때문에 한국의 음식들이 형편없어지는 겁니다. 그니깐 남자가 입맛이 좀 까다로와야 해요. 까다로운 걸 다들 나쁘다고만 하면서, ‘우리 남편은 까다롭지가 않아서 아무거나 꿀꿀이 죽처럼 만들어 줘도 잘 먹으니 좋다…’ 이거 정말 되겠습니까? 여자가 못하면, 음식의 맛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라도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서 예술(art of cooking)을 배워야 해요.
미국 유학 가서 보니깐 중국의 남자들은 대개 일류 요리사들이예요. 지금은 개판되어 가고 있지만 그들의 그런 문화가 아직까지는 어느 정도 살아있단 말야. 그래서 유학생들끼리 모여도 앞치마 착 걸치고 부엌에서 뚝딱뚝딱하면 그래도 수준급 음식을 만들어 가지고 나옵니다. 그치만 우리나라 남자들은 그게 안 되거든. 그래서 음식 문화가 타락의 극치로 가고 있는데 이게 문제가 있단 말이예요.
그래서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인막불음식야 선능지미야(人莫不飮食也 鮮能知味也)” 인간치고 먹고 마시지 않는 놈이 어디 있느냐, 이거야. 근데 문제는 그저 먹고 마시는 게 아니라 그 참 맛을 아느냐는 겁니다. 진정한 그 맛을 아는 놈이 드물다는 애기죠. 햐, 이거 대단한 문장입니다. 한문의 맛이란 게 바로 이런 거예요. 여러분 ‘도(道)’하면 뭔가 대단한 걸로 알고 있잖아요? 근데 앞에서 ‘도지불행야(道之不行也)~ , 도지불명야(道之不明也)~’ 하고 나오다가, 그 결론이 뭐야? 우리가 항상 먹는 음식이야, 음식! 이게 바로 중용(中庸)입니다. 4장의 논리구조가 절묘하게 되어 있죠? 그니까 먹는다고 다 음식이 아니라니깐. 지킨다고 중용(中庸)이 아니라니깐. 그 맛을 알아야지! You‘ve got to know taste!
4장 5. 맛의 판단은 느낌이다
그러면 도대체 맛이라는 게 뭡니까? 칸트는 제3비판에서 뭐라고 했냐면, 심미적 판단의 근본은 ‘맛’이라 했거든요. 판단력이란 말은 바로 ‘맛을 안다’는 겁니다. 맛의 판단은 느낌(feeling)이며 개념(concept)이 아닙니다. 한 건물에 대한 개념적 지식과 그 건물에 대한 맛(아름다움)의 느낌은 다른 것입니다. 맛, 맛이라는 것은 절묘한 것입니다.
요새 최교수가 집에 없어서 한 아주머니가 와서 고깃국 같은 걸 끓여놓고 가는데…… 여성 동포들을 위해서 내가 이걸 또 강의를 해줘야지. 고깃국 하나를 제대로 못 끓이는 불행한 이 현실! 미국에 가보면 말이죠, 고기가 많아요. 안심 같은 고기가 수 파운드에 몇 푼 안합니다. 그래서 모였다하면 고기! 고기야, 좌우지간. 우리 어렸을 때는 고기에 굶주렸으니깐. 유학생 부부가 이런 자리를 만들어서 초대를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요새 젊은 부부들이 집에 나를 초대하기도 하는데, 그런 집에 가기가 공포스러워요. 젊은 부부들이 최선을 다해서 상을 차려주기는 하는데… 들어가면 일단 차를 내와요. 그러면서 잣 같은 것을 몇 개 탁 떨어뜨려 놓고 폼을 내는데. 하유~ 나는 이럴 땐 정말 괴로와집니다. 잣이라는 것은 말이죠 엄청난 탈취제(deodorant)거든요. 있는 냄새란 냄새는 다 빨아들인단 말이죠. 그래서 잣을 냉장고에 넣어 놓으면 김치 냄새에서부터 오만가지 냄새를 다 빨아들입니다. 그렇게 냉장고에서 내 온 그 잣을 씹으면 세상에 없는, 기가 막히게 오~묘~한 맛이 나는 거예요. 여기서부터 당하기 시작하는 거죠.
다음에는 고깃국을 끓여가지고 내오는데…. 어이구 내, 차~암, 여러분에게 이런 걸 강의해야 되다니! 여러분 이걸 알아야 되요. 고기라는 건 말야 피예요, 피! 피냄새에는 노린내가 배어 있어요. 보통, 사람들이 수퍼마켓에서 고기를 사서 고기가 아깝다고 물로 슬슬 씻어서 툭툭 썰어서 끓이면 제대로 된 고깃국인줄 알아요. 근데 문제는 거기서 노린내가 난다 그 말이야. 그래서 안 되겠으니깐 마늘을 쳐 넣고, 생강을 쳐 넣고, 파를 썰어 넣고, 거기다가 고추장을 바가지로 넣어가지고 끓이는데 기름이 둥둥 떠 있고 파쪼가리가 있으면, ‘이게 기맥힌 매운탕이다!’라고 하는 겁니다. 이게 돼지 밥통에나 갈 것이지 어떻게 그게 매운탕이냐 이 말이요. 게다가 미원까지 삽질을 해 퍼붓고. 웃기는 얘기지. 이걸 내놓고 먹으라고 하니. 이건 정말 사약보다도 더 먹어주기가 괴로운 겁니다.
여러분 뼉데귀든 갈비찜이든 모든 고기 요리는 말이예요, 우선 초를 좀 넣고 (후추나 마늘을 넣어도 좋다) 15분 가량 푸욱 끓여요. 그러면 거품이 부글부글 올라오죠? 그 다음에 그 거품만 걷어내는 것이 아니라, 싹 엎어서 내버려! 고기 국물이라고 아까와 하질 말고 주저 없이 내버리고 고기만 건져서 그걸 박박 씻어요. 그러고 나서 마알간 물에 끓이는 거야. 이때 그 고기는 맛이 제대로 유지되는 거예요. 모든 고기덩어리는 유통과정에서 더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으로 그냥 요리하는 것은 말이 안 되요. 석유냄새가 마늘로 없어지겠습니까? 그리고 모든 고기 국물은 설농탕이든 곰탕이든 매운탕이든 마알개야 되는 겁니다. 탁한 데까지 가면 그 고기나 뼈다귀는 못 쓰는 거예요. 항상 향료는 마지막 단계에 쎈스있게 가미하는 겁니다. 이건 매우 간단한 힌트인데 한국 여성 중에 이걸 지킬 줄 아는 사람이 과연 0.0001%나 될까? 또 대부분의 사람들이 곰국 같은 것은 무조건 오래 끓이면 좋은 줄 아는데 잘못된 겁니다. 끓이는 과정도 다이내믹 프로세스(Dynamic process, 역동적인 과정)인데 그것은 중용(中庸)의 도가 있는 겁니다. 국이 끓는데 무우를 썰어 넣어도 무우 색깔이 가장 밝게 나타나는 때가 있습니다. 그 순간에 곧바로 스톱! 하란 말이야. 그걸 자꾸 끓이면 점점 뻘개지고 뿌옇고 탁해져 버려요. 한국 사람들은 걸쭉한 것이 좋은 줄 아는 데, 고깃국 하나 끓이는 데도 지나치지 않고 불급(不及)하지 않는 중용(中庸)이 필요하다는 걸 좀 깊이 새겨들으세요. 처음에는 스톱해야 할 순간을 알아내기 힘들지만 자꾸 음식을 만들다 보면 공력이 쌓여서 느낌으로 알 수 있거든요. 이렇게 음식에는 가장 적절한 그 맛이 있습니다. 김치도 마찬가지죠. 김치가 익는다고 그러잖아요? 대개 김장김치가 제 맛을 내는 기간은 1주일도 채 안 되요. 11월말에 김장을 담궜다면 1월 초 경의 1주일 동안에 김치가 베스트 향기를 발합니다. 그 시기가 지나가면 또 지나치게 되는 거죠.
이렇듯 모든 맛의 구조에는 과불급(過不及)이 있단 말이예요. 그니깐 중국인들은 『음식남녀(飮食男女)』란 영화를 만들 수 있었던 거죠. 그런 게 다 엄청난 철학적 주제가 될 수 있거든요. 일상적인 데서 제 맛(Geschmack)을 아는 것, 그것이 중용(中庸)의 핵심입니다. 공자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람치고 먹고 마시는 것을 모를 리 없건마는 그 맛을 아는 이가 드물구나!”
▲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한 장면.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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