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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도올선생 중용강의 - 3장 본문

고전/대학&학기&중용

도올선생 중용강의 - 3장

건방진방랑자 2021. 9. 16.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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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졸업 대신 승당례로

 

 

오늘 강의할 내용은 중용(中庸)에서 가장 오래된 프래그먼트로서 공자의 말씀의 인용의 양식을 취하고 있다. 이 내용이 다 문자 그래도 공자의 말이라고는 속단할 수 없어도 거의 대부분이 논어(論語)의 단편들과 동일한 전승임을 말해주고 있다. 공자의 어록 중에서 중용(中庸)과 관련되는 내용만을 간추린 이 내용은 아마도 가장 강렬한 유교철학의 표방일 것이다. 구절구절마다 우리의 일상적 사고의 허점을 찌르고 들어오는 그 맛이 참으로 짜릿하다.

 

모레 야회를 가는데 서원 측에서도 여러 준비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도올서원에서 하는 일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에요. 작은 일에도 엄청난 공력이 들어가고 많은 생각을 해서 프로그램을 진행시키기 때문에 보통 놀러 가는 것과는 질이 다르다는 걸 유념해 주셨으면 합니다. 또 하나 말씀드릴 것은 스케줄 변경이 있다는 것인데, 금요일에 황병기 선생께서 오시기로 되어있었죠? 그런데 그날 이화여대에서 대학입학 실기시험이 있는 관계로 황병기 선생님 강의는 1910시로 옮겨질 것이고 금요일은 내가 강의하도록 하겠습니다.

 

210에 졸업식이 있을 텐데 졸업식이란 말은 일본말의 소츠교(そつぎょう, 卒業)’라는 데서 따온 겁니다. 이 말이 별로 좋은 것 같지 않아서 1, 2()때는 졸업식을 필업식이라고 했었는데 이것도 삐에(畢業)라고 해서 중국에서 쓰고 있는 용어거든요. 어째든 둘 다 마친다는 뜻이죠.

 

그래서 어제 연구원인 오항녕 선생이 필업이라는 용어를 바꾸는 게 어떠냐고 제안을 했어요. 논어(論語)에 공자의 여러 제자들이 자로(子路)의 행동에 대해 많은 비판을 하는 상황에서 공자가 자로를 옹호하면서 유야승당의 미입어실야(由也升堂矣, 未入於室也)”라는 말을 합니다. 옛날에는 집을 들어갈 적에 돌계단을 올라 대청마루에 올라가는 것을 승당(升堂)’이라고 하고 거기서 방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입실이라고 했는데 이 말들은 학문의 성취, 공부의 정도를 뜻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공부를 하는 것은 단지 이 과정을 끝내고 학업을 그만두기 위한 것은 아니죠. 그것보다는 오히려 더 수준 높은 차원의 학문의 길로 나아가기 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입실(入室)’이라는 것은 학인(學人)들이 끊임없이 지향하는 최종단계니깐 지금 거론할 수는 없고, 공부를 끝낸 것이 아니라 시작한다는 의미에서 필업식이란 말을 승당례(升堂禮)’라고 바꾸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을 해왔습니다. 영어로도 졸업식을 커먼스먼트(commencement)’라고 하는 데 그것 역시 끝났다는 뜻이 아니라 사회적 삶의 시작개시라는 뜻입니다.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보니까 좋은 생각인 것 같아서 이 안을 채택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도올서원 필업식을 앞으로는 도올서원 승당례라고 부르기로 하겠습니다. 이렇게 도올서원의 전통은 하나 둘 만들어 가는 겁니다. , 오늘은 삼장(三章)으로 들어갑니다.

 

 

 

 

32. 오래 실천하기 힘들다

 

 

子曰: “中庸其至矣乎! 民鮮能久矣!”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중용(中庸) 그것은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것을 오래 실천할 수 있는 자가 드물 뿐이다.”
 
過則失中, 不及則未至, 故惟中庸之德爲至. 然亦人所同得, 初無難事, 但世敎衰, 民不興行, 故鮮能之今已久矣. 論語無能字. 右第三章.
과하면 중()을 잃고, 미치지 못하면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오직 중용의 덕이 지극함이 된다. 그러나 또한 사람이 함께 얻은 것으로 처음엔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다만 세상의 가르침이 쇠하여 백성들이 흔쾌히 실행하지 않기 때문에 드물게 그것을 행하여 지금은 이미 오래 지나 버렸다. 논어에는 ()’ 자가 없다. 오른쪽은 제3장이다.

 

주자 주()를 보면, ‘()은 상성(上聲)이고 하동(下同)이라()은 상성인데 아래 문장에서도 동일하다이라고 했습니다. 중국어는 토날 랭귀지(tonal language), 성조어(聲調語)인데, 그리고 성조(聲調)는 네 가지, 즉 평성(平聲상성(上聲거성(去聲입성(入聲)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성조(聲調, tone)란 것은 단음절(monosyllable) 단어의 발음의 고저에 따라서 의미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의미의 변화가 없으면 성조가 될 수 없죠. 예를 들어 ‘maˇ, má, ma, mà’에서처럼 높낮이의 변화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 조선조 사람들이 한문을 외울 때 뜻만 외운 게 아니라 성조도 같이 외웠습니다. 독일어도 성()의 구별이 있어서 단어 하나하나마다 성()을 다 외워야 관사를 결정할 수 있듯이, 한문도 운서(韻書)를 같이 놓고 그걸 보아가면서 성조(tone)을 같이 외워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옥편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네모 속에 글자가 씌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텐데, 네모 귀퉁이의 한 군데에 반드시 동그라미가 하나씩 있습니다. 좌변 아래쪽에 동그라미가 있으면 평성이고, 좌변 위쪽에 동그라미가 있으면 상성, 우변 위쪽에 동그라미가 있으면 거성, 우변 아래쪽에 동그라미가 있으면 입성을 의미하지요.

 

그래서 ()’은 상성(上聲)이라고 할 때, ‘()’은 제1성 시앤이고, ‘드물다는 뜻이며 하동(下同)’이란 것은 앞으로 나올 선()이라는 단어는 모두 이와 같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성()을 밝히는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성에 따라서 의미가 바뀌기 때문이죠.

 

그 다음 주()를 보면, ‘지나치면 중()을 잃고 못 미치면 중()에 이르지 못한다. 그러므로 중용(中庸)의 덕()만이 지극한 것이다[過則失中, 不及則未至, 故惟中庸之德爲至].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위지(爲至)의 지()를 주자는 궁극적 기준(ultimate standard)의 의미로 풀었는데, 꼭 이렇게만 볼 게 아니고 여러 해석 방식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여러분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내가 주자 주()를 읽어주는 것입니다. 위에서 위지(爲至)’로 표현하는 걸로 봐서 주자는 지()를 명사적 용법으로 본 것이죠. 물론 지극하다는 형용사적 뉴앙스와 다다른다는 동사적 뉴앙스로 같이 들어있지만요.

 

그 다음 문장을 봅시다. “그러나 또한 중용(中庸)은 사람들이 누구나 얻을 수 있는 것이고 처음에는 그다지 어려운 일이 없다[然亦人所同得, 初無難事]” 위 문장은 1()희노애락지미발위지중(喜怒哀樂之未發謂之中)”에서 배웠듯이, 어린애들 같은 경우를 미발(未發)의 상태로 볼 때, 특별히 그들에 대해서는 중용(中庸)을 논할 필요도 없고 어떻게 보면 걔들은 중용(中庸)에 쉽게 도달할 수 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 역사적 단계로 본다면 역사적 환경이 제대로 되어 있는 상태에서는 중용(中庸)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의미도 되겠죠.

 

 

 

같은 내용의 다양한 전승

 

다만 도덕적 타락(moral degradation)으로 세상의 가르침이 쇠하여서 사람들이 중용(中庸)을 기쁘게 행하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그것<中庸之德>에 능한 자가 드물고[능하기가 드물고] 그런 상태가 지금 이미 오래되었다[但世敎衰 民不興行 故鮮能之 今已久矣].” 그 다음에 논어(論語)에는 ()’ ()는 없다[論語無能字].”라고 했는데, 이 말은 논어(論語) 옹야(雍也)을 보면 中庸之爲德也, 其至矣乎! 民鮮久矣.”에서 ()’()’ 사이에 ()’자가 빠져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동양고전에도 공관복음과 같은 텍스트 크리틱이 있다.

 

논어(論語)중용(中庸)의 이 문구(文句)는 똑같은 공자의 말을 제자들이 기록하면서 달라진 것입니다. 신약성경의 경우를 보면 네 복음서 즉, 마태·마가·누가·요한복음이 있는데 같은 관점으로 쓰여져 있다는 의미에서 이것들을 공관복음서(共觀福音書, the Synoptic Gospels)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예수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오천명에게 나눠주었는데도 그것이 없어지지 않더라는 이야기는 네 복음서에 모두 들어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마태·마가·누가복음은 스토리나 배열이 비슷하고 순전히 예수의 전기를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거의 동일한 체제인데, 요한복음은 좀 변조된 체제입니다. 요한복음은 태초에 빛이 있었나니하는 식으로 좀 철학적으로 서술되어 있는데, 그래서 나는 그것이 영지주의(gnosism) 계통에서 성립된 복음서로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을 고려하더라도 네 복음서는 공통된 점들을 많이 갖고 있죠. 서양의 문헌비평(higher criticism)이란 바로 이 비슷한 4복음서의 비교연구로부터 발전된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공자의 말에 대한 기록도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납니다. 공자가 춘추시대에 존재했다고 할 때 동일한 시간적ㆍ공간적 상황에서 공자의 말들은 똑같이 전해졌을 겁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각기 다르게 받아들여졌겠지요. 여러분이 내가 지금 강의하는 내용을 받아 적는다 하더라도, 모두가 똑같은 내용을 필기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와 마찬가지로 역사적 공자(historical confucious)의 동일한 말들이 제자들에 따라 약간 다른 내용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텍스트 크리틱(Text critic)이라는 것이 서양에만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데 단지 우리가 인식하지 못했을 뿐이지 동양의 학문전통에 없는 것이 아닙니다.

 

 

 

선능구의(鮮能久矣)의 다양한 해석

 

그러면, 여기서 논어(論語) 雍也의 문장과 중용(中庸)의 문장을 비교하면서 해석을 해보도록 합시다. 주자 식으로 말하면 옹야(雍也)편의 구절은 중용(中庸)의 덕됨은 지극하도다 그러나 백성이 그것을 드물게 행함이 오래되었도다[中庸之爲德也 其至矣乎 民鮮久矣].”하는 식으로 해석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좀 무리가 있는 해석이란 말이예요. ‘선구(鮮久)’에서 ()’을 동사 취급할 수도 있지만, ‘선구(鮮久)’를 한꺼번에 동사로 보면 ()’가 본동사가 되고 ()’은 조동사적인 성격이 될 것입니다. 이런 관점으로 해석해 볼 것 같으면, “중용(中庸)의 덕됨은 지극하지만, 백성들이 그것을 오래 실행하는 자가 드물다(rarely practice)”라는 뜻이 됩니다. 따라서 민선능구의(民鮮能久矣)’백성들이 그것에 능치 못한지가 오래 되었도다라는 탄식으로 볼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선능구(鮮能久)’를 다 합쳐서 동사 취급했지요.

 

앞 구절의 지의호(至矣乎)’도 지극하다는 형용사로도 생각할 수 있지만, 차라리 다음 문장과 대비시켜서 동사로 보자 이겁니다. 그러면 ()’이르다, 도달하다의 뜻이 되겠죠? “중용(中庸)이라는 것은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이거야. “중용(中庸)은 대단한 것이 아니고, 일상적인 거라서 이를 수는 있어(You can reach the eauilibrium). 근데 그것을 지속시키는 자가 드물다.” 그 말이야! 이렇게 되면 포인트가 능구(能久)’, 지속시킬 수 있다에 있게 되죠. 어때? 내 해석이. 더 근사한 것 같지 않아? 주자의 해석에는 좀 억지가 있어요. 물론 5장에 지금 도가 행해지고 있지 않구나[道其不行矣夫].’라는 탄식이 있긴 하지만(행하여지지 않고 있는 것이 오래되었다는 맥락으로 해석한다면 주자의 해석과 더 깊게 연결될 것이다), 나는 위와 같은 해석을 취한 것입니다. 내 해석과 같은 라인에 있는 것이 정현의 고주(古注)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정현(鄭玄) 주를 보고 난 뒤에 내 학설을 주장한 게 아니라 내 학설을 먼저 내고 나서 혹시나 해서 정현 주를 보니까 그런 식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어찌나 기쁘던지요. 어쨌든 여러분도 이런 식으로 텍스트를 치밀하게 분석할 수 있도록 실력을 키우라는 뜻에서 설명을 해 준 것뿐입니다.

 

자아 그러면 이 구절에 대한 나의 최종석 해석은 :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중용(中庸) 그것은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것을 오래 실천할 수 있는 자가 드물 뿐이다.

 

 

民鮮久矣(옹야), 民鮮能久矣(중용)
何晏, 邢昺, 鄭子, 朱熹 鄭玄, 茶山, 檮杌
백성이 이 덕 실천하기를 드물게 된 지 오래되다 백성들이 오래도록 실천하기가 드물다

 

 

 

 

33. 중용의 인체관

 

 

내가 살면서 느껴 볼 때, 중용(中庸, 은 범용한 것이라고 했잖아요?)은 아주 평범한 것입니다. 하등에 어려운 것이 아니예요. 그런데도 중용(中庸)을 실행하기가 어려운 것은 바로 지속성(continuity)’ 때문이죠. 이건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전에 말씀드렸듯이 김용옥이 해석하는 중용(中庸)호미오스타시스(Homeostasis)라고 했죠? 호미오스타시스란 도대체 뭐냐?

 

여러분, 추우면 떨고 더우면 땀이 나죠? 추우면 왜 몸이 떨리는 줄 아십니까? 인체는 옆의 그림처럼 밀폐된 세계이고 독립된 공간입니다. 물론 많은 구멍들이 있어서 외부와 교섭작용(communication)을 하고 있지만은요. 이렇게 밀폐된 공간의 명백하고 중요한 특성은 ‘36의 온도를 유지하는 우주라는 겁니다. 인체 외부의 우주 온도가 체온과는 아무리 다르더라도 인체라는 우주는 36의 상태를 유지하며 살고 있으며, 만약 이 상태가 결정적으로 파괴되면 죽게 되죠. 포유류와 조류는 이런 항온을 유지하고 있는데, 뱀 같은 냉혈동물도 체온이 없는 게 아니라 인체가 항온을 유지하는 것과는 달리 외계의 온도의 변화에 따라 체온이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실 생물학에서는 냉혈동물(cold-blooded animal)이니 온혈동물(warm-blooded animal)이라는 속한 표현을 쓰지 않고 변온(變溫) 동물(poikilotherm)과 정온(定溫) 동물(homeotherm)이라는 용어로써 대신하고 있습니다. 온혈동물 즉 정온동물에 있어서는 이 온도의 항상성과 지속성 즉 호미오스타시스(Homeostasis)라는 메카니즘이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정온동물(온혈동물)에게는 체온조절(thermoregulation)이라는 메카니즘이 발달되어 있는데 반해서 변온동물(냉혈동물)에게는 그러한 메카니즘이 발달되어 있질 않습니다. 따라서 호미오스타시스라는 중용(中庸)은 변온동물에게는 크게 해당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변온동물은 모든 환경의 조건에 적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정한 환경의 조건이라는 국한성을 가지며, 자기에게 맞는 온도의 장소로 이동해 다니는 행동적 체온조절(behavioral thermoergulation)을 하게 되거나 그것이 불가능할 때는 동면과 같은 방법을 취하게 됩니다.

 

온혈동물 즉 정온동물의 최대의 강점은 바로 환경의 온도의 변화에 구애받지 않는 자체온도의 우주를 창조해냈다는 것이며 이것은 4계절의 변화나 지역에 따른 온도변화, 그리고 밤낮의 온도변화, 그러니까 모든 시간과 공간의 조건에 구애받지 않는 활동성을 보장받았다는 것이며 이것이 인간만이 유독 지구상 어디에서든지 자신의 생활영역을 개척할 수 있었던 가장 원초적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상황에서는 36라는 상온을 유지하기 위하여 극도로 효율적으로 열을 산출하고 방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바로 그 항상성이 항상 외계라는 변화하는 조건위에서 역동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 변화 속에서의 불변(constancy)이라는 평형을 그 몸이라는 우주가 유지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중용(中庸)이 말하는 시중(時中)’의 일차적 의미일 것입니다. 서양의학에서는 뇌하수체에 온도를 감지하는 센서(sensor, thermoregulator center)가 있어서 온도의 변화에 대응하는 작동을 하게 한다고 합니다. 지금, 서원 내부에 온도를 감지하는 센서가 있어서 실내온도가 낮아지면 보일러실로 신호를 보내게 되고 다시 그 보일러가 작동을 해서 실온을 높여주죠. 마찬가지로 인체도 센서가 작동하는데 그것이 추위 때문에 떨어진 체온을 감지하여 몸을 떨게 하면 몸전체가 움직이게 되니까 그 열로 체온이 상승하게 되어 일정 체온을 유지할 수 있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추울 때 왜 몸이 떨리는지 몰랐죠? 이게 상당히 재미난 시스템(system)’이라구요!

 

 

 

 

34. 불알과 혈액응고의 중용

 

 

불알이 체현화한 중용

 

그러면 더울 때는 어떻게 됩니까? 여기서, 쉽게 알 수 있는 남자의 불알고환(scrotum)의 경우를 예로 들어봅시다. 왜 불알이 밖으로 나와 있는 줄 알아요? 여학생들은 더욱 궁금하시죠?

 

여자의 경우는 자궁(uterus)을 지나서 훨씬 안쪽에 난소가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난소염이 맹장염 같은 질병과 혼동이 되는 경우가 종종 생깁니다. 어쨌든 남자의 정자는 불알안의 세미니퍼러우스튜불(seminiferous tubules)이라는 세정관의 내벽의 기저막의 원시생식세포가 분열과정을 거쳐 성숙하여 되는 것인데, 그 체세포가 아닌 생식세포가 분열(division)’되는 데 있어서 최적조건은 체온보다 낮은 상태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알이 몸통 밖에 달려 있는 거예요. 어떤 책에는 1가 낮아야 된다고 하고, 또 다른 책에는 4가 낮아야 한다고 쓰여져 있는데 후자가 맞는 것 같아요(32유지). 이처럼 의학 책도 정확한 것 같지만 애매하거나 제각기 다른 때가 많아요.

 

그리고 여러분, 집에 가서 유심히 한 번 살펴보세요. 불알 두개가 딱 이렇게 (

) 평행(balance)을 이루는 경우는 없을 겁니다. 대개가 한 쪽이 (대개 왼쪽이) 쳐져있어요. (

) …….내 것을 보니까 거꾸로더라구요. (재생大笑) 여러분 왜 이런 줄 알아요? 두개가 평행으로 되어 있으면 걸어 다닐 때 마찰이 많이 되어서 온도가 올라가겠죠? 그렇게 되면 정자생성(spermatogenesis)에 문제가 생기니깐 마찰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반드시 불알은 한 쪽이 낮게 쳐지도록 디자인되어 있는 것입니다. , 뜨뜻한데 앉아 있으면 불알이 축 늘어지죠? 남자들은 잘 알지? 그 이유는 불알을 몸통에서 멀리 떨어뜨리고 동시에 표면적을 넓혀서 빨리 열을 방출하려는 까닭입니다. 그러다가 추워지면 가장 먼저 불알이 오그라들어서 몸통 쪽으로 딱 달라붙죠? 그래야 표면적을 빨리 줄여서 불필요한 열의 방출을 막지. 그니까 불알처럼 기맥힌 중용(中庸)이 없는 셈입니다. 이렇게 인체는 정교하게 디자인 되어있어요. 불알만 보더라도 이 정도인데 정신 같은 것에 그런 디자인이 없겠습니까?

 

그래서 땀이 난다, 몸을 떤다 하는 것은 36라는 몸의 지속성(constancy)를 유지하려는 노력입니다. 우리가 밥을 먹으면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 등 여러 성분이 섭취됩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소화라는 작용에 의해 잘게 부숴지게 되죠. 그렇게 부숴진 것들이 글루코오스(glucose)니 아미노산(amino acid)이니 지방산(fatty acid)같은 연료들인데, 이것들이 체내로 흡수되는 거예요. 그리고 이런 연료들이 분해되는 과정에서 몸의 컨스탄시를 유지하기 위한 열이 발생되는 겁니다. 자동차의 경우를 보더라도 엔진에서 분사된 휘발유를 태울 때 거기서 발생하는 열 때문에 차가 움직이는 거 아닙니까? 휘발유가 분해되는 과정을 통해서만이 자동차를 움직일 수 있는 연료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세포도 열의 문제입니다. 열이 공급되지 않으면 인체는 가동이 안 되서 죽습니다.

 

그래서 노자의 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이라는 유명한 말이 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의 움직임은 항상 리터닝(Returning)하는 거다라는 뜻이죠. 메타볼리즘(Metabolism, 신진대사)이라는 말은 희랍어로 (, change, movement)’이라는 말예요. () 돈다는 말은 카타볼리즘(catabolism, 이화작용, )과 아나볼리즘(anabolism, 동화작용, )의 반복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몸이라는 거야말로 중용(中庸)의 구조입니다. 따라서 인체의 메카니즘은 물리적 측면이든 정신적 측면이든 모두 중용(中庸)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현대 의학의 호미오스타시스(Homeostasis)를 말하는 것이죠.

 

 

 

피남과 응고, 그리고 중용

 

그런데 이게 깨지면 어떻게 될까요? 예를 들면, 손에 상처가 나서 혈관이 파손되었을 때 이것은 파이프가 새는 거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겁니다. 동네 수도가 터지면 우리는 구청직원이나 시청직원을 불러 가지고 땜질해서 막는데, 인체는 바깥에서 불러올 사람이 없잖아요? 그래서 인체의 파이프가 터졌을 경우에 사후 대책이 없다면 아무리 정교한 시스템이라도 그걸로 끝나는 거죠.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혈관 안을 돌아다니는 피 자체에 응고 능력을 주었는데, 이것이 혈관 내를 흐르는 핼액자체에 구유되어있는 응집소(procoagulants)나 혈소판(platelet)같은 겁니다. 피브리노겐(fibrinogen)이 트롬빈(thrombin)이라는 단백효소에 의해 프브린 섬유(fibrin threads)로 전화되어 혈액의 응고를 형성하는 메카니즘은 생물학시간에 배웠을 거에요.

 

옛날에 흙벽을 바를 때 지푸라기를 섞어서 해야 잘 떨어지지 않고 제 모양이 갖춰지듯이, 인체를 지탱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섬유질입니다. 일단 빵구가 나면 혈소판과 백혈구가 그 부위로 집결합니다. 그래서 백혈구는 주위에 다른 세균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방어선을 쳐주고, 혈소판이 피를 응고시킬 시간을 제공해 주는 거죠.

 

그런데 더욱 중요한 점은 몸 자체에 구유되어 있는 사후 대처 능력은 반드시 양면성을 갖는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응고의 메커니즘(mechanism)만 발달되어 있다면 혈관이 즉시 꽉 막혀버리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인체에는 혈액 응고 작용이 있는가 하면 동시에 융해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어요. 내가 인체의 구조에서 놀란 것이 말이죠, 처음부터 비상사태를 준비하고 설계가 되어 있다는 겁니다. 몸 전체가 이런 식입니다. 인체는 결코 상황 상황에 대해 한쪽으로만 작용하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 피자체가 응집소(procoagulants)와 반응집소(anticoagulants)의 발란스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 몸의 피가 평소 응고 안 되고 흐른다는 것은 반응집소의 작용이 응집소의 작용에 대해 우세한 환경을 유지하고 있다는 뜻이며 혈관의 파열 등 외상이 생겼다는 것은 곧 응집소의 작용이 반응집소의 작용보다 우세한 환경을 형성한다는 뜻입니다. 피가 흐르지 않으면 응집소의 작용이 계속 우세하게 되는데 피브린이 형성된 후에도 피는 흐르기 때문에 응집소가 점차 제거되고 반응집소들이 곧 피브린 응집(clotting)을 다시 용해시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반응집소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헤파린, 유로키나제, 그리고 프라스민(plasmin) , 피르리노라이신(fibrinolysin)과 같은 효소를 생각할 수 있겠죠. 이 얼마나 절묘하고 정교한 우주입니까?

 

고혈압, 저혈압, 당뇨병, 혈우병 등 모든 질병의 문제는 결국 이 양면성(dual aspect)이 한 쪽으로 치우칠 때 생겨나는 것이에요. 이것이 의학의 가장 기본적인 상식이란 말입니다. 이걸 모르고서는 인간을 논할 수가 없어요. 이처럼 인체는 이러한 피드백 시스템(feedback system)에 의해 중용(中庸)을 유지하는데, 이것을 호미오스타시스(Homeostasis)라고 하고 물리학 용어로는 역동적 평형(Dynamic Equilibrium)이라고 부르는 거죠.

 

 

 

 

 

 

 

35. 중용의 우주관과 역사관

 

 

중용(中庸)의 우주관

 

그런데, 인체라는 우주뿐만이 아니라 천지라는 우주조차도 이러한 중용(中庸)의 체계로 생각한 사람들이 중국인들입니다. 요새 제기된 가이아 이론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지구의 여신이름에서 유래한 것으로 제임스러브록이 주장한 학설이다. 러브록에 따르면 지구는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로 그 위에 살고 있는 생물들의 생존에 최적조건을 유지해 주기 위해 언제나 자기 스스로 조정하고 스스로 변화한다고 한다. <경제용어사전>같은 것이 아주 새로운 이론인 걸로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데 그렇지 않아요. 우리 큰형만 해도 서양 학문만 해서 뭘 잘 모르고 흥분해서 떠드시거든요. “요새 무슨 새로운 이론이 나왔는데 그러 참 대단하고 참신하더라는 둥내가 보기에는 아주 시시한 이론을 가지고 대단하다고 흥분하신단 말이야. 그렇지만 아버지뻘 되는 형님이니까 겉으로는 내색을 안 하고, 맞장구치고 말아버립니다. 우리 집은 아침이면 큰형하고 누나하고 나하고 커피 한 잔하면서 얘기하는 것이 일과처럼 되어 있거든요. 근데 그런 데서조차 속 얘기를 잘 못할 때가 많죠.

 

아까 인체가 추울 때와 더울 때의 반응이 있었듯이, 우리가 우주를 다 헤아릴 바는 없지만, “우주는 각지에서의 변화(생성, 폭발, 충돌, 오염, 황폐 등)를 통해 살아있는 생물체처럼 대응하는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다라고 생각한 것이 가이아 이론의 골자입니다. 우주 전체를 놓고 볼 때, 지구는 쥐 좆털에 앉아있는 먼지만큼도 못할 정도로 쬐끄만 거 아닙니까? 그런데 인간의 관점에서만 편협하게 보니까, 지진이나 폭풍 등이 발생하면 야속하다, 대단한 일이 터졌다라고 떠들죠. 하지만 우주는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인간에게 친절할 수만은 없습니다. 노자도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고 했잖아요. 가이아 이론이 주장하는 게 전체를 파악하고서 거기에 맞게 생활을 잘 조절해서 살 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중용(中庸)의 역사관

 

이 얘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며칠 전에 어떤 분하고 얘기를 나누었는데 그 분의 외조카가 내 고등학교 동창이예요. 그 친구는 착하고 좋은 사람이긴 하지만 맛이 좀 간 애야. 요새 이 녀석이 완전히 기()니 이런 데 잘못 빠져서, 부부가 함께 도사가 되었다고 운명철학관을 개업을 해버렸어요. 하긴 육군 중위가 강도로 돌변할 정도의 세상이니깐 그 정도면 얌전하게 도는 거라고 볼 수도 있겠죠. 어쨌든 그놈은 만나기만 하면 운명론타령이에요. 세상이 다 사주팔자대로 갈 뿐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그분이 이놈과 대화하다보면 말이 안 통한대요.

 

DNA 결정론자들은 발생학적 단계로부터 죽을 때까지의 구조가 DNA의 구조가 다 씌어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몇 살 때 암이 걸릴 거라는 것도 DNA 사슬에는 다 프로그램 되어 있기 때문에 그 위치만 찾아내면 암도 예방할 수 있다라고 주장을 하거든요. ! 대우주의 역사가 펼쳐진다고 합시다. 이 백 억년의 파노라마를 한편의 긴 활동사진으로 비유한다면, 우주 역사의 전개과정 뒤에는 필름 칩(chip)을 갓(God)이라고 설정할 수 있겠죠. 이때 갓(God)의 활동사진 필름에서 우주의 운명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50억만 년 전 지구 발생함 기원전 몇 년 한국 문명이 일어남 몇 년에 망함이런 드라마를 다 예견할 수 있다고요. 이게 어김없는 운명이란 겁니다. “난 이 모든 걸 도통했단 말야하면서 그 조카 녀석이 구라를 친다 이겁니다. 아주 그럴듯한 얘기지만 나는 이게 다 생각이 모자라는데서 오는 미친 소리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상상력으로만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데 천지론은 그런 논의를 거부합니다. 다시 말해서 천지는 우주역사의 프로그램 자체가 결정론적으로 고정되어 있는 구조가 아니라, 오히려 천지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이 프로그램 자체를 결정하는 구조입니다. 설령 우주의 DNA 같은 게 있다고 쳐도, 이미 결정된 우주의 DNA가 있고 이에 따라서 우주의 파노라마가 일방적으로 펼쳐지는 게 아니라, 우주의 파노라마 그 모든 것이 우주의 DNA를 끊임없이 결정해가는 그런 상호영향적인 구조가 바로 천지의 구조입니다. 그렇게 되면 가이아란 놈이 그때그때에 중용(中庸)적으로 상황에 맞는 대응을 해가겠죠?

 

여러분! 역사의 목표는 필름이 우리의 바깥에 설정되어 있는 그런 단순한 것이 아니예요. 다시 말하면 역사는 필름의 파노라마 자체가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액터(Actor)들이 서로 참여해서 그 플롯(Plot) 자체를 계속 재구성해 나가면서 영화를 만드는 것과 같은 것이란 말예요. ‘한 작가가 우주를 만든 것이다라고 생각한 것이 바이블의 단순한 생각이죠. 이게 중동 사막문명에서부터 오늘날 물리학자까지 버리지 못하는 고약한 사고습관이에요. 사막 문명에서 나온 모든 사유들은 이렇게 일방적입니다. 알라신을 찾든 여호와를 부르짖든 마찬가지예요. 이에 비해 천지론의 천지는 신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서양처럼 일방적인 갓(God)이 아닙니다. 여러분 자체가 갓(God)이요, 천지입니다. 여러분 자체의 행동이 주체적으로 천지의 법칙을 결정해 나가는 것입니다. 우주의 드라마는 쌍방적이며 인터액티브(Interactive)하며 상황적이며 조절적이며 형성적이며 과정적입니다. 이것이 중용(中庸)적 세계관의 중요한 측면 중에 하나라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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