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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도올선생 중용강의, 1장 - 1. 네이춰(Nature) 와 너춰(Nurture) 본문

고전/대학&학기&중용

도올선생 중용강의, 1장 - 1. 네이춰(Nature) 와 너춰(Nurture)

건방진방랑자 2021. 9. 16.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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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네이춰(Nature) 와 너춰(Nurture)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라는 구절에도 문제가 많습니다. 사실 ()’라는 것을 일본사람들은 코레오(これを, 그것을)라고 합니다. , ‘하늘이 명하는 것[天命]’ ‘그것을[]’ ‘일컬어 성이라고 한다[謂性]’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해석한다면 천명위지성(天命謂之性)’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중국어에서는 목적어가 동사 다음에 오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구절의 지위(之謂)’위지(謂之)’가 어떤 차이가 있느냐는 문제가 해결이 안 됩니다.

 

같은 시기에 성립되었다고 추정되는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을 보면 형이상자위지도 형이하자위지기(形而上者謂之道, 形而下者謂之器)’라고 해서 위지(謂之)’라고 하지 지위(之謂)’라는 말은 없거든요. 그래서 나는 이 ()’()’이라는 동사를 강화시키는 허사적 용법으로 천명지(天命之)’라고 붙여서 해석합니다. 그러면 하늘이 명하는 것을 일컬어 성이라고 한다.”로 됩니다. 그러므로 ()’‘is called’가 됩니다. 그래서 나는 지()를 일본사람들처럼 코레오(これを)라고 지시대명사로 읽을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이 구절엔 여러 학설이 많습니다. 그러면 하늘이 명령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할까요? 주자의 주를 잠깐 살펴봅시다.

 

 

, 猶令也, , 卽理也. 天以陰陽五行, 化生萬物, 氣以成形而理亦賦焉, 猶命令也.

 

여기에 그 유명한 성즉리(性卽理)’라는 말이 나오는데 주자는 명()은 명령으로 성()은 리()로 해석했습니다. “하늘이 음양오행을 가지고 화생만물하고 기()는 그것으로써 형을 이루고 리 또한 거기에 품부된다[天以陰陽五行, 化生萬物, 氣以成形而理亦賦焉].”는 것입니다.

 

 

 

만물의 영장(靈長)과 강장(强長)

 

내가 이번에 미국에서 프로이디안 프로드(Freudian Fraud)라는 좋은 책을 하나 사 왔는데, 프로이드라는 사람이 얼마나 사악한 영향을 많이 끼친 사람인가를 아주 정밀하게 논한 책입니다. 요새 읽고 있는데 내용이 아주 대단해요. 이 책에 보면 네이춰와 너춰(Nature and Nurture)라는 논쟁(debate)이 나옵니다. 영어의 네이춰(Nature)’라는 말에도 자연과 본성이라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도가(道家)적으로 해석하면 자연(自然)은 궁극적으로 스스로 그러함(What is saw of itself)’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서양에서는 스스로 그러하다는 개념을 궁극적으로 천(, God)에 귀속시킵니다. 동양의 도가철학에서는 이것을 도()로 본다고 해도 인법지 지법천 천법도 도법자연(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이라고 했습니다. “()는 스스로 그러함을 본받는다[道法自然].” 이와 같은 구절로 볼 때 동양에서는 자연과 천이라는 것이 이원화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본성(nature)은 또 무엇입니까? ()이란 개념은 아주 어렵습니다. ()이라는 것은 요새말로 성향(Tendency)입니다.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이라는 말도 있지만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움직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곧 움직이는 것 아니겠어요? ()의 세계에는 반드시 움직임의 경향성이 있습니다. 그냥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데에도 어떠한 방향성을 갖는다는 것이지요. 뉴톤 물리학에는 물체 상호간에 잡아당기는 만유인력이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그리고 미립자의 세계에도 미세하지만 그 힘이 적용됩니다. 이런 물리적 세계의 운동 성향은 쉽게 법칙화 되죠.

 

그런데 인간의 마음(Mind)도 항상 움직입니다. 그렇다면 이 마음의 움직임에는 어떤 법칙이 존재할까요? 근세의 심리학(psychology)이 여기에 매달렸었습니다. 우리가 고양이 앞에서 총채를 흔들면 고양이는 예외 없이 총채를 앞발로 잡아채려는 일정한 패턴의 행동을 보입니다. 사람에게는 휴먼 네이춰가 있듯이 고양이에게는 캣 네이춰(Cat Nature)가 있는 것이죠.

 

우리가 만물의 영장(靈長)이라는 말을 쓰는데 영장이란 말은 지혜가 뛰어남을 뜻합니다. 그런데 만물의 강장(强長)으로 말하자면, 인간은 다른 동물과 게임이 안 됩니다. 들판에서 호랑이를 만났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 지구상에서 살아가는 동물 중에 왕자는 바로 고양이(Cat)과 동물입니다. 생기기도 훨씬 잘 생겼잖아요? 여러분들 벗겨봐야 털이 요기 조금 조기 조금 엉성하게 났을 뿐이고, 벤 존슨이 달리기를 아무리 잘 한다고 해도 이런 동물에 비하면 형편없죠. 그래서 강()으로 장()을 따지는 게 아니라 영()으로 장()을 따지자는 거예요. 고양이류는 강한 발톱, 이빨, 날쌘 동작이 있지만. 인간은 재수 좋게도 두뇌를 발달시켜서 먹이사슬의 맨 위로 올라온 것이고 자연 상태에서는 게임이 안 되는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가 고양이를 볼 때 고양이라고 말할 수 있는 어떤 속성(Behavior Pattern)이 있습니다.

 

그런 고양이의 속성과 같은 인간의 행동 패턴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고양이를 관찰해서 쉽게 말할 수 있지만 불행히도 인간에게는 그걸 관찰해서 말해줄 존재가 없습니다. 인간은 자기의 행동 패턴을 자기가 말할 수밖에 없어요. 즉 인간이라는 존재를 규정할 수 있는 존재는 아이러니칼하게 인간 자신일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인간본성에 관한 논의가 어려운 것이죠. 서양 사람은 인간의 특성을 두뇌(Brain)에서 찾는데, 두뇌라는 것은 쉽게 말해서 마인드[]의 문제입니다. 이 심()의 문제는 어떤 의미에서 자유의지의 문제예요. 만약에 마인드는 있으나 마나하고 필연성에 의해서만 움직인다면 인간의 행동을 법칙화 하는 것은 쉽겠죠. 인간은 거의 로보트처럼 콘트롤이 가능할 것이고 그러면 인간본성에 관한 논의는 없을 것입니다. 동물학에서처럼 인간에 대한 행동 패턴이 규정된다면 인간 본성도 쉽게 규정되어버리고 말았을 거예요. 성선설(性善說)ㆍ성악설(性惡說) 등을 얘기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인간은 자기의 행동방식을 자기가 규정할 수밖에 없고 더구나 여기엔 개개인에 따라서 무한한 편차(variation)나 우연(chance), 돌연변이들이 많기 때문에 인간의 행동은 결정적이지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란 존재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중용(中庸)은 여기에 대해서 매우 현명한 대답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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