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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도올선생 중용강의 - 1장 본문

고전/대학&학기&중용

도올선생 중용강의 - 1장

건방진방랑자 2021. 9. 16.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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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네이춰(Nature) 와 너춰(Nurture)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라는 구절에도 문제가 많습니다. 사실 ()’라는 것을 일본사람들은 코레오(これを, 그것을)라고 합니다. , ‘하늘이 명하는 것[天命]’ ‘그것을[]’ ‘일컬어 성이라고 한다[謂性]’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해석한다면 천명위지성(天命謂之性)’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중국어에서는 목적어가 동사 다음에 오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구절의 지위(之謂)’위지(謂之)’가 어떤 차이가 있느냐는 문제가 해결이 안 됩니다.

 

같은 시기에 성립되었다고 추정되는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을 보면 형이상자위지도 형이하자위지기(形而上者謂之道, 形而下者謂之器)’라고 해서 위지(謂之)’라고 하지 지위(之謂)’라는 말은 없거든요. 그래서 나는 이 ()’()’이라는 동사를 강화시키는 허사적 용법으로 천명지(天命之)’라고 붙여서 해석합니다. 그러면 하늘이 명하는 것을 일컬어 성이라고 한다.”로 됩니다. 그러므로 ()’‘is called’가 됩니다. 그래서 나는 지()를 일본사람들처럼 코레오(これを)라고 지시대명사로 읽을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이 구절엔 여러 학설이 많습니다. 그러면 하늘이 명령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할까요? 주자의 주를 잠깐 살펴봅시다.

 

 

, 猶令也, , 卽理也. 天以陰陽五行, 化生萬物, 氣以成形而理亦賦焉, 猶命令也.

 

여기에 그 유명한 성즉리(性卽理)’라는 말이 나오는데 주자는 명()은 명령으로 성()은 리()로 해석했습니다. “하늘이 음양오행을 가지고 화생만물하고 기()는 그것으로써 형을 이루고 리 또한 거기에 품부된다[天以陰陽五行, 化生萬物, 氣以成形而理亦賦焉].”는 것입니다.

 

 

 

만물의 영장(靈長)과 강장(强長)

 

내가 이번에 미국에서 프로이디안 프로드(Freudian Fraud)라는 좋은 책을 하나 사 왔는데, 프로이드라는 사람이 얼마나 사악한 영향을 많이 끼친 사람인가를 아주 정밀하게 논한 책입니다. 요새 읽고 있는데 내용이 아주 대단해요. 이 책에 보면 네이춰와 너춰(Nature and Nurture)라는 논쟁(debate)이 나옵니다. 영어의 네이춰(Nature)’라는 말에도 자연과 본성이라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도가(道家)적으로 해석하면 자연(自然)은 궁극적으로 스스로 그러함(What is saw of itself)’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서양에서는 스스로 그러하다는 개념을 궁극적으로 천(, God)에 귀속시킵니다. 동양의 도가철학에서는 이것을 도()로 본다고 해도 인법지 지법천 천법도 도법자연(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이라고 했습니다. “()는 스스로 그러함을 본받는다[道法自然].” 이와 같은 구절로 볼 때 동양에서는 자연과 천이라는 것이 이원화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본성(nature)은 또 무엇입니까? ()이란 개념은 아주 어렵습니다. ()이라는 것은 요새말로 성향(Tendency)입니다.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이라는 말도 있지만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움직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곧 움직이는 것 아니겠어요? ()의 세계에는 반드시 움직임의 경향성이 있습니다. 그냥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데에도 어떠한 방향성을 갖는다는 것이지요. 뉴톤 물리학에는 물체 상호간에 잡아당기는 만유인력이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그리고 미립자의 세계에도 미세하지만 그 힘이 적용됩니다. 이런 물리적 세계의 운동 성향은 쉽게 법칙화 되죠.

 

그런데 인간의 마음(Mind)도 항상 움직입니다. 그렇다면 이 마음의 움직임에는 어떤 법칙이 존재할까요? 근세의 심리학(psychology)이 여기에 매달렸었습니다. 우리가 고양이 앞에서 총채를 흔들면 고양이는 예외 없이 총채를 앞발로 잡아채려는 일정한 패턴의 행동을 보입니다. 사람에게는 휴먼 네이춰가 있듯이 고양이에게는 캣 네이춰(Cat Nature)가 있는 것이죠.

 

우리가 만물의 영장(靈長)이라는 말을 쓰는데 영장이란 말은 지혜가 뛰어남을 뜻합니다. 그런데 만물의 강장(强長)으로 말하자면, 인간은 다른 동물과 게임이 안 됩니다. 들판에서 호랑이를 만났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 지구상에서 살아가는 동물 중에 왕자는 바로 고양이(Cat)과 동물입니다. 생기기도 훨씬 잘 생겼잖아요? 여러분들 벗겨봐야 털이 요기 조금 조기 조금 엉성하게 났을 뿐이고, 벤 존슨이 달리기를 아무리 잘 한다고 해도 이런 동물에 비하면 형편없죠. 그래서 강()으로 장()을 따지는 게 아니라 영()으로 장()을 따지자는 거예요. 고양이류는 강한 발톱, 이빨, 날쌘 동작이 있지만. 인간은 재수 좋게도 두뇌를 발달시켜서 먹이사슬의 맨 위로 올라온 것이고 자연 상태에서는 게임이 안 되는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가 고양이를 볼 때 고양이라고 말할 수 있는 어떤 속성(Behavior Pattern)이 있습니다.

 

그런 고양이의 속성과 같은 인간의 행동 패턴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고양이를 관찰해서 쉽게 말할 수 있지만 불행히도 인간에게는 그걸 관찰해서 말해줄 존재가 없습니다. 인간은 자기의 행동 패턴을 자기가 말할 수밖에 없어요. 즉 인간이라는 존재를 규정할 수 있는 존재는 아이러니칼하게 인간 자신일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인간본성에 관한 논의가 어려운 것이죠. 서양 사람은 인간의 특성을 두뇌(Brain)에서 찾는데, 두뇌라는 것은 쉽게 말해서 마인드[]의 문제입니다. 이 심()의 문제는 어떤 의미에서 자유의지의 문제예요. 만약에 마인드는 있으나 마나하고 필연성에 의해서만 움직인다면 인간의 행동을 법칙화 하는 것은 쉽겠죠. 인간은 거의 로보트처럼 콘트롤이 가능할 것이고 그러면 인간본성에 관한 논의는 없을 것입니다. 동물학에서처럼 인간에 대한 행동 패턴이 규정된다면 인간 본성도 쉽게 규정되어버리고 말았을 거예요. 성선설(性善說)ㆍ성악설(性惡說) 등을 얘기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인간은 자기의 행동방식을 자기가 규정할 수밖에 없고 더구나 여기엔 개개인에 따라서 무한한 편차(variation)나 우연(chance), 돌연변이들이 많기 때문에 인간의 행동은 결정적이지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란 존재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중용(中庸)은 여기에 대해서 매우 현명한 대답을 했습니다.

 

 

 

 

12. 도엔 도가와 유가의 구분이 없다

 

 

 

天命之謂性
하늘이 명하는 것을 성이라고 하고
 
, 猶令也. , 卽理也. 天以陰陽五行化生萬物, 氣以成形, 而理亦賦焉, 猶命令也. 於是人物之生, 因各得其所賦之理, 以爲健順五常之德, 所謂性也.
()은 령()과 같다. ()은 곧 리(). 하늘이 음양과 오행으로 만물을 낳아 기름에 기()는 형체를 만들고, () 또한 부여 받으니, 명령을 받은 것과 같다. 이에 사람과 사물이 태어남은 각각 그 부여받은 리()를 얻음에 따라 건순과 오상의 덕을 삼았으니, 이것을 성()이라고 말한다.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라는 이 말은 인간 본성에 대한 특별한 정의를 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라는 것은 하늘이 명령해서 인간이란 존재에게 부여하는 것이며 스스로 그러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늘로부터 인간에게 부여되는 궁극적인 이유는 천법도 도법자연(天法道 道法自然)’처럼 하늘은 궁극적으로 스스로 그러한 것이므로 말이 필요 없다는 것이지요.

 

 

 

率性之謂道
자기에게 내재하는 이 성()을 따르는 것이야말로 도()라 하고
 
, 循也. , 猶路也. 人物各循其性之自然, 則其日用事物之間, 莫不各有當行之路, 是則所謂道也.
()은 따르다는 것이다. ()는 로()와 같다. 사람과 사물은 각각 그 본성의 자연함을 따르니, 일용 사물의 사이에 각각 마땅히 가야만 할 길이 아님이 없으니, 이것을 도()라고 말한다.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 그래서 자기에게 내재하는 이 성()을 따르는 것이야말로 도()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도()는 분명히 물리적 법칙은 아닙니다. ()라는 것은 길(The way)이요 길이라는 것은 하나의 법칙의 세계를 말하므로 중용(中庸)이 과학(Science)의 텍스트였다면 여기서 도()는 자연의 법칙(Law Of Nature)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중용(中庸)에서 말하는 도()는 자연의 법칙이 아니라 분명히 문명의 법칙입니다. ()는 문명(Civilized Tao)을 구성합니다. 문명 밖의 자연인 하늘이 끊임없이 명()하는 것을 성()이라고 하고, 또 그 자연이 라는 존재로 내재화되어 들어오는 것이 성()인 거지요. 그 성()을 따라서 내가 하는 행동이 도(), 즉 문명의 질서(Order of civilization)입니다.

 

 

 

脩道之謂敎
그 문명의 질서를 닦는 것을 교육이라고 한다.
 
, 品節之也. 道雖同, 而氣稟或異, 故不能無過不及之差. 聖人, 因人物之所當行者而品節之, 以爲法於天下, 則謂之敎. 若禮樂刑政之屬, 是也.
()는 그것을 품절한다는 것이다. ()과 도()는 비록 같으나, 기질의 품부 받은 것에 따라 혹 다르기 때문에 지나침과 미치지 못하는 차이가 없을 수 없다. 성인은 사람과 사물이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을 따라 그것을 품절하여 천하를 본받으니, 이것을 ()’라고 말한다. 예악형정의 부류와 같은 것들이 이것이다.

 

수도지위교(修道之謂敎)’ 그 문명의 질서를 닦는 것(Accmulation)을 교육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나타나고 있는 기본 구조는 궁극적으로 천()에서부터 교()까지, 즉 자연에서부터 문명의 형성, 교육까지를 하나의 차원(Dimension)으로 엮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을 노자적으로 말하자면 무위(無爲)의 세계유위(有爲)의 세계의 통합이라고 할 수 있어요. 여기서 교()는 유위(有爲)의 극치입니다. 무위(無爲)의 세계에서는 교육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의 뿌리를 캐어 들어가면 결국 하늘이라는 무위(無爲)의 세계까지 가는 것입니다.

 

사실 천명지위성 솔성지위도 수도지위교(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라는 말에는 도가사상이나 유가사상의 구분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이미 그러한 세계관이 융합된 이후에 나온 상당히 통합적인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거든요. 그러므로 이런 정도의 언급을 공자의 손자가 했다고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한대(漢代)에나 와야 이루어지는 통합적 세계관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냄새가 그래요. 중용(中庸)의 이 세 마디에 배어 있는 사고는 너무도 조직적(Systematic)이고 총체적입니다. 이 구절은 굉장히 간단한 말처럼 보이지만 어떠한 의미에서는 중국문명 전체를 포괄하는 명언 중에 명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중용(中庸)이라는 책은 무한한 해석의 여지를 남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중용(中庸)은 오늘날 행동심리학자들이 하듯이 인간의 본성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규정지어 버리지 않았습니다. 러나 휴먼네이춰가 무엇인가하는 구체적인 문제를 설명적 언사(to explain away)로서가 아니라 사례를 하나하나 들어가면서 점점 탐구해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중용(中庸)은 흥미진진한 거예요. 오늘은 여기까지 중용(中庸)에 대한 첫 맛만 보여주었습니다. 앞으로는 쭉쭉 해석해 나가겠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장시간 동안 열심히 강의를 들어주어서 정말 고맙게 생각합니다.

 

 

 

자연과 문명의 가교로서의

 

천명지위성 솔성지위도 수도지위교 도야자 불가수유리야(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道也者 不可須臾離也)”라고 했는데, 여기서 도()라는 놈을 따로 끄집어냈습니다. ‘성야자(性也者)’ ‘교야자(敎也者)’라고 할 수도 있는데 하필 도()라는 놈을 끄집어냈을까요? ()과 도()와 교()에서 성()네이춰(Nature)로 교()를 너춰(Nurture)라고 말해 봅시다. ()아프리오리(a priori, 선천적)한 것이며 교()는 완전히 아포스테리오리(a posteriori, 후천적)한 것입니다. 그리고 도()라는 것은 이 둘을 연결하는 다리입니다. 이것이 중용(中庸)의 사상적 구조입니다. ()라는 것은 어떤 측면에서는 자연의 세계에서 기()의 법칙과 질서를 본 것입니다. 그렇지만 교()라는 것은 완전히 문명(文明, Civilizadion)입니다. ()을 자연(自然)이라고 한다면 교()는 문명(文明)입니다. 아까 주자(朱子) ()에서 보았듯이 예악형정(禮樂刑政)이 교()이기 때문에 성()은 문명이 아닙니다. 그런데 성()과 교()의 양면을 다 가지고 있는 것이 ()’라는 말입니다.

 

사실은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도()도 이 양면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도가의 도를 자연주의적인 도()라고 하지만 순수하게 오로지 자연 쪽으로만 간다면 그것은 자연과학이 되어야 하겠죠. 그래서 도가의 성론(性論)도 오늘날 행동주의자들이 말하는 것과 같은 성론이 되어야 하고 자연과학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도가를 자연주의라고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말하는 그런 자연만 있는 자연주의가 아니라 인간세상의 법칙을 포괄하는 자연주의입니다. 도덕경(道德經)25도법자연(道法自然)’이란 말이 있는데 왜 이 자연이라는 말을 썼을까요? 스스로 그러한데 이르러야만 도()와 성()이 구현된다는 것입니다. 자꾸만 이 도()를 인위적으로 조작하려고 하는 데에서 성()과 교()의 조화가 깨진다는 말이에요. 노자의 자연주의는 그린벨트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자연주의라면 마치 그린벨트에 가서 살자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어요. 이게 서양의 얄팍한 목가적인 네이춰럴리즘(Naturalism, 자연주의)이죠. 동양에는 그런 목가적인 네이춰럴리즘이 없습니다. 옛날엔 도시든 농촌이든 모두 그린벨트였습니다. 종로에도 자동차가 안 다녔고 서울이고 시골이고 공기는 다 똑같았다는 걸 생각해야 하는데 사람들은 오늘날의 도시와 농촌의 개념을 가지고 오해를 합니다. 요즘의 그린벨트에는 비교적 스스로 그러한 생태가 많으니까 그걸 동경하는 것뿐입니다. 도시의 소음과 매연에서 벗어나자고 하면서 그린벨트를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도시에는 플라스틱이고 뭐고 인위적으로 만든 것들 천지인데 그래도 그린벨트에 가면 나무고 뭐고 다 제멋대로 자라난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30에 보면 만물병육이불상해 도병행이불상패(萬物竝育而不相害, 道竝行而不相悖)’라는 말이 나오는데 결국 도가의 자연주의라는 것은 스스로 그러함을 추구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교()의 세계에서 인간이 자연적으로 품부 받은 성()을 어떻게 스스로 그러하게 발현시키는가 하는 그 조화작용을 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성((()의 문제를 여러분들이 아주 명확하게 인식하지 않으면 동양문화의 가장 중요한 개념을 파악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 도()라는 것이 가장 중심적인 개념(Central Concept)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라는 것에는 도가(道家)와 유가(儒家)의 구분이 없다!

 

 

 

 

 

 

 

 

 

 

13. 호연지기와 호연지리

 

 

자 이제 들어가 봅시다.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수도지위교(修道之謂敎)에 대한 주자(朱子)의 주를 아예 안 보고 넘어갈 수는 없으니까 이것 하나만이래도 자세히 읽고 넘어갑시다. 지난 시간에 앞머리를 언급하기는 했지만 다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 猶令也.
()은 명령한다는 말과 같다.

 

()이라는 것은 칙령을 내린다는 말입니다.

 

 

 

, 卽理也.
()은 바로 리()이다.

 

여기에서부터 냄새가 확 달라지죠. ‘성즉리(性卽理)’라는 말을 중용(中庸)에 대해서 할 수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할 수 없는 얘기입니다. 이것은 주자가 중용(中庸)을 보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드러낸 것이죠. ‘성즉리(性卽理)’라는 말은 조선시대에 유명한 스테이트먼트(Statement, 진술)였죠. 그래서 주자는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에서 말하는 성()이야말로 자기가 말하는 이기론(理氣論)’적 후레임에서의 ()’에 해당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을 단순히 읽으면 안 됩니다.

 

 

 

天以陰陽五行化生萬物, 氣以成形, 而理亦賦焉, 猶命令也.
하늘이 음양오행으로 만물을 화생하매 기는 이로써 형태를 이루고 리 또한 여기에 품부되니, 이것은 곧 명령함과 같다.

 

음양오행이라는 말도 중용(中庸)에서는 쓰기가 어렵습니다. 한대(漢代)에 오면 음양오행이라는 말이 포퓰라(popular) 했지만 여기에서의 음양오행에 관한 언급은 송대에 유행한 말로써 중용(中庸)을 푼 것이기 때문에 중용(中庸) 성립 당시에 쓰였던 음양오행과 같은 용법이라고 보면 안 됩니다. 중용(中庸)자체에 천지(天地)’라는 말은 많지만 음양(陰陽)’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의 형()이라는 것은 구체적인 형체(Stuff)이고, 물리적 공간을 차지하는 물질의 세계인데, ()는 물질의 세계를 이루고 거기에 리()가 품부된다는 것입니다.

 

맹자(孟子)호연지기(浩然之氣)’라는 말을 썼는데 구한말의 이제마는 과감하게도 호연지리(浩然之理)’라는 말을 썼습니다. 여러분은 호연지리(浩然之理)라는 말의 느낌을 실감하지 못할 거예요. ‘호연지리(浩然之理)’라는 말은 조선조 말기라서 가능했던 것인데 성리학논쟁이 한창일 때 호연지리(浩然之理)’라는 말을 썼다면, 이제마는 성경(聖經)을 맘대로 변형시켰다고 해서 당장 독사발을 받고 죽었을 것입니다.

 

이제마라는 사람은 매우 과감합니다. 이제마는 호연지리(浩然之理)’()’이라고 생각했고 호연지기(浩然之氣)’는 오장(五臟)에서 심()을 뺀 폐비간신(肺脾肝腎)의 상호작용에서 이루어지는 매우 물리적인 세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마의 호연지기(浩然之氣)’장부(Organs)이죠. 장부(臟腑)는 주자의 논조를 빌어 말하면 인체를 형성하는 구체적인 형체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이제마는 이 장기의 세계를 필연의 세계라고 봅니다. 이것은 기()의 세계죠. 그러므로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려면 폐비간신의 장기를 잘 다스려야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 사람은 호연지리(浩然之理)’라는 말을 썼습니다. 심은 폐비간신과 합쳐서 원래 오장(五臟)이 되지만 이 심은 다른 사장(四臟)과 동일선상에서 얘기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심은 폐비간신과 같은 장기이면서도 폐비간신이라는 장기를 초월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며,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자유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의사가 처방을 하고 약을 쓰는 것은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다루는 것인데 이 호연지기(浩然之氣)’만으로는 인간의 질병이 구원되지 않습니다. ‘호연지리(浩然之理)’의 문제가 남기 때문이죠. 이것이 이제마가 지은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성명론(性命論)에 나오는 상당히 재미있는 아규먼트아규먼트(Argument, 주장, 논점)입니다.

 

호연지기(浩然之氣) 호연지리(浩然之理)
폐비간신(肺脾肝腎)의 상호작용에서 이루어지는 매우 물리적인 세계 ()은 폐비간신이라는 장기를 초월하는 존재로, 인간다울 수 있는 자유의 세계
장부(Organs)  
인체를 형성하는 구체적인 형체의 세계  
필연의 세계  
()의 세계 ()의 세계

 

 

 

 

14. 부여받은 리()

 

 

於是人物之生, 因各得其所賦之理, 以爲健順五常之德, 所謂性也.
이에 사람과 물건이 태어남에 각기 부여받은 리를 얻음으로 인하여 건순오상의 덕을 삼으니 이른바 성이라는 것이다.

 

사람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의 물체도 생성되어가는 과정에서 모두 제 나름대로의 리()를 품부 받는다는 말입니다. 태아를 보면 올챙이처럼 생겼죠? 왜 사람과 사람이 결혼하면 토끼를 낳지 않고 사람을 낳을까요, 혹시 애를 밴 후 진화를 잘못해서 아기가 나오지 않고 올챙이가 나오는 그런 흉측한 경우는 없을까요? 근세 생물학에서 가장 큰 문제가 이것이었습니다. 왜 어김없이 사람이 나오는가?

 

멘델(1822-1884) 정원에다가 완두콩을 심어서 누런 콩 빨간 콩이 나오는 빈도수를 조사했고 이에 따라서 유전 법칙의 체계를 세웠는데, 사실 이것은 생물학이라기보다는 통계학으로 보는 것이 올바를 것입니다. 유전법칙이 성립하는 근본적 이유는 전혀 설명이 안 되었던 것입니다. 멘델은 현상적 통계의 법칙은 발견했지만 생물학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였던 거죠. 유전법칙이 성립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게 한 것은 저 유명한 왓슨과 클릭의 ‘DNA데옥시리보핵산 유전자 구조의 해명입니다. DNA의 이중나선 구조가 해명되면서 유전의 메카니즘이 설명된 거 아닙니까? 유전은 DNA에 있는 염기의 순서에 달려 있다는 것이죠. 그 염기의 순열만 바뀌면 사람과 사람사이에서도 이상한 동물이 나올 수 있는 거예요. DNA의 핵산의 구조는 모든 생명체가 공유하고 있는 것이고, 따라서 인간의 DNA라고 해서 특별히 대단할 것은 없습니다.

 

모든 사물의 태어나는 데에는 나름대로 부여받은 리()가 있어서 호랑이는 호랑이대로 그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덕()이 생깁니다. 그러니까 호랑이의 행동양식을 보면 호랑이의 덕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며칠 전 미국에서 동물의 왕국이라는 영화를 보았는데 그런 비디오는 사다가 볼 만해요. 영화학적으로 말해도 그런 영화는 상당히 찍기가 어렵습니다. 얼마 전에 사자에 대해서 보았는데 사자노릇하기가 그렇게 힘든 줄은 미처 몰랐었습니다. 나는 그 놈들이 힘이 세어서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잡아먹을 수 있는 줄 알았었는데 사자들이 들소(Buffalo)한테 맥을 못 추더군요. 사자 몇 마리가 어미 들소를 유인하면 나머지 사자들은 새끼 들소를 덮쳐서 먹는 그런 전술이 없이는 맹수의 왕 사자도 굶어 죽겠더라고. 그런데 들소들이 사자의 공격에 대해서 진을 치는 것을 보니 손자병법 뺨칠 정도입니다. 그러니 먹이를 사냥하지 못한 사자들이 평원에서 기아와 싸우는 모습은 정말 처절합니다. 나는 사자하면, ‘짜식들 동물의 왕이니까 참 좋겠다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사자노릇도 거저하는 게 아니더라니깐! 자연환경에서 생존하려면 사자로서의 엄청난 지모와 지략의 덕을 갖추어야 합니다. 사자가 들소의 진을 쳐다보고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판단하면 덤벼보지도 않고 포기하고 돌아갑니다. 동물들의 판단력도 인간보다 조금도 떨어지지 않아요. 인간 중심적으로 모든 것을 생각해서 동물의 세계를 우습게 보면 큰일 납니다.

 

이리의 내 하숙집 주인은 정원 가꾸기를 좋아하는 훌륭한 분인데, 그분이 가꾸는 정원의 넓은 공간에 거미가 친 집을 보면 공간의 처리방식이 요새 화가나 건축가는 저리 가라입니다. 그 거미집을 쳐다보고 있으면 어떻게 이 실을 여기다 맬 발상을 했을까신비로운 게 한두 가지가 아니지요. 거미줄을 모두 걷고 며칠 뒤에 보면 매번 다르게 거미줄을 치는데 역시 기발합니다. 바로 이것이 거미에게 품부된 리()입니다.

 

 

 

, 循也. , 猶路也. 人物各循其性之自然, 則其日用事物之間, 莫不各有當行之路, 是則所謂道也.
솔은 따름이요. 도는 로()와 같다. 사람과 물건이 각기 그 성에 스스로 그러함을 따르면 일상생활 하는 사이에 각기 마땅히 행하여야 할 길이 없을 수가 없는 것이니 이것이 곧 이른바 라는 것이다.

 

거미는 분명히 거미의 성을 따르고 호랑이는 호랑이의 성을 따릅니다. 여기 자연은 네이춰가 아니고 스스로 그러하다는 뜻으로서 거미는 거미대로 스스로 그러하다는 뭐 이런 식으로 풀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주자는 근대 성리학의 가장 중요한 문제인 당위(Sollen)문제를 제기합니다. 당행지로(當行之路)가 주자에게 있어서는 당연지리입니다.

 

 

 

, 品節之也. 道雖同, 而氣稟或異, 故不能無過不及之差. 聖人, 因人物之所當行者而品節之, 以爲法於天下, 則謂之敎.
수라는 것은 그것을 절도 있게 닦아서 만드는 것이다. 성과 도가 비록 같다고 해도 기품은 혹 다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나치고 모자란 차이가 없을 수 없다. 그러므로 성인은 사람과 물건이 마땅히 해야 할 것을 인()하고 품절(品節)하여 천하의 질서로 만드니 이것을 일러 가르침이라고 한다.

 

주자는 성((() 중에서 성과 도선천적(a priori) 세계로 돌립니다. 인간세의 질서라는 것은 우리가 말하는 도덕(Morality)’입니다. 거기에 맞게 만드는 것이 교육이죠. 주자는 ()’()’ 까지를 선천적인 법칙의 세계로 보고 ()’는 후천적인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후천적인 것의 근거로서 기품이라는 개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중용(中庸)이 말은 앞에서 논했던 네이춰와 너춰를 총괄해서 말한 것이겠죠.

 

 

 

 

 

15. 교육이론의 궁극적인 핵심

 

 

若禮樂刑政之屬, 是也.
, , , 정과 같은 것들이 이것이다.

 

늑대소년이 피아노를 칠 수 있을까요? 안 됩니다. 피아노는 배워야 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수도(修道)를 해야 피아노를 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같은 피아노를 쳐도 수도(修道)의 레벨이 다른 것입니다. 장영주(Sarah Chang)의 바이올린 연주를 꼭 들어 보십시요. 그것은 정말 위대한 연주입니다. 정경화씨가 물론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이긴 하지만 사라 장은 그를 뛰어넘는 바가 있어요. 사운드의 깊이가 도저히 어린애의 연주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모짜르트가 서너 살 때 연주한 것들이 녹음이 되어 있어서 비교해 본다면 알겠지만 모짜르트보다 더 깊이가 있을 것 같아요. 그것은 사라 장이 가지고 있는 어떠한 성()과 도(), 즉 내재적인 어떠한 것이 딱 맞아서 발현된 형태일 것입니다. 우리가 학교의 커리큘럼에 따라서 하는 공부 모두가 예악형정(禮樂刑政)의 개념에 들어갑니다. 법대나 정치학과나 예술대학이나 모두 다 여기에 포함됩니다.

 

 

 

蓋人知己之有性, 而不知其出於天; 知事之有道, 而不知其由於性;
보통 사람들이 자기의 본성이 있음을 알되 그것이 하늘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모든 일에 길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이 성()으로부터 유래한다는 것을 모른다.

 

장영주가 그렇게 바이올린을 잘 켜는 것이 장영주의 내재하는 어떠한 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는 것을 대개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단지 장영주의 테크닉이 뛰어나서 그런 줄로만 알지요.

 

박종성│새야 새야 파랑새야 ( Harmonica. Jong Seong Park ) MBC211102 방송

하모니카라는 악기로 빚어낸 아름다운 선율, '새야 새야~' 

 

 

  

知聖人之有敎, 而不知其因吾之所固有者裁之也.
성인의 가르침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바로 그것이 우리에게 원래 있는 바가 재단되어서 나오는 것이라는 것은 알지 못한다.

 

중요한 말입니다. 성인의 가르침만 알지, 그 성인의 가르침이 궁극적으로 나에게 내재하는 것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모릅니다. 주자가 천명지위성 솔성지위도 수도지위교(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를 해석하는 진지한 자세를 보십시요.

 

오늘날 말하는 교육론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근세의 삐아제를 말해도 좋고 누구를 말해도 좋습니다. 모든 교육이론의 궁극적인 핵심은 가르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내재하는 본성을 어떻게 발현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교육의 최대의 과제는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육체제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본성을 발현시키기보다는 대학입시 중심 제도로 되어있어서 획일적인 가치기준에 사람들을 두드려 맞춘다는 것입니다. 모든 학부형들의 고민이 무엇입니까? ‘내 자식을 인간답게 창의적으로 기르고 싶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서울대학에 못 들어간다, 서울대학에 들어가도록 키우면 애가 완전히 병신이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입시제도에 자기를 잘 끼워 맞추는 특이한 능력이 있어야 시험점수를 잘 받지 그렇지 않은 놈들은 평생을 이등 국민으로 살게 되는 거예요. 서울대에 못 들어가면 평생 이등이지요. 나도 그랬습니다. 그것은 회복될 길이 참으로 막막해요. 창의력과 서울대의 문제, 이것이 오늘날 우리나라 교육 문제의 핵심입니다. 이것만 해결되면 모든 게 해결됩니다. 그런데 이 문제의 해결책은 없는가? 있다! 어디에 있는가?

 

중용(中庸)을 잘 읽어라! 여기서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극명히 발견해야 합니다.

 

 

子思於此, 首發明之, 董子所謂道之大原出於天, 亦此意也.
그러므로 자사께서 여기에 처음으로 이 문제를 밝혀 놓으시니 동중서가 말한 도의 큰 근원이 하늘에서 나왔다는 것도 또한 이러한 뜻이다.

 

주자(朱子)는 나만큼 텍스트에 대한 인식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주자(朱子)중용(中庸)을 당연히 자사(子思)가 지은 것이라고 말하고 1장도 자사(子思)가 썼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발명이라는 것은 요새말의 물건을 발명한다는 뜻이 아니고 밝게 설명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동자(董子)’는 동중서(董仲舒, B.C. 179~104)를 말하며, ‘도지대원출어천(道之大源出於天)’이란 말은 한서(漢書)권오십육(卷五十六), 동중서전(董仲舒傳)에 나오는 유명한 말입니다. ()의 큰 근원이 하늘로부터 나왔다고 할 때의 천()은 기독교의 하나님처럼 보이지만 동양에서는 그렇게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천명(天命)으로부터 수도(修道)에 이르는 과정을 주자가 어떻게 해석했는지 개관해 보았습니다. 10분 쉬고 다음 구절로 들어가겠습니다.

 

 

 

  

 

 

16. 실력으로 말하라

 

 

이번 삼림(三林) 프로그램에서는 야회(野會)를 빨리 가고 산행은 안 하기로 했습니다. 요즘 나는 이 강의 외의 시간에는 우리의 자녀를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라는 교육에 관한 저술을 하고 있는데 오늘 새벽에도 50매 가량 썼습니다. 그래서 나는 촌음(寸陰)을 쪼개 쓰는 절박한 시간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동숭동 학문의 기풍을 일으키는 도올서원으로

 

많은 학생들이 나와 개인적으로 얘기하고 싶어 하는데 내가 개별적으로 여러분들을 만날 시간은 없고 월··금요일날 강의가 끝나고 나서 두들박스(Noodle Box)’에서 같이 식사하며 얘기하는 시간을 마련했어요. ‘누들박스라는 분식집은 원래 요 앞 코너에 있었는데, 무허가였지만 깨끗했습니다. 동숭동은 음식문화가 형편없는 곳입니다. 겉만 번지르르하지 그릇이 아주 더럽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내가 음식문화의 본령을 보여주기 위해서 동숭동에 식당을 차릴까 싶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누들박스가 요 앞에서 철거를 당한 후 다른 곳에서 개업을 했는데 사람들이 안와서 존폐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특별히 공고하기 전에는 월··금요일 강의가 끝난 후에 반드시 거기서 점심을 먹을 테니까, 거기에 오면 밥을 먹으면서 나와 얼마든지 얘기를 할 수 있습니다. 식사 후에는 재임(齋任, 서원의 여러 가지 일을 맡아서 하시는 분들)분이 하는 브레머(Bremer)’에서 차를 마시면 좋겠지요. 브레머 0TPDN4q에 가면 내가 쓴 글씨와 그림이 걸려있는데 그 글씨는 우리 도올서원의 여헌(慮憲)의 내용입니다. 한번 보세요. 그 힘 있는 글씨를.

 

동숭동은 명실공히 도올서원 캠퍼스가 되어야할 것 같아요. 사실 동숭동은 그렇게 되어야만 살지. 지금처럼 딴따라 패들만 마구 날치는 이러한 광란기 속에서는 과거의 서울대학교가 있었을 때의 학문적 정서와 전통이 살아남기 힘듭니다. 그래서 동숭동을 살리기 위해 우리 서원도 여기에서 개원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최근에 우리가 참고로 보고 있는 번역본의 저자인 성백효(成百曉) 선생으로부터 편지가 왔었는데, 성백효 선생님은 참 진실하고 좋으신 분입니다. 정말 한문 읽는 자세가 꼼꼼하고 투철하신 분이에요. 우리나라 고전번역에 있어서는 최상급의 학자라고 평가합니다. 그분 책, 대학·중용집주(大學·中庸集註)도 여러분에게 많은 참고가 될 거예요.

 

 

 

 

 

 

호학하라

 

나는 오늘 새벽 2시에 일어나서 여러분에게 충실한 강의를 해 주려고 텍스트 크리티시즘에 관한 예습도 하고 중용(中庸)을 여기 저기 들춰보며 나름대로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새벽2시에 일어나서 지금까지 잘 견디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얼마 전 미국에 다녀왔는데 시차극복을 못해서 어제저녁 6시에 잤기 때문입니다.(齋生大笑) 양심상 더 잘 수 있나요? 나는 잠을 깎는 경우는 없습니다. 저녁 6시에 자고 새벽에 일어나서 책을 보니 정말 행복했습니다.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온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나의 본령은 고전학자인데 지금 한의학 공부도 하고 베라벨 짓들을 많이 하고 있지만, 이런 일은 사실 괴롭고 적성이 잘 안 맞는 짓들입니다. 정직하게 말해서 고전학자가 나의 본령입니다. 정말 여러분들이 도올서원에 이렇게 왔기 때문에 내가 오늘 이렇게 일찍 일어나서 공부를 했고, 중용(中庸) 텍스트에 대해서 나 나름대로 한번 새롭게 종합적으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오늘 내가 한 텍스트 크리티시즘은 어디서도 발견하기 어려운 좋은 내용입니다.

 

여러분들의 자기소개서를 보면 모든 학생들이 진지하고 확실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내 책을 고등학교 때부터 읽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 사회에는 나에 대한 비판도 많지만 이제 나도 나이가 들었고 해서 세상 사람들이 불쌍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정말 자기 자신을 너무 모르고 날뜁니다. 학문이라는 게 무엇인지도 모르고 마치 학문의 대가가 된 듯이 까불어요. 여러 가지 보기 싫은 꼴들이 많습니다. 이 사회에서는 내가 과격한 스타일로 글을 쓰니까 많은 사람들이 김용옥이라면 우상파괴주의자(Iconoclast)이고 굉장히 독설을 퍼붓는 사람에다가 기행을 서슴지 않는 괴팍한 놈이라는 등 엉터리 같은 얘기들을 하는데 그건 쌩 거짓말입니다.

 

여러분들이 배워야 할 것은 진실한 실력입니다. 실력에서 나를 따를 자가 없어요. 나는 나보다 더 많이 공부를 한 사람이 있으면 확실하게 인정합니다. 왜냐하면 공부를 나보다 더 많이 했다는 것은 내가 알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내 세대에 나 만큼 공부하는 사람이 도대체 없습니다. 이건 우리민족에게 부끄러운 일입니다. 여러분들 세대에서는 내가 하는 이런 비극적인 말이 나오지 말아야 합니다. 정말 우리나라 학자들이 공부를 안 했어요. 지식의 폭이나 사고의 깊이가 너무 유치합니다. 나는 그저 진실하게 공부한 사람이고 앞으로도 진실하게 공부할 것입니다.

 

 

 

시대를 이끌 수 있는 학자가 되도록 공부하라

 

최근에 조선일보에 이제마에 대한 대연재를 기획한 일이 있었는데 결국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이영희씨의 만엽집(萬葉集)에 관한 노래하는 역사의 후속 시리즈로 민중화가 임옥상씨와 내가 같이 내 몸의 하늘과 땅이라고 해서 대단한 기획을 했었고 그림과 글을 몇 회분씩 준비해 놓았는데 결국 안 되고 말았죠. 편집국에서는 다 오케이를 놓았지만. 지금 나는 신문에 글을 쓴다든가 매스컴에 나가서 떠든다든가 일반 강연을 한다든가 하는 데에는 정말 관심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에 학인으로서 나만큼 유명한 사람도 없고 더 이상 유명해질 필요도 없습니다. 더 이상 유명해지면 불편하기만 하죠. 이미 알맞게 유명해졌고 죽을 때까지 그런 건 걱정할 것도 없는 사람이지요. 어떻게 진실하게 사느냐, 어떻게 공부하느냐가 문제일 뿐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도올서원에 와서 배우려고 하고, 진지한 자세로 강의를 듣고, 내가 새벽 2시부터 일어나서 강의준비를 하는 이런 것이야말로 귀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내가 이렇게 상당히 바쁜 삶의 일정에서도 여러분들에게 강의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제 나는 졸개를 교육시킬 시간이 없습니다. 대중강연을 하거나 테레비에 나가서 떠드는 것을 졸개를 거느리는 것이거든요. 나는 졸개를 가르칠 시간은 없고 참모들만 거느리면 됩니다. 그래서 당대에는 내가 역사를 앞으로 걸머지고 갈 참모들만을 교육하는 것으로 자위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참모들이 다시 일선에서 뛰면서 역사를 개변해 나가겠지요. 내가 한때 영화나 연극을 만들기도 했었는데 그런 것은 사실 졸개들을 다스리는 작업이었습니다. 그때는 직접 민중과 부딪치지 않으면 학문에 생명이 없다고 생각해서 그런 일들을 했는데, 늙은 탓도 있겠지만, 일선의 졸개들을 내가 직접 선두지휘 할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도올서원은 졸개들을 기르는 기관이 아니라 참모들을 기르는 기관입니다.

 

여러분 하나하나가 여기서 교육받은 것을 가지고 나가서 역사를 개변하는 어떠한 원동력을 발견해야 된다는 말이예요. 그리고 김용옥을 능가하는 참다운 실력을 배양해야 됩니다. 우리의 역사가 이토록 실력 없는 인간들이 무질서하게 날쳐 뛰는 꼴을 지속시켜서야 되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참다운 공부를 해서 정말 위대한 새 시대의 일꾼들이 된다면, 나는 더 이상 바랄 게 없고 더 이상 이 역사에 원한이 없습니다. 더 이상 유명해질 것도 없고 단지 내가 가지고 있는 사상체계를 명확하게 저술하여 후학들에게 전달하는 일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런 나의 뜻을 잘 생각해서 앞으로 뜻있는 역사의 일꾼이 되어 주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가 도올서원운동을 전개하는 뜻이라는 것을 이해해 주면 좋겠습니다.

 

 

 

2011년 10월 26일. EBS 중용 강의 중 갑자기 잘렸다. 그래서 광화문에 나와 일인 시위 중이시다.   

 

 

 

 

17. 때려야 땔 수 없는 중용

 

 

道也者, 不可須臾離也, 可離, 非道也.
도라는 것은 잠시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니, 떠날 수 있으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道者, 日用事物當行之理, 皆性之德而具於心, 無物不有, 無時不然, 所以不可須臾離也. 若其可離, 則豈率性之謂哉!
도라는 것은 일용 사물의 마땅히 행해져야할 이치로 다 성()의 덕이며 마음에 구비되어 물건마다 소유되지 않음이 없고 언제든 그렇지 않음이 없으니, 잠시도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다. 만약 도가 떠날 수 있다면 어찌 성()을 따르라고 말할 수 있으랴!

 

시간관념에 관해서 과장법이 가장 쎈 민족이 인도민족입니다. 중국 사람들은 기껏해야 천년만년 살고지고라고 하지만 불교에서는 몇 억겁년이니 찰나(刹那, 산스크리트 Ks͎ana音寫)니 하는 시간에 관한 과장법을 지나치게 사용합니다. 그 사람들의 우주에 대한 스케일은 굉장해요. 중국이 땅덩어리가 크다고는 하지만 춘추전국시대라는 것이 작은 제후국들을 중심으로 벌어진 사태이기 때문에 스케일이 인도처럼 크지가 않습니다. 중국 사람들은 소박한 사람들이지 스케일이 큰 사람들은 아닙니다. 인도에서 번역되어 들어온 불교용어 중에 찰나(刹那)’라는 말이 있는데 이 찰나라는 말이 수입되기 이전에는 중국에서 이 수유(須臾)라는 말을 썼습니다. 순간(瞬間)이라는 말은 열자(列子)』 「탕문(湯問)에 나오는 말로 눈 깜짝할 사이(先學不瞬而後可謂射矣)를 말하는 데 찰나에 비하면 엄청나게 긴 시간입니다. 찰나는 0.0000001초도 안 될 거예요(75분의 1초라는 설도 있다). 그러므로 중국 사람들의 시간관은 상당히 인간적이죠. 중국인들이 고등한 수학을 못 만들어 낸 것도 이런 시간관과 관련이 있습니다.

 

도라는 것은 잠시라도 떠날 수가 없다[道也者, 不可須臾離也]” 이건 굉장히 중요한 말입니다. 중용(中庸)의 개념에 대해서 지난 시간에 똥을 예로 들었죠. 인간이 똥을 누지 않고서 살 수는 없습니다. 내 몸의 중용(中庸)은 항상 그 안 누고는 못사는 똥에 구체적으로 체현되는 것입니다. 나는 어떤 경우에도 이 질서에서 벗어나 있을 수 없어요. 생명의 조건을 동양적으로 말하면 동()의 세계입니다. 비생물의 세계도 전부 동()이며 생명을 가지고 산다고 하는 존재는 항상 움직입니다. 결국 존재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중용(中庸)을 취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중용(中庸)은 떠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시간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是故君子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
그러므로 군자는 그 보이지 않는 바에 경계하고 삼가며, 들리지 않는 바에 두려워한다.
 
是以君子之心常存敬畏, 雖不見聞, 亦不敢忽, 所以存天理之本然, 而不使離於須臾之頃也.
이런 이유로 군자의 마음은 항상 경외감을 지녀 비록 보고 듣지 못했을지라도 또한 감히 소홀히 하지 않아 천리의 본연함을 보존하여 잠깐 사이에 떠나지 않게 해야 한다.

 

()들린다는 수동의 의미로 쓰이며, ‘듣는다할 때는 청()이라 합니다.

 

 

 

 

18. 기독교의 기도

 

 

莫見乎隱, 莫顯乎微, 故君子愼其獨也.
숨어있는 것보다 더 드러나는 것이 없으며 미세한 것보다 더 뚜렷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홀로 있을 때를 삼가하는 것이다.
, 暗處也. , 細事也. 獨者, 人所不知而己所獨知之地也. 言幽暗之中, 細微之事, 跡雖未形而幾則已動, 人雖不知而己獨知之, 則是天下之事無有著見明顯而過於此者. 是以君子旣常戒懼, 而於此尤加謹焉. 所以遏人欲於將萌, 而不使其潛滋暗長於隱微之中, 以至離道之遠也.
()은 어두운 곳이다. ()는 작은 일이다. ‘()’이란 것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나만 홀로 아는 곳이다. 그윽하고 어두운 중에 작은 일 가운데에 자취가 비록 드러나지 않아도 기미가 이미 발동된 것이니 사람들이 비록 알지 못하고 나만 홀로 알더라도 이것은 천하의 일로 훤히 드러나며 밝게 나타나서 이보다 지나친 것이 없다. 이런 이유로 군자는 이미 항상 경계하고 두려워함으로 이에 더욱 삼감을 더하는 것이다. 인욕이 장차 자라날 것을 막아야 하는 까닭은 은미한 중에 잠기듯 불어나고 은근히 자라나 도에서 떠남이 멀어짐에 이르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은 현으로 발음하는데 보인다는 뜻이에요. 여기의 은()과 미()를 합쳐서 요즘 우리가 잘 쓰는 은미하다라는 말이 성립된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단어에서는 의미 없이 왜곡되어 버렸지만 원래 은미(隱微)라는 말은 중용(中庸)에서 나온 말이에요. 은미(隱微0라는 말이 곧 신독사상을 함축합니다. 중용(中庸)사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많이 인용되는 것이 신독(愼獨)사상입니다. 신독(愼獨)이라는 말은 한마디로 말해서 홀로 있을 때 삼가한다는 말입니다. 홀로 있을 때 삼가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기독교에 있는 신독사상이 바로 기도입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우리 어머니의 청교도적인(puritanical) 신앙의 생활 속에서 큰 사람입니다. 우리 어머니같은 분들은 완벽한 이조의 여인이에요. 나는 어머니의 기도를 볼 때 유학에서 말하는 신독이 근세의 기독교 신앙의 기도(祈禱)’ 사상으로 변하여 자리 잡고 있는 게 바로 어머니의 기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 어머니는 기도란 반드시 홀로 하는 것이라고 항상 말씀하시거든요. 키에르케고르의 말을 빌린다면 서양인의 기도의 핵심은 단독자(Existenz vor dem Gott)’의 개념입니다. 단독자로서 신과 대면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외면적인 세계의 흐름에 대해서 나의 주관적 신독은 절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로마서122절에 사도 바울이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Do not conform yourselves to the standards of this world, but let God transform you inwardly by a complete change of your mind. Romans 12.2)” 라고 한 말이 있습니다. 이 세계의 세속적인 가치관에 의해서 흔들리지 않고 신과의 단독적인 대면을 통해서 나의 양심을 지킨다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입니다. 이러한 기도사상이 청교도(Puritanism)의 본질이 되었고 막스 베버는 이것을 자본주의 윤리로 만들었습니다. 단독자로서 신과 대면하며 사는 사람은 돈을 벌어도 하늘나라에서 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세속적으로 돈을 안 쓰고 저축을 합니다. 그래서 자본의 축적이 가능해졌다는 것이죠. 그리고 직업(Vocation)이 바로 신의 소명(God’s calling)이라는 것입니다. 보케이션(Vocation)이라는 말에는 직업(Profession)이라는 뜻도 있지만 신의 소명(God’s calling)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런데 반해서 동양인들은 그러한 단독자의 내면적 윤리가 없고 사회적 체면만은 중시하는 피상적인 사회윤리만 있는데 그것이 곧 유교가 말하는 도덕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동양 사람들은 돈을 벌었다하면 우선 체면을 차려야 하기 때문에 잔치도 거하게 열어야 하고 사람들을 엄청나게 부른다는 거예요. 그리고 내세에 돌아갈 하나님의 나라가 없기 때문에 돈이 있으면 주지육림에 뿌려서 과시하게 되고, 그래서 동양에서는 자본이 축적될 길이 없었다는 뭐 이런 논리죠. 이태백도 술 연못에 빠져 죽었고 그런 가운데에서 시()는 나왔을지 몰라도 자본 축적은 될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동양의 근세에 자본주의를 이룩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는 터무니없는 개소리를 막스 베버가 지껄여 댔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판단이었는가 하는 것은 일본, 대만, 싱가포르, 한국 등 유교 문명권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자본 축적이 진행되었다는 사례로 여실히 반증되고 있죠.

 

 

 

 

 

 

 

19. 신독사상과 반효율주의

 

 

신독자의 자세란 내 주위의 머리카락을 줍는 행위

 

동양인들에게는 단독자 개념이 없습니다. 동양인이 인간존재를 파악하는 방식은 도()라고 하는 개념입니다. 도는 나와 우주 만물이 이미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뜻하며 따라서 홀로 있을지라도 조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도는 잠시도 떠날 수 없다는 말과 홀로 있을 때 삼가 한다는 말이 왜 나오느냐 하면, 도에서 잠시라도 떠날 수 없는 삶 그러한 삶은 남이 보든 안 보든 똑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남이 보는 데서 하는 행위보다는 보지 않는 데서 하는 행위야말로 이 문명을 개혁해 나갈 수 있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문명의 진실이라는 것입니다.

 

도올서원 학생 중에서 주변에 굴러다니고 있는 머리카락 하나라도 손에 집고 일어나는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길거리를 지나가다가 쓰레기를 보면 남이 보지도 않고 알아주지도 않지만 주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줍는 행위가 비록 남에게 보이지 아니 할지라도 이런 나의 행위가 전체의 도()에 항상 관련이 되어서 남에게 언젠가는 혜택을 주리라는 믿음, 이 도()에 대한 보편적인 믿음이 없이는 동양인들이 말하는 군자의 삶은 성립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노동은 시간 대비로 따질 수 있는 게 아니다

 

오늘날 노동 생산성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입니까? 맑스의 최대 실수는 인간 노동의 가치를 시간으로 계산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는 점입니다. 맑스는 상품가치의 실체를 순수하게 노동시간으로 환원하여 노동착취를 과다한 노동시간에서 오는 것이라고 크게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맑스에게는 근세의 수량적 가치관과 관련하여 모든 가치를 수량화해야만 하는 절박함이 있었기 때문에 자본론1권에서부터 수량적인 분석을 시도한 거예요. 그러나 노동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문화를 창출하는 의 행위입니다. 그 노동은 절대 시간이라는 양으로 계산될 수 없어요. 이것이 동양인들의 생각입니다.

 

내가 집을 짓느라고 나이 많은 목수와 젊은 목수에게 일을 시켜보았는데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6,70살 되는 옛날 도목수들은 놀 때는 판판히 놀면서 일을 안 하지만, 자기가 무엇을 만들고 깎을 때에는 누가 보든 안 보든 시간 제한 없이 밤을 새우더라도 완벽하게 완성을 해냅니다. 그런데 요새 젊은 목수는 아침에 와서 기계로 붕붕붕 일하다가 시간 되면 일하던 중간에 손을 털고 일어나버려요. 그렇게 해서 어느 세월에 집이 지어지겠습니까. 일이라는 것은 반드시 그렇게 시간으로 딱딱 잘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때는 쭉 가다가 어떤 때는 쉬기도 하고 그래야 결과적으로는 더 효과적인 작업이 되고 또 좋은 작품이 나오는 것입니다.

 

시간을 가지고 인간을 착취하는 것은 비참한 일이지만, 가치의 창출 그 자체로 말하면 시간으로 계산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정보가 가치창출의 원천이 되고 있는 현대사회에 있어서는 맑스의 수량적 가치관은 별 의미가 없어요.

 

반복되는 얘기지만 옛날 일꾼들에게 일을 시켜보면, 요새 일꾼들과 가장 크게 다른 것이 보이지 않는 데서도 완벽하게 일을 한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요새 애들은 보이는 데에서는 완벽한 체하고 보이지 않는 데에서는 개판이에요. 도대체 미국이 소니제품을 따라 갈 수 없는 중대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지금 미국이 일본 제품을 따라갈 길이 없어요. 지금 미국의 자동차시장을 일본이 제패했습니다. 여러분 벤츠가 대단한 줄 알죠? 지금 그 무서운 벤츠의 아성이 깨졌습니다. 미국에서는 지금 벤츠보다 도요타에서 나오는 렉서스(LEXUS)라는 차를 더 알아주거든요. 20년 전만 해도 일본차는 미국에서 명함도 못 내미는 똥차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이렇게 완벽하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일본 노동자들의 질 높은 노동 때문입니다.

 

 

 

질 높은 노동을 가능케 하는 신독사상

 

내가 생각하기에 질 높은 노동을 가능케 한 가장 중요한 이유가 바로 신독사상입니다. 아주 간단한 거예요. 홀로 있을 때를 삼가 할 줄 아는 노동자, 그것이 없이는 그 문명의 질은 향상될 길이 없습니다. “숨겨져 있는 것보다 더 드러나는 것이 없고, 미세한 것보다 더 뚜렷한 것이 없다.” 그러니까 인간이 함부로 까불 수가 있겠습니까? 동양인에게는 내면적 윤리가 없다는 막스 베버의 말은 천만의 말씀입니다. 동양인에게 내면적 윤리가 없다고 하는 것은, 내가 보기에 근세 20세기 동양문화가 서구화의 충격 때문에 타락했을 때의 그 측면만을 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동양사회는 근세에 와서 매우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저께 새벽에 우리 어머님 댁에 갔다가, 우리 딸 미루가 가지고 오라고 해서 가보(家寶)가 될 만한 자수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 자수는 우리 어머니가 13살 때 만든 작품인데도 그 정교함은 이루 말로 다 할 수가 없어요. 요즘 어떤 애들도 만 12살에 그러한 수를 놓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실도 어머니가 손수 솜 같은 것을 꼬아서 만든 것이고 비단도 정교하기가 이를 데가 없어요. 요즘 바늘로 수를 놓으면 비단에 바늘 귓구멍이 뻥뻥 날 것입니다. 조선조 바늘이 요새 바늘보다 훨씬 좋았습니다. 일제 초기만 해도 우리의 일상적인 문화가 이런 수준이었는데 지금은 타락을 해도 너무 타락해 버렸어요. 우리는 너무도 많이 이 신독사상을 상실해 버린 겁니다. 그래서 중용(中庸)이 말하는 이 신독사상이야말로 우리의 고문명, 특히 조선시대의 유교문명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됩니다. 여기에서 조선조의 정예로운 장인문화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설명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도 보이는 것, 분명한 것, 들리는 것, 현명(顯明)한 것에 의해서만 세계를 보려 하고 있어요. 사실 한의학과 서양의학의 가장 큰 차이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서양의학은 너무 인체의 보이는 측면만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우리 동의학이 추구하는 세계는 보이지 않는 몸의 세계입니다.

 


 

 

유물명 : 연화봉황무늬자수방석(蓮花鳳凰文刺繡方席) 국적/시대 : 조선말기

 

 

 

110. 일곱가지 감정

 

 

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희노애락(喜怒哀樂)이 아직 발하지 않은 것 그것을 일컬어 중()이라고 하고, 발하여 모두 마디에 들어맞는 것 그것을 일컬어 화()라고 한다.
 
喜怒哀樂, 情也. 其未發, 則性也. 無所偏倚, 故謂之中. 發皆中節, 情之正也, 無所乖戾, 故謂之和.
희노애락은 정()이다. 발동되지 않은 것은 성()이다. 치우쳐지고 기울어지는 것이 없는 것을 ()’이라 하고, 발동되어 다 절도에 맞으니, ()의 바름으로 어그러짐이 없는 것을 ()’라 한다.

 

아주 유명한 구절입니다. 여기에 한의과 대학생들이 꽤 있습니다만 한의과 대학에서 매일 배우는 것이 있습니다. 모든 병인에는 내인(內因)ㆍ외인(外因)ㆍ불내외인(不內外因)의 세 가지가 있다는 것이죠. 외인이라는 것은 외사(外邪)를 말합니다. 감기 같은 것을 외사(外邪)라고 봐요. (((((() 은 것[六氣]이 그 대표적 예입니다. 그런데 나는 이 불내외인(不內外因)’이라는 개념이 영 머릿속에 안 들어옵니다. ‘불내외인내인도 아니고 외인도 아니라는 것인데 한의학에서 말하는 이런 개념들이 좀 막연한 데가 있어요. 음식상(飮食傷)ㆍ노권상(勞倦傷)ㆍ외상(外傷)이 모두 이 불인불내 개념에 들어가 있어요.

 

내인 즉 칠정상과 관련하여 생각나는 것이 조선조의 가장 유명한 논쟁이 사단칠정(四端七情)논쟁인데, 여기서의 칠정(七情)예기(禮記)』 「예운(禮運)편에 나오는 희((((((()입니다.

 

허나 한의학에서 말하는 칠정(七情)은 희((((((()으로 모두들 皇帝內經에서 나온 말로 알고들 있습니다. 이 칠정(七情)에 관한 논란이 아주 복잡한데 이게 참으로 웃기는 얘기입니다. 한의학책들을 보면 예외 없이 희((((((()내경에서 온 것 인 줄로 알고 칠정(七情)이라는 말을 쓰고 있어요. 그런데 지난번에 내경에 나오는 7정에 관해 레포트를 쓰라고 해서, 책을 뒤져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 수많은 한의학계의 인재들이 그것 하나를 발견 못했을까, 아이고 두()! 칠정(七情)이나 희((((((()이라는 말이 내경에는 없어요.

 

그런데도 장기(臟器)적으로 희()는 어떻고, ()는 어떻고, ()할 때는 무슨 약을 쓰고, ()할 때는 무슨 약을 쓴다는 등등 주를 달기까지 합니다. 문헌을 얼마나 안 보는 무지막지한 사람들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라는 말은 한의학에서 문헌적 족보가 없는 말입니다. 이것의 출전은, 아직 내가 정확히 확인은 못했지만 상당히 후대(아마 이후)에 형성된 말일 것입니다. 이것은 한의학의 문헌을 모르는 무식한 날도둑놈 같은 놈들이 떠드는 말이예요.

 

그리고 희((((((()예기(禮記)』 「예운(禮運)편에 나오는데 좀 웃기지 않습니까? 이라는 것도 감정의 상태를 나타내기에는 좀 이상한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보기에 이제마라는 사람이 위대한 점이 인간의 감정은 희노애락(喜怒哀樂)이면 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용(中庸)을 얘기할 때 칠정(七情)을 얘기하지 말라고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사단칠정론이라는 말도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단칠정론에서 일곱이라는 숫자는 하등의 의미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단칠쟁(四七論爭)에서는 정() 전체를 논할 뿐이지 칠정(七情)의 조목을 따져서 논쟁하는 경우는 하나도 없습니다. 결국 실제적으로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 밖에 없는 것이죠. 동양문헌에서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감정의 형태를 가장 확실하게 묘사한 말은 이 중용(中庸) 1장의 희노애락(喜怒哀樂)밖에 없습니다. 이점을 여러분들이 명확하게 인식해 주기 바랍니다. 이제마의 위대한 점은 그렇게 많은 학자와 한의사들이 칠정(七情)을 말해도 그 말에 속지 않고 중용(中庸)에 고집(固執)해서 희노애락(喜怒哀樂)만을 얘기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마는 희노애락(喜怒哀樂)을 희노(哀怒애락(喜樂)으로 배열을 했습니다.

 

 

슬픔(sad)
노여움(anger)
소화의 즐거움
번식의 즐거움

 

 

인간의 감정상태를 나누려고 한다면 색깔을 수천가지로 나누듯 한이 없으나 인간의 감정을 한마디로 가르면 애노(哀怒)와 희락(喜樂)밖에 없습니다. 수천가지의 색깔을 단순화시키면 3원색(Primary Colors: Red, Green, Blue)으로 환원되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단순할수록 아름다운 거예요. 애노(哀怒)라는 것은 Pessimistic sentiments(비극적 감정)이고, 희락(喜樂)이라는 것은 Optimistic sentiments(희극적 감정)입니다. 그러면 애()와 노()는 어떻게 다르고 희()와 락()은 어떻게 다른가가 문제입니다. 애노(哀怒)는 둘 다 슬픈 감정이라도 애()는 슬픈(sad) 것이고 노()는 노여운(anger) 것입니다. 그러나 희()와 락()은 조금 애매합니다. 기쁜 것과 즐거운 것이 어떻게 다르죠? 이제마는 재미있게도 애···락을 폐(((()에다가 배속시켰습니다. ‘천지론으로 해석하면 애노(哀怒)는 하늘의 감정이고 희락(喜樂)은 땅의 감정입니다.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땅에서 난 것을 우리가 먹어서 다시 땅으로 돌리는 작업인데 그것이 즐겁다는 거예요. 또 하나의 대표적인 땅의 즐거움(earthly pleasure)Sex입니다. 땅에서 나의 개체를 번식시키는 행위인 섹스란 놈은 즐거운 것입니다. 성교하는 순간에 큰 고통을 느낀다면 모든 생물은 번식을 안 하겠죠. 그런데 묘하게 거기다가 기발한 감각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정말 위대한 쾌락이죠. 아무리 스필버그가 영화로 쾌락을 많이 준다고 해도 오르가즘에 도달하는 그 순간만은 양보할 수 없다고 여러분들도 생각하죠? ? ? (웃음) 이제마에 있어서 락()이라는 것은 분명히 Sexual pleasure를 말하는 것이며 희()는 주로 소화기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이제마에 있어서 신()은 락()과 상응되며 생식하는 것과 관련이 있고, ()은 희()와 상응되며 소화하는 것 즉 흡취지기(吸取之氣)와 관련 있습니다.

 

하늘의 감정은 대개 슬픈 거예요. 멀리 떠나가 있는 님을 그리워한다든가, 나와 관련이 없지만 보이지 않는 데에서 고통 받는 사람을 위해 나의 인생을 헌신해야겠다는 성직자의 생활도 하늘의 감정입니다. 그래서 하늘만 쳐다보고 사는 사람들은 슬프죠. 땅만 쳐다보고 사는 사람들은 대개 똥배 나오고 기쁜 사람들입니다.(齋生大笑) 희노애락(喜怒哀樂)이라는 말에 음양론적인 구조가 들어가 있나 없나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천지론적 감정으로 말한다면 이제마는 상당히 기발하게 분류해 낸 것입니다. 그리고 중용(中庸)에 이미 천지 코스몰로지가 들어왔다고 한다면 내가 앞서 주장했는데 그렇다면 이 희노애락(喜怒哀樂)’이라는 말에는 이제마적 함의가 분명히 내포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문헌의 오리지날한 성격을 모르는 사람들이 칠정(七情)이 어떻고 구정(九情)이 어떻고 십정(十情백정(百情)으로 나누고 거기에 처방을 때리고 지랄들을 하는데 그게 다 소용이 없는 짓들입니다. 더구나 그런 의미 없는 것을 다 암기해야 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일 것입니다. 도저히 가치가 있어 보이지 않는 것들을 외우는 것이 한의과 대학 6년 동안의 생활이라면 좀 문제가 있겠죠. 한의과 대학에 적성이 가장 잘 맞는 사람은 생각 없이 단순한 암기력이 뛰어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한의대 6년을 아주 행복하게 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식이 있는 사람에게 한의과 대학생활이라는 것은 엄청난 고문의 세월입니다. 그 고문을 견디다 못해서 결국 뛰쳐나간 우리 황대길 군과 같은 사람이 있어요. 나는 황대길씨를 참으로 존경합니다. 우리 시대의 유일한 양심 같아요. 그런데 나는 1년이면 끝나니까 마지막까지 참자하고 견디고 있습니다.

 

 

 

 

미발(未發)의 미()아직이라는 말인데 시간적 순서(time sequence)를 전제로 해서 한 말입니다. ‘지위(之謂)’가 아니고 위지중(謂之中)’이라고 했죠? 여기서의 지()는 분명히 희노애락지미발(喜怒哀樂之未發)’이라는 말을 받는 명확한 지시대명사입니다. “그것을 일컬어서 중()이라고 한다.”

 

여기서 가장 생각하기 쉬운 중의 개념은 적자지심(赤子之心)’같은 것입니다. ‘적자지심(赤子之心)’을 우리가 좋아하는 이유는 희노애락(喜怒哀樂)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예요. ‘적자(赤子)’에 대한 문제도 이 중()과 관련되어 유교에서 계속 논쟁이 되어온 것입니다. ()이라는 개념을 무엇과 무엇의 밸런스(Balance)로 생각하기 쉬운데 전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중용(中庸)에서 말하는 중()의 개념은 발현되기 이전의 어떠한 것을 뜻합니다. ()이라는 것을 우주의 본체로 말해도 좋고 더 어마어마한 무엇으로 말해도 좋으나 성((()의 문제와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유교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성((()가 궁극적으로 희···락이라는 인간의 감정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동양사상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도를 얘기하는데 왜 갑자기 희노애락(喜怒哀樂)이 나왔는가? 결국은 유교문명이 말하고자 하는 인간관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기독교가 말하는 하늘나라에 가고자 하는 것도 아니요 구원을 받고자 하는 것도 아니요 뉴톤처럼 과학적 법칙을 완벽히 알아서 이 세계에서 잘 써먹자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어떻게 이 희노애락(喜怒哀樂)이라는 감정을 조절할 줄 아는 인간을 만드느냐 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의 핵심이죠. 중용(中庸) 1장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자연 스스로 그러함은 물론 인간 문명의 모든 문제는 결국 희노애락(喜怒哀樂)의 과불급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사회과학의 문제도 생각해 보세요. 독재가 왜 문제가 됩니까? 한마디로 전두환이가 욕심내는 데서 문제가 생기는 것 아니겠어요? 그 엄청난 학살이 저질러진 동기가 뭐냐 이거요. 자기가 정권 잡아서 대통령 한번 해먹고 싶으니깐 그런 거잖아요! 인간세의 행동양식은 이와 같이 알고 보면 간단한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 동양사상은 너무 시시한 사상 같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근세 서양이론에는 20세기에나 와서야 이런 모티비즘(Emotivism, 도덕 정서설)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동양사상은 인간존재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신의 문제도 아니고 진리의 문제도 아니고 지식의 문제도 아니고, 오직 희노애락(喜怒哀樂)의 문제라는 것을 항상 말합니다. ()이라는 것은 희노애락(喜怒哀樂)이 발현되기 이전의 가능성(Potentiality)으로서의 중()이고, 미발(未發)이라는 것은 시간선상에서의 아직을 말합니다. 그런데 희노애락(喜怒哀樂)이 이미 발했을 때 문제가 되는 이유는 이 희노애락(喜怒哀樂)은 반드시 문명의 장을 갖기 때문입니다. 희노애락(喜怒哀樂)은 동물의 세계에도 있는 것인데, 동물의 왕국 같은 영화들을 보면 희노애락(喜怒哀樂)이 얼마나 명백한지 알 수 있어요. 여러분이 키우는 개를 보면 으르렁거릴 때와 좋다고 꼬리를 살랑거리는 때의 구별이 아주 명백하죠? 그러나 개의 희노애락(喜怒哀樂)은 큰 문제가 안 됩니다. 왜냐하면 과불급이 없기 때문이죠. 개가 자기 짝이 없어졌다고 심각하게 고민을 하겠습니까? 연애편지를 쓰겠습니까? 그러니 상사병에 걸리거나 암에 걸려 죽는 일은 없지요. 개는 스스로 그러한범위 내에서 희노애락(喜怒哀樂)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인간의 희노애락(喜怒哀樂)은 문명의 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발현될 때에는 반드시 그 문명의 주어진 상황에 맞아야 한다는 것이죠. 중절(中節)의 중()은 성조(聲調)가 제1성 평성(平聲)이 아니고 제4성 거성(去聲)입니다. 화살이 과녁에 들어맞는다[的中]고 할 때의 중()과 같은 뜻입니다. 또한 여기서의 절()은 문명의 상황(Situation of civilization)을 뜻해요. 장례식에 가서 깔깔대고 웃으면 되겠습니까? 감정이 발현되는 게 시간과 장소에 따라서 다 달라야 합니다. 슬프지 않으면 슬픈 척이라도 해야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사람들은 현명하게도 곡()이라는 제도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편하게 가자는 거예요. 그래서 어이, 어이하고 울면 됩니다. 그러면 아주 슬픈 사람도 곡을 하는 동안에 너무 슬퍼서 몸을 해치는 일이 없게 되고, 슬프지 않은 사람은 남보기에 흉하지 않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다 중용(中庸)의 원리에 의해서 짜여진 동양인의 풍습입니다. 희노애락(喜怒哀樂)이 아직 발현되지 않았을 때는 그것이 중()이지만, 발현되었다 하면 그 상황에 맞아야죠. 왜냐하면 인간존재는 이미 문명 속에 들어와 있고 성()부터 교()까지 연결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 상황에 맞는 게 바로 화()라는 것입니다.

 

위지화(謂之和)’ ()은 서양철학으로 말하면 본체론이고 화()는 현상론입니다. ()은 실체를 말하고 화()는 기능적 측면을 말해요. 그 기능들이 어떻게 조화되느냐 하는 문제죠. ()와 화()는 분명히 서로 다릅니다.

 

 

 

 

111. 사상의학과 중용학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 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
중이라고 하는 것은 천하의 모든 행위가 이루어지는 큰 뿌리이며, ()라는 것은 천하에서 언제 어디서나 달성되어야 할 길이다. ()과 화()의 지극한 데 이르게 되면 하늘과 땅이 각기 바른 위치와 공능을 갖게 되고 만물이 잘 자라게 된다.
 
大本者, 天命之性, 天下之理皆由此出, 道之體也. 達道者, 循性之謂, 天下古今之所共由, 道之用也. 此言性情之德, 以明道不可離之意. , 推而極之也. 位者, 安其所也. 育者, 遂其生也. 自戒懼而約之, 以至於至靜之中無所偏倚, 而其守不失, 則極其中而天地位矣.
대본(大本)이라는 것은 천명의 성으로, 천하의 이치가 다 이로부터 나오니, ()의 본체다. 달도(達道)는 성()을 따름을 말하니, 천하고금에 공유하는 것으로 도()의 쓰임이다. 이것은 성정의 덕을 말하여 도가 떠날 수 없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는 미루어 지극히 하는 것이다. ‘()’란 있는 곳에서 편안하다는 것이다. ‘()’은 태어난 것을 이루어주는 것이다. 경계하고 두려워함으로부터 요약하여 지극히 고요한 가운데 치우치고 기울어짐도 없는 지킴을 잃지 않는 데에 이르면 중()을 지극해지고 천지가 자리 잡는다.
 
自謹獨而精之, 以至於應物之處無少差謬, 而無適不然, 則極其和而萬物育矣. 蓋天地萬物, 本吾一體. 吾之心正, 則天地之心亦正矣; 吾之氣順, 則天地之氣亦順矣. 故其效驗, 至於如此. 此學問之極功, 聖人之能事, 初非有待於外, 而修道之敎亦在其中矣. 是其一體一用, 雖有動靜之殊, 然必其體立而後用有以行, 則其實亦非有兩事也. 故於此合而言之, 以結上文之意.
홀로됨을 삼감으로부터 정밀히 하여 물건에 응하는 곳에 조금도 어긋남과 오류가 없어 가는 곳마다 그렇지 않음이 없음에 이르면 화()가 지극해지고 만물이 길러진다. 대저 천지만물은 본래 나와 하나의 몸이다. 나의 마음이 바르면 천지의 마음도 또한 바르고, 나의 기가 순하면 천지의 기 또한 순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공효의 체험이 이와 같음에 이르는 것이다. 이것이 학문의 지극한 공이고, 성인의 능한 일로, 애초에 외물을 기다릴 게 없이 수도(修道)’의 가르침이 또한 그 가운데 있다. 이것은 하나의 체와 하나의 용이 비록 움직이고 고요함이 다르지만 반드시 체가 선 이후에 용이 행해지면 그 실제는 또한 두 가지 일이 아닌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합하여 그것을 말함으로 윗 문단의 뜻을 결론지었다.

 

 

투쟁을 통해 이룩해야만 하는 사회

 

대본(大本)은 본체론적 세계이고 달도(達道)는 현상론적 세계이며, 대본(大本)은 체()의 세계이고 달도(達道)는 용()의 세계입니다. 불교의 체용론(體用論)’으로 중화를 해석하는 이론들이 송(명대(明代)에 오면 많아지는데 특히 명나라 때에 많습니다. 그러므로 대본(大本)과 달도(達道)라는 말을 잘 이해해야 됩니다. 고대인들은 언어를 쓰는 방법이 아주 치밀하거든요.

 

한문을 좀 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한문 구절은 줄줄 외우면서 아무 생각도 안하고 대본(大本달도(達道) 참 좋은 말이다하고 그냥 넘어갑니다. 이게 소위 말하는 한문 실력이라는 거예요. 우리나라의 한학은 썩었습니다. 젊은이들에게 그냥 그렇게만 가르쳐 주고 외우라고만 하면 아무 의미가 없죠. 이 책을 쓴 사람들은 한 글자 한 글자를 명백하게 선택해서 썼다는 걸 알아야 해요.

 

()은 달성해야만 하는 당위(Sollen)의 세계입니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예요. ()은 인간존재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화()는 교()를 통해서 애써서 만들어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동양사상을 그냥 두리뭉실하게 조화사상이라고들 하는데 웃기는 얘기입니다. 조화는 거저 되는 게 아니다! 조화는 달도(達道), 즉 인간이 투쟁해서 달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동양사상은 부조화를 조화로 달성시키려는 사상이라는 점을 깊게 새겨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동양사상하면 다 조화되어 있고 그냥 뭉뚱그려서 좋은 것인 줄로만 압니다. 그러나 동양 사람들도 부조화된 현실의 괴리와 억압과 차별의 문제를 매우 깊게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단어를 쓴 거예요.

 

 

 

에콜로지, 하늘과 땅의 경영권을 가진 인간의 책임

 

문명의 최대의 목표는 중화를 이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것이 중요할까요? ‘하늘과 땅이 자리를 잡는다이 말은 오늘날 에콜로지(Ecology)와 같은 문제의식의 소산입니다. 유가에 의하면 이미 하늘과 땅에 대한 경영권이 인간에게 넘어 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삼재론(三才論)이죠. 인간이 잘못하면 하늘과 땅의 위치가 허물어져 버린다는 거예요. 오늘날 모든 생태학적 문제는 바로 천지가 제자리를 못 찾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인간은 책임이 있다고 중용(中庸)사상은 그것을 말하고 있어요. 인간은 인간존재로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행위는 천지의 자리에까지 영향을 끼칩니다. 에콜로지 사상을 따로 거론할 필요가 없습니다. 천지가 바로 자리를 잡아야만 그 속에서 만물이 제대로 자라날 수 있습니다. 그 만물 중의 하나가 인간이고 그 인간이 만든 것이 문명입니다. 그리고 그 문명을 이룩하는 것을 과정과 실재가 곧 교육입니다.

 

중용(中庸) 1장은 동양문명의 대서설입니다. 2에 나오는 중니왈 군자중용 소인반중용(仲尼曰 君子中庸 小人反中庸)’과 같은 구절과는 차원이 달라요. 텍스트 상으로 1장과 2장은 너무도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1장은 대문명의 구상을 가진 사람에 의해서 씌여진 논설(Treatise)이고 이 논설은 진한제국(秦漢帝國)을 전제하지 않고는 성립할 수 없습니다. 중용(中庸) 1장의 저자는 인간의 문명과 천지와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며 그리고 인간은 거기서 무엇을 해야만 되는가라는 거대한 구상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마의 사상의학과 중용

 

중용(中庸)사상을 이제마 식으로 말하면 희노애락(喜怒哀樂)에 해당되는 각 장기에 과불급이 생기는 현상이 바로 체질, 즉 사상(四象)이라는 것입니다. 이제마의 사상(四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체질상의 폐비간신의 과불급을 어떻게 중()의 상태로 가지고 가는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너무 감정에 치우쳐서 과불급이 생기면 불건강하게 되거든요. 이것이 이제마가 생각하는 건강의 개념입니다. 그래서 중()과 화()를 실현하는 사람이 바로 성인(聖人)인 것입니다. 폐비간신의 문제는 약리상으로 조절할 수가 있습니다. 간이 너무 큰 사람은 계속 간땡이 부은 짓만 하고 그 사람의 과불급의 상태로 그 방향으로만 발전이 됩니다. 이런 환자에게는 의인이나 길경, 대황 등 간을 치는 약을 씁니다. ()기가 샌 사람은 하초가 강해서 항상 빳빳하게 꼴려 있는 놈들입니다. 결과적으로 맨날 밑으로 쏘고 너무 많이 쏴서 하초가 항상 불안해요. 그래서 상대적으로 비()가 약해집니다. 섹스가 강한 사람들은 대개 소화가 잘 안됩니다. 왜냐하면 비()가 더워져야 하는데 거꾸로 냉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에게는 속을 덥히는 인삼, 부자 같은 약을 씁니다. 이런 사람들은 변비가 심해요. 어깨가 좁고 호리호리하면서 엉덩이가 큰 빠걸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빠걸들은 술은 잘 먹고 안 취하는 데 소화기는 매우 나쁘죠. 그런 사람은 똥을 싸도 매일 깨질깨질 하거나 아니면 변비로 고생을 합니다. 이 사람들은 며칠씩 똥을 안 눠도 그저 그래요. 이제마는 이런 사람에게 콩알 반쪽만큼만 먹어도 설사를 하는 파두와 같은 무서운 약을 몇 알씩이나 씁니다. 그래도 끄떡없습니다. 이제마는 파두가 더운약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실 극독이라는 것은 무섭게 더운 약들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조선 성리학에서 이런 문제는 논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허한 대로 빠지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신대비소(腎大脾小)한 소음인(小陰人)들은 항상 파두만 먹으면 잘 살 수 있을까요? 보리와 생강을 같은 온도에 달여 먹더라도 전혀 다릅니다. 보리차는 뜨거운 것을 마셔도 시원합니다. 이것은 보리는 겨울 내내 얼음장 같은 땅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성질이 냉한 탓이예요. 그래서 속이 더운 소양(小陽)인들이 먹어야지 소음(小陰)인들이 먹으면 안 좋습니다. 소음인들은 생강차를 먹어야 합니다.

 

 

 

집일(執一)이 좋은 것이었을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최악의 수다

 

그렇다면 나는 속이 냉한 체질이니까 항상 부자, 육계, 생강, 인삼, 계피 등 더운약만 먹으면 나의 성정(性情)도 조절되고 희노애락(喜怒哀樂)도 다 잘 될까요? 이제마는 이것을 웃기는 얘기라고 생각했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호연지기(浩然之氣)로써 인간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아요. 호연지리(浩然之理)를 다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약리만으로는 건강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이라는 책에서 내린 이제마의 결론입니다. 인간으로서 건강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성정을 조절하는 것이기 때문에 중용론(中庸論)으로 다시 복귀가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호연지기(浩然之氣)’는 의사가 다스릴 수 있지만 호연지리(浩然之理)는 자기가 다스릴 수밖에 없습니다. ‘호연지리(浩然之理)’를 다스리려면 책심책기(責心責氣)하라고 이제마는 말합니다. 자기 마음을 책망하고 자기 기()를 책망하라는 거예요. 그래야만 인간은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제마의 성인론(聖人論)’입니다.

 

이제마의 사상의학(四象醫學)은 기본적으로 중용학(中庸學)입니다. 중용(中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지요. 중용(中庸)을 모르고 이제마를 얘기한다는 것 가소로운 얘기입니다. 한의과 대학 교수님들이 이런 고전을 제대로 공부해서 문헌을 다룰 줄 알아야 하는데, 이런 배경이 없으니까 한의학도 제 길을 찾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것을 공부하셔야 합니다. 이것은 비단 한의학과 학생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예요.

 

 

 

 

112. 1장에 대한 주자해설

 

 

右第一章. 子思述所傳之意以立言:
오른쪽은 1장이다. 자사가 전수한 바의 뜻을 기술하여 글을 지어서

 

주자가 편집을 하면서 집어넣은 말인데 엉터리 같은 말입니다. 자사 이전에 이런 얘기가 있었다는 것도 거짓말입니다. 주자가 잘 몰라서 한 얘기죠.

 

 

 

首明道之本原出於天而不可易, 其實體備於己而不可離,
맨 먼저 도의 본원이 하늘에서 나와 쉽게 바뀔 수 없음을 밝혔고, 그 실체가 자기 몸에 갖추어져 떠날 수 없음을 (밝혔다)

 

여기서의 실체는 서양철학에서 말하는 서브스텐스(Substance, 본질)가 아니고 허()가 아닌 구체적인 몸덩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도의 구체적인 구현은 라는 존재에 구비되는 것이어서 그것은 떠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次言存養省察之要, 終言聖神功化之極. 蓋欲學者於此反求諸身而自得之, 以去夫外誘之私, 而充其本然之善. 楊氏所謂一篇之體要, 是也. 其下十章, 蓋子思 引夫子之言, 以終此章之義.
다음에 존양·성찰의 요점을 말하였고 맨 끝에 성신의 공화의 지극함을 말하였으니, 배우는 자들이 여기에 있어서 자기 몸에 돌이켜 찾아서 스스로 터득하여 바깥에서 유혹해 들어오는 사특한 것을 물리치고 본연의 선()을 충만하게 하고자 한 것이다. 양씨가 말한 한편의 핵심이라는 것이 이것이다. 이 아래 열개의 장은 자사가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이장의 뜻을 맺은 것이다.

 

존양성찰지요(存養省察之要)’는 희노애락(喜怒哀樂)의 컨트롤을 뜻합니다. 종언(終言)치중화 천지위언 만물육언(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을 말하는 것입니다. 양씨는 주자의 이전 북송시대의 양시(楊時, 1053-1135)라는 학자인데 자()는 중립(中立)이고 제자들이 귀산선생(龜山先生)이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일편이라는 것은 중용(中庸) 전체를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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