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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선생 중용강의, 해제 - 1. 중용은 실학이다 본문

고전/대학&학기&중용

도올선생 중용강의, 해제 - 1. 중용은 실학이다

건방진방랑자 2021. 9. 16.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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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제 1. 중용은 실학이다

 

 

그러면 첫 장에 들어가기에 앞서 주자가 중용(中庸)’이란 말의 정의와 중용(中庸)이라는 텍스트 전체에 대한 생각을 요약해서 제1장 앞에 달아놓은 일종의 해제 비슷한 장구부분을 먼저 해석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子程子: “不偏之謂中, 不易之謂庸.
정자선생께서 말씀하기를 치우치지 않는 것을 중이라고 하고 바뀌지 않는 것을 용이라고 한다.

 

()’이라는 것은 치우침 즉 과()ㆍ불급(不及)을 말합니다. 아까 중()을 영어의 미들(Middle)이 아니라고 했듯이 과불급이라는 말도 세포의 세포액이 너무 많다 세포액이 모자른다라는 그런 전체적인 개념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또한 불역(不易)이라는 것은 콘스탄트(Constant, 상수)하다, 함부로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지 서양에서 말하는 불변(不變)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너무 중요하고 일상적인 것이기 때문에 쉽게 변화되는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자정자(子程子)의 말로 인용한 것은 곧 주자가 정명도ㆍ정이천 형제 그 중에서도 특히 이천선생의 중용(中庸)에 대한 생각을 존중하고 그것을 정통으로 해서 중용(中庸)을 해석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될 수 있을 것입니다.

 

 

 

, 天下之正道; 庸者, 天下之定理. 此篇, 門傳授心法. 子思恐其久而差也,
()’은 천하의 바른 도요, ‘()’은 천하의 정해진 이치이다. 이 책은 바로 공자 스쿨에서 전해온 심법인데 자사께서 그것이 오래되어 원래에서 멀어져 버릴까함을 두려워하셨다.

 

차편(此篇)’이라는 말은 예기의 한 편명으로서의 중용(中庸) 전체를 말합니다. ‘전수심법(傳授心法)’이라는 말은 불교 용어입니다. 주자가 굉장히 불교를 배척한다고는 했지만 우리가 지금 서구문명의 언어를 일상생활에서 많이 쓰는 것처럼 주자도 당시에 이미 일상 언어화한 불교용어를 쓰지 않을 수 없었어요. ‘전수심법(傳授心法)’이라는 말은 공자가 직접 마음으로 전한 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는 베리에이션(Variation, 차이)이나 다이버전(Diversion, 전환) , 원류(原流, original)에서 벌어진다는 뜻입니다.

 

 

 

故筆之於書, 以授孟子.
그러므로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맹자(孟子)에게 전해주신 것이다.

 

심법(心法)’이라는 것은 글로 쓴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터득시키는 것들이었습니다. 내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강의한 내용 같은 것은 내 마음과 여러분들의 마음이 통해서 알아들은 것이므로 심법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런데 심법이라는 것은 오래가면, 어떤 학생은 김용옥 선생이 이렇게 얘기했다고 하고 또 어떤 학생은 저렇게 얘기했다고 하여 차(, variation)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더 개판이 되기 전에 이것을 책으로 썼고 맹자(孟子)에게 전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다 드라마 같은 쌩구라입니다. 전수한다는 것은 사발과 함께 도통을 전수하는 불교적 사고방식으로서 유교에는 원래 이런 것이 없었거든요. 이것은 주자시대의 일상용어일 뿐이지 사실이 아닙니다. 맹자(孟子)에게 의발(衣鉢)을 전해주듯이 이 책을 전수했다? 맹자(孟子)중용(中庸)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없어요.

 

 

 

其書始言一理, 中散爲萬事, 末復合爲一理.
이 책은 처음에 일리(一理)를 말하였고, 중간에는 흩어져서 만사가 되고, 나중에는 다시 합해져서 일리(一理)로 수렴한다.

 

일리(一理)’라는 것은 한마디로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입니다. 중용(中庸)은 오늘 우리가 보는 장구(章句)의 제 일장에서 중용(中庸) 전체의 내용이 완성되어 있습니다. 중국 고전들은 그런 의미에서 묘한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그 방대한 책을 저술하면서 1장에다 그것을 다 압축해서 집어넣고 그걸 풀어나갑니다.

 

이 구절의 구조는 주자가 이해한 중용(中庸)의 사상적 흐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에서 만()으로 갔다가 다시 일()로 수렴되는 위대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주자가 나름대로 중용(中庸)이란 텍스트를 파악한 방법이며 또 실제로 그렇게 되어있기도 해요. 중용(中庸)의 앞부분에는 성명론(性命論)’이 있으며 중간에는 일상적 윤리에 관한 아규먼트(Argument, 주장, 논점)가 핵심을 이루고 있고 뒤에 가서는 성론(誠論)’으로써 다시 수렴되어 있습니다.

 

 

 

放之則彌六合, 卷之則退藏於密, 其味無窮,
그것을 풀어놓으면 온 우주에 가득 차고, 말아서 수렴을 하면 은밀한 곳에 감추어진다. 그러면서 그 맛이 끝이 없다

 

육합(六合)’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나오는 말인데 천지사방을 가리키는 것으로 우주를 말하는 것입니다. ‘()’은 두루마리를 촥 펼지는 듯한 느낌이고 ()’은 둘둘 말아 들이는 것인데, 펼치면 우주에 가득 차고 말아서 수렴하면 인간의 깊은 내면으로 파고든다는 말입니다. ‘퇴장어밀(退藏於密)’이란 말은 주역(周易)』 「계사(繫辭)에 나오는 말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역시 문장을 쓰는데 이 이라는 멋있는 표현을 썼습니다. 고전을 읽을 때 이 맛을 느낄 줄 알아야 해요. 고추장, 된장, 간장만 맛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문장 읽을 때 이것은 짭짤하다, 저것은 쌉싸름하다는 맛이 와야 하는 거예요. 고전의 맛은 무궁무진하죠. 여러분들도 고전의 맛을 느낄 수 있는 경지에 가야 훌륭한 문장을 쓸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유명한 말이 나옵니다.

 

 

皆實學也.
모두 진실한 학문이다.

 

나의 독기학설(讀氣學說)이라는 책을 보면 실학(實學)’실학은 우리역사에서 존재한 적이 없다. 실사구시의 개별적 학풍만 있었을 뿐이다. ‘실학을 근대성의 맹아라는 관념으로부터 연역하여 그것이 마치 조선왕조사상의 실체적인 것처럼 본 것은 모두 일제의 관념에 세뇌된 학자들의 소행일 뿐이다. (중략) 실학운동은 일제시기로부터 시작된 운동이며, 조선사상사와는 관련이 없다. -중용한글역주, 191이라는 말에 대해서 자세히 언급되어있습니다(독기학설, pp 18~44). 우리나라에서 실학 논쟁하는 사람들이 제일 많이 인용하는 것이 바로 중용장구(中庸章句)에 나오는 이 구절인데 이게 참 웃기는 일이예요. 조선후기 사상의 한 사조로 일컬어지고 있는 실학과 여기의 이 실학은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여기의 실학은 허학(虛學)의 단순한 반대로 고유명사가 아니고 일반 명사입니다. 붕 뜬것이 아니고 리얼리티가 있어서 인생을 살면서 배워 얻을 것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위에 얘기한 일리(一理)에서 시작해서 만사(萬事)로 가고 다시 일리(一理)로 수렴하며 육합에 가득 차고 은밀한데 감추어지는 가운데에서 실제로 얻어 배울 것이 있다는 말이지요. 이것을 가지고 근대 실사구시(實事求是)나 실학(實學)의 뿌리 운운하는 것은 넌센스입니다. 이 문제는 너무 거창하므로 나중에 다시 얘기하겠지만 내 독기학설(讀氣學說)을 읽으면 이 실학이라는 개념의 픽션에 얼마나 우리가 속아서 살았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독기학설(讀氣學說)이라는 책은 두 번 다시 양보할 수 없는 천하의 명저이므로 도올서원에 다니는 사람은 반드시 그 책을 읽어주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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