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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도올선생 중용강의 - 중용장구서 본문

고전/대학&학기&중용

도올선생 중용강의 - 중용장구서

건방진방랑자 2021. 9. 16. 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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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장구서 1. 장구와 집주

 

 

동양에서의 정통과 반역은 어떠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하는가? 주자는 정통인가? 반역인가? 주자는 불교라는 외래문명에 대하여 유교라는 정통을 갱생(Reclaim)하는 반역도다. 주자의 반역은 새로운 진테제임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던 안티테제, 즉 불교의 성격을 대폭 수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이 이른바 도통론(道通論)’이다. 신유학이 얼마나 철저히 이 불교의 법통을 모방한 도통론에 지배되었나 하는 것을 주자의 중용장구서(中庸章句序)는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장구(章句)’라는 말과 집주(集註)’라는 말의 차이

 

중용장구(中庸章句)’란 말은 주자가 중용(中庸)이란 책을 장(, chapter)과 구(, paragraph)로 나누었다는 의미에서 붙인 이름으로서, 이것은 주자가 중용(中庸)을 새로 편집했다는 뜻이 됩니다. 사서집주(四書集註)를 보면 대학(大學)중용(中庸)에만 장구서(章句序)’가 붙어있고 논어(論語)맹자(孟子)에는 장구(章句)’란 말이 없는데 그 이유는 논어(論語)맹자(孟子)라는 서물(書物)은 기존에 이미 완정(完整)한 텍스트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주자가 새삼 장구화(chapterizing)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도 대학(大學)중용(中庸)의 경우처럼 장으로 구분하여 각장에 대한 해설을 덧붙이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논어(論語)맹자(孟子)논어서설(論語序說)맹자서설(孟子序說)이 붙어 있을 뿐이고 장구서(章句序)란 말은 쓰이지 않았습니다.

 

논어(論語)에서는 자왈(子曰)’하고 나간 다음에 작은 글씨로 주자집주(朱子集註)만 붙어 있고 학이제일(學而第一)이란 편명(篇名)도 이미 한대(漢代)에 성립된 것이다】 『중용(中庸)의 첫머리처럼 자정자왈(子程子曰)~’ 하고 나가는 주자의 편집(editor‘s note)이 들어가지 않았죠. ‘자정자왈(子程子曰)~’도 주주(朱註)와 같이 역시 주자가 쓴 것이지만 편을 나누는(chapterizing) 의도에서 큰 글자로 박고 내용의 설명에 해당하는 주주(朱註)는 작은 글자로 박았던 것입니다. 집주(集註)와 장구(章句)의 차이를 아시겠죠? 한문 전적(前績)을 볼 때 이런 걸 세심하게 봐야 합니다.

 

 

 

주희가 심혈을 기울여 마지막까지 수정하며 완성한 글

 

논어(論語)맹자(孟子)에 비해 대학(大學)중용(中庸)예기(禮記)라는 거대한 책의 한 편에 지나지 않던 것인데 대학(大學)예기(禮記)42, 중용(中庸)예기(禮記)31권에 수록주자가 그 중에 이들 두 편을 뽑아서 사서운동(四書運動)을 일으켰다는 건 이미 강의한 바 있습니다. 예기(禮記)에 실려 있을 때와는 다르게 책의 순서를 재편했다는 게 주자의 업적인데, 주자는 이렇게 자기 스스로 새로운 장구를 만들고 난 다음 거기에다 장구서(章句序)를 쓴 것이지요. 즉 이 장구서(章句序)에는 주자가 중용(中庸)대학(大學)을 장구화하게 된 동기와 배경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대학장구서(大學章句序)를 보면 제일 끝에 순희기유이월갑자(淳熙己酉二月甲子)라고 날짜가 적혀있고 중용장구서(中庸章句序)에는 순희기유춘삼월무신(淳熙己酉春三月戊申, 서기 1189318일 당시 주자의 60)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두 책의 서문이 기록된 시간이 불과 한 달 차이란 걸 알 수 있죠? 그런데 한 달 사이에 대학(大學)중용(中庸)을 모두의 장구화 작업을 했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고 보면 주자가 이미 장구를 만들고 난 뒤에 최종적으로 그에 대한 서문을 쓴 것이 분명합니다. 이 장구서는 주자학 전체에서도 최고의 문장으로 꼽히는 걸작으로서, 스킵(Skip)할 수가 없는 부분입니다. , 들어가겠습니다.

 

 

 

 

중용장구서 2. 도통의 전해지지 않을까봐

 

 

중용장구서(中庸章句序)이것은 중용(中庸)‘preface’, ‘introduction’이 되겠죠.

 

 

 

中庸, 何爲而作也? 子思子憂道學之失其傳而作也.
중용은 어떠한 목적으로 지었는가? 자사자가 도학이 그 전을 잃어버릴까 염려하여 지었다.

 

하위(何爲)’는 말 그대로 무엇을 위하여이며, 따라서 이 글은 분명한 질문의 센텐스입니다. ()은 새롭게 만든다. , 없던 걸 새로 지어낼 때 쓰는 말이죠.

 

자사자(子思子), 이 말은 좀 이상한 표현입니다. 공자의 손자가 자사(子思)인데 그러면 성()은 역시 공씨(孔氏)겠죠. 성에다 자()를 붙이려니 공자(孔子)’가 되어서 원래 공자와 중복되기 때문에 안 되겠고, 부득이하게 이름에다 자사자(子思子)라고 붙였는데 좀 어색하지요. 예를 들어 오항녕(吳恒寧)이란 사람을 오자(吳子)라 하지 않고 항녕자(恒寧子)라고 한 셈입니다. 그렇지만 주자는 지금 자사를 높여 부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자가 말하는 도통론(道統論)에서 빠져서는 아니 될 사람이니까 역시 자(, master)라는 최고의 존칭을 붙여 부르고 있는 거에요.

 

()염려하다’, ‘우려하다라는 뜻으로서 지금도 우환(憂患), 우국충정(憂國衷情)이란 말에서 잘 쓰입니다. 아마도 동양인들의 심성에 깊이 녹아 들어가 있는 말인 것 같습니다. 실존철학에서 말하는 앙그스트(Angst, 불안, 공포, 고뇌)보다 깊이가 있는 말이지요.

 

자사자가 도학(道學)이 그 전()을 잃어버릴까 봐 중용(中庸)을 지었다[子思子憂道學之失其傳而作也].”

 

, 이것은 앞의 질문에 대한 명백한 답변입니다. 중용(中庸)이라는 책의 저작 동기, 그 목적을 밝히고 있어요. 그런데 도학(道學)이 실기전(失其傳)할까 염려하여란 말은 완전히 넌센스입니다. 왜냐하면 도학이라는 말은 원시(原始) 유가(儒家)에 도저히 해당될 수가 없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도학은 한참 뒤의 송나라 유학자들의 말(Neo-confucian phrase)이지 춘추 제자백가시대에는 찾아볼 수 없는 말입니다. 따라서 자사가 도학을 운운한다는 건 넌센스가 아닐 수 없어요.

 

이런 사실을 어떻게 알아내고 확인하느냐? 여러분, 모로하시 테쯔지(諸橋轍次, 1883~1982)대한화사전(大漢和辭典)알죠? 한학(漢學)을 하려면 반드시 봐야 할 사전입니다. 모두 13권인데 놀랍게도 모로하시 일인(一人)의 저작입니다. 서양의 지식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브리태니커에 필적할 거의 유일한 동양학 사전이지요. 일본 문명이 인류에 공헌한 위대한 업적중의 하나로서, 이걸 보지 않고는 한문을 말할 수 없습니다. 한자(漢字) 한 글자, 한 글자가 중국 고전에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를 깡그리 보여주는 사전인데 이 사전에서 도학 조를 찾아보면 공자나, 자사 당시에는 이런 말이 없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사가 도학이 실기전(失其傳)’할까봐 중용(中庸)을 지었다는 주자의 말은 넌센스죠.

 

하지만 중요한 것은 도학(道學)이 실기전(失其傳)할까봐.” 하는 주자의 말이 주자가 중용(中庸)을 바라보는 관점을 단적으로 드러내 준다는 것입니다. 사실, 도학지전(道學之傳)’은 불교에서 나온 말입니다. 불교에는 의발전수식이라는 전통이 강력한데요, 종교조직은 어디나 최고 권위자의 법통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전해 내려가는 길에 따라 정통과 이단이 갈리게 되고, 거기서 종파가 생겨나죠. 최근 우리나라 원불교의 종법사가 바뀌었죠. 불교 조계종에도 성철스님 다음에도 또 누가 종정이 되고 하잖아요.

 

여러분, ()ㆍ당()시대는 한마디로 불교 문명기였습니다. 송대(宋代)에 내려와서 불교에 대한 안티테제로 신유학(新儒學, Neo-confucianism)이 일어났죠. 그런데 송대(宋代)에 이르른 시기의 어휘체계(vocabulary)는 어쩔 수 없이 불교 용어였습니다. 불교의 멘탈리티를 그대로 가지고 있었던 거에요. 이런 측면 때문에 일본의 다산 정약용이라고 할 수 있는, 오규소라이(荻生徂徠)는 주자학을 불교의 아류라고 깠습니다만, 사실 송대 당시의 전체 분위기가 불교적일 수밖에 없었다는 건 오히려 당연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주자는 불교로부터 유교의 정통성을 지키기 위한 호교론(Apologetics)으로서 중용(中庸)을 채택했던 것이죠. 헤겔식으로 보면, 중용(中庸)의 중()은 합(, synthesis)일 텐데 이 중()은 정(, thesis)과 반(, antithesis)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주자가 이미 이단에 대한 분명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중용장구(中庸章句)를 지었다는 뜻이에요. 사실 중용(中庸)을 지었다고 하는 자사도 제자백가 시대에 유교와 경쟁하고 있었던 많은 논적(이단)에 대한 분명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겠지요. 자사 시대에만 하더라도 공자로부터 멀어졌으므로 순수한 유교에서 더 나아가 제자백가의 각 이론에 대한 논변(apologetics)이 생겼는데 그것이 중용(中庸)이란 책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다시 시대가 흘러 송대의 주자는 당시의 지배적 사상이던 노불(老佛)에 대한 아폴로지(apology)로서 중용(中庸)이 가장 유효하다는 시대의식을 갖고서 사서운동(四書運動)을 벌인 겁니다. 그래서 주자는 불교보다 더욱 강력한 도통론(道統論)을 간판으로 내걸었던 것이고 바로 이 점이 주자학의 근본적인 역사적 성격을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蓋自上古聖神, 繼天立極, 而道統之傳有自來矣.
대저 상고로부터 성인(聖人)이 하늘을 이어 인간세의 기준을 세웠는데 그 도통(道統)의 전함이 유래가 있게 되었다.

 

상고(上古)는 하((() 이전의 고대를 일컫는 말로서 한대로부터 잘 쓰던 말이고, 이것 자체가 하나의 독립된 개념입니다. 구체적으로는 · 이전의 복희·신농씨 때를 가리킵니다. 성신(聖神)맹자(孟子)』 「진심(盡心)에 용례를 보이고 있는 말입니다. ‘성인성인보다 한 차원 높은 신인이라는 말로서 이들은 도덕적 완성자가 아니라 고대에서는 천자(天子)를 가리키며 문명의 제작자들입니다. ()이나 신()이나 모두 하일리게(heilige, 경건한 사람)한 맛이 나는데 이는 제정일치시대의 성(()의 구분이 없는 상황을 반영합니다. 맹자(孟子)텍스트에 있어서도 신()은 성()보다도 개념적으로 한 단계 위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계천입극(繼天立極)하늘을 이어 극을 세운다는 말인데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에서 나왔듯이 천()은 대자연의 천리(天理)를 말합니다. 극을 세운다는 것은 남극ㆍ북극과 같이 최고의 기준(ultimate standard)’을 세운다는 뜻입니다.

 

도통지전유자래의(道統之傳有自來矣)’는 말은 아까 말했듯이 주자 시대의 인식 관심이 깊숙이 개입된 거짓말이며 이것은 불교의 제도사적 관점에서나 가능한 말입니다. ‘도통(道統)’이라는 개념은 유교의 정통을 다시 세우려는 송유(宋儒)들이 만들어 놓은 특수한 시대적 개념임을 알아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이 말은 한유(韓愈)원도(原道)라는 책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만약, 나 도올이 서양의학과 싸운다고 할 때 모든 사람들이 이제마를 존경하고 있는 상황이라면(그렇지는 않겠지만) “이제마를 계승한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주장할 가능성이 많지 않겠습니까? 당시 주자도 노불(老佛)에 빠져있는 식자층에다 공자 이후로 내려오는 유학의 정통을 다시 부르짖으려는(to reclaim) 의도에서 그런 식의 도통론을 구상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주자는 그 도통(道統)의 유래를 자기들 유교의 경전 어디에서 찾아냈을까요? 그것은 서경(書經)입니다. 다음을 봅시다.

 

 

 

 

중용장구서 3. 순임금에게 전수한 말

 

 

 

其見於經, 允執厥中, 之所以授.
그것이 경에 보이는데 진실로 그 가운데를 잡으라.”는 것이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전수한 방식이다.

 

여기서 ()’서경(書經)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구체적으로 요가 순에게 전한 말로서 이 구절만 명시되어 있는 것은 논어(論語)』 「요왈(堯曰)편에 윤집기중(允執其中)’으로 나옵니다. 서경(書經)이나 논어(論語)나 어차피 다 후대의 기록으로 보아야 할 것 같아요.

 

윤집궐중(允執厥中)이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전수한 방식이다임금의 옛말은 니사금(尼斯今)이며 닛금이 그 본 발음이다. 그러한 습성이 후대에 그대로 전하여 내려와서 우리가 임금과 결합된 단어를 발음할 때는 글자 그대로 읽지 않는다. 요임금은 욧님금으로, 순임금은 숫님금으로, 우임금은 웃님금으로 발음한다는 것을 젊은 학생들은 알아주었으면 한다.라는 말은 요()가 순()에게 천하를 전수할 때 그냥 거저 준 게 아니라 천하는 반드시 이런 방식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계약 아래에서 주었다는 겁니다. 윤집궐중(允執厥中), “이렇게 다스려야 천하를 다스릴 자격이 있다는 거죠. 이때의 수()는 그 내용이 천하(天下)니까 아주 광대한(grand) 의미예요. 서경(書經, Classic of documents)은 알고 보면 고대 제왕의 계약서(contracts)입니다. 이 윤집궐중(允執厥中)이란 말은 근세 유학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말 중의 하나입니다. , 다음에 유명한 말이 나옵니다.

 

  

 

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舜之所以授禹也.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은미하다. 정미하고 전일케하여 진실로 그 가운데를 잡아라하는 것이 순임금이 우임금에게 전수한 방식이다.

 

인심유위 도심유미 유정유일(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이 말은 외어두는 게 좋습니다. 1장의 막현호미(莫顯乎微)’와 연결되고 있죠? 이 구절을 보면 유()자는 별 의미가 없는 말인데 4()를 만들기 위해 들어갔습니다. 불교경전에는 4구로 된 구절이 많은데 원래 인도경전에 그렇게 되어 있는 게 아니라 불교가 중국에 들어와 한역되면서 4구로 정착된 거예요. 이런 걸 보면 아마도 동양인들 의식에는 4() 전통이 강렬한 것 같아요. 우리나라 판소리 사설이나 가사를 보아도 그렇잖아요? 이 유()자는 포네틱(phonetic, 음성의, 발음에 따른)’하게 분석해 들어가야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데, 이런 건 역시 나의 아내 최영애 교수에게 물어보면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만, 아마도 여기선 아! 하는 감탄의 의미 정도가 되겠죠.

 

인심(人心)ㆍ도심(道心)은 우리나라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에도 잔뜩 나오는 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인심(人心)ㆍ도심(道心)이원론(dualism)인데 송유(宋儒)들은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에 나오는 이 인심도심(人心道心)의 두 개념을 재해석(reinterpretation)하여 도심(道心)은 좋은 것, 인심(人心)은 나쁜 것으로 정식화했습니다. 원시유학에는 없던 것을 송유(宋儒)들이 발명한 거지요. 1장에 나온 말로 연관시킨다면 희노애락지미발(喜怒哀樂之未發)의 상태가 도심(道心)이고 그것이 발()한 것이 인심(人心)이 되는데 그 유래를 서경(書經)에까지 끌고 올라가서 정통성을 확보해 내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이 인심도심(人心道心)이라는 말은 불교적인 냄새가 강하죠? 불교의 색공(色空)으로 보자면 색즉시공(色卽是空)에서 색()인심의 세계(saṃsāra)의 세계고, 은 도심의 세계(nirvaṇa)의 세계입니다. 그러니까 송유(宋儒)들은 불교의 종교적 듀알리즘(dualism)으로 서경을 재해석해 낸 것이지요. 결국 송유(宋儒)들의 주장은 인심이 위태로우니 도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고 도심은 곧 천명지위성의 성()이므로 다시 복성(復性)이라는 문제가 관건이 되지요. 그래서 이고(李皐, ?~844)라는 사람은 이런 관점에서 복성서(復性書)라는 책을 저술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이 중용장구서(中庸章句序)를 통해서 신유학이 틀을 잡아가던 저간의 상황들을 조감해볼 수 있겠지요. 청유(淸儒)들은 송유(宋儒)들을 까기 위해서 이 사구(四句)서경(書經)의 원문이 아니라 후대의 위작이라고 고증하여 그 권위의 근원을 붕괴시켜 버립니다.

 

 

도심(道心) 인심(人心)
喜怒哀樂之未發 旣發
(nirvaṇa) (saṃsāra)
性命之正 形氣之私
天理之公 人慾之私
大體 小體

 

 

()은 미세하고 정밀하다는 뜻이고, 반대말은 거칠 조()인데 모두 쌀 미()자가 들어가죠. ()은 전일하고 순수하다는 뜻이므로 유정유일(惟精惟一)이라는 말은 정밀하고 전일하다는 뜻이 되는데 그러한 마음의 상태 즉 도덕성을 유지함으로써 진실로 그 가운데를 잡아라, 중용(中庸)의 덕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순임금이 우임금에게 천하를 전수한 방식이다라고 해서 하()왕조의 성립 근거를 밝히고 있습니다. , 이런 도통론(道統論)의 확립이라는 면에서 고타마 싯다르타보다 유학의 전통이 오히려 더 앞섰다는 캣치프래이즈를 주자는 들고 나오고 있는 것이죠. 이런 저작의 모티브(Motive, 동기), 사서집주(四書集註)의 출현의 이면에 깔려 있는 이와 같은 내면적 맥락은 사상사를 한다는 사람들도 지금껏 명쾌하게 알지 못했습니다. 여러분들이 한문을 읽을 때는 반드시 이런 객관적 의식을 갖고 읽기 바랍니다.

 

 

 

之一言, 至矣盡矣, 復益之以三言者, 則所以明夫之一言, 必如是而後可庶幾也.
요임금의 한마디는 지극하고 남김없다. 그런데도 순임금은 거기에다 다시 세 마디를 더했다. 요임금의 이 한마디를 밝히는 것이 이와 같이 세 마디를 더 보태고 나서야 비로소 더 원의에 가깝게 되기 때문이다.

 

요지일언(堯之一言)은 곧 윤집궐중(允執厥中)’이라는 한마디인데, 그것이 지의진의(至矣盡矣)했다는 것은 요새 말로 끝내준다는 거죠. 더 이상 말할 게 없다 이거예요. 그런데 순임금은 여기다가 다시 인심(人心)ㆍ도심(道心)ㆍ정일(精一) 이라는 세 마디를 보탰다는 겁니다. 주자로서는 이 3()가 포함된 게 아주 고마운 일이었지요. 도심(道心)ㆍ인심(人心)이 첨가되어 엄청난 아규먼트(Argument, 주장, 논점)의 근거가 된 겁니다. 서기(庶幾)주역(周易) 계사(繫辭)에 나오는 말인데 거의 가깝게 간다는 말입니다.

 

지난 시간에 이제마는 호연지기(浩然之氣)호연지리(浩然之理)를 말했다고 했는데, 이 이론도 도심인심의 구분을 근본적으로 벗어나고 있지는 않습니다. 이제마의 문제의식의 틀(framework)이 독창적이기는 하지만 주자학의 틀을 완전히 벗어나 있지는 않다는 말이예요. 그런데도 이제마를 가리켜 실학이니 뭐니 하는 개념으로 설명하는 요즘의 경향은 참으로 무지막지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경전(經典)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정확히 하는 습관이 학자들에게 부족하다는 느낌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중용장구서 4. 은 구체적이면서도 전체적인 개념

 

 

蓋嘗論之, 心之虛靈知覺, 一而已矣.
본격적으로 그것을 논해 본다면, 마음의 허령한 작용인 지각은 하나일 뿐이다.

 

개상론지(蓋嘗論之)’!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내가 하고 싶은 말(argument)을 시작하겠다는 표현인데, 상시론지(嘗試論之)도 같은 의미로 잘 쓰이는 말입니다. 인심(人心)ㆍ도심(道心)에는 심()이 공통되어 있지요. 이제마는 이와 달리 폐비간신(肺脾肝腎)의 장부(臟腑)구조를 이야기합니다. 그는 심()을 폐비간신과 구별하여 그것을 초월하는 어떤 것으로 설정했거든요. 폐비간신과 심()은 같은 오장(五臟)의 개념에 있는 게 아니고, 이제마에게는 오장육부(五臟六腑)대신 사장사부(四臟四腑)가 있을 뿐입니다. 그는 철저한 사원론자(四元論者)였어요.

 

그런데 장부와 심()의 가장 큰 차이점이 뭘까요? 장부(臟腑)라는 것은 형체가 있는 유형(有形)의 세계인데 반해 심()은 무형(無形)이라는 데 있습니다. 무형의 심()의 세계, 이것을 고대의 서양인들은 프시케(psyche), 누우스(nous)로 이야기했는데 오늘날은 심()을 뉴론(nuron)의 씨냅스(synaps)로 보는 게 일반적입니다. 어쨌든 이 무형의 심()의 세계에 대한 인식은 인류의 가장 큰 고민이었던 것 같습니다. 동서고금(東西古今)의 동일한 문제의식이죠. 무형의 신묘한 작용이 인간존재의 밖에 그 근원(origin)이 있다는 생각이 서양인들, 특히 기독교 전통의 철학적 사유의 바탕이 된 것이고 그에 비해 동양인들은 서경(書經)에 보이는 바와 같이 무형의 심()이라는 게 유형의 세계에서 발현(emerge)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제마도 심()이 사장(四臟)을 초월하는 것이긴 하면서도 그 근본을 따진다면 사장(四臟)에 의해 발현되는 것이라고 봅니다. , 장부(臟腑)구조라는 유형(有形)의 세계에서 무형(無形)의 심()의 세계가 돋아나온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것을 유물론적으로 해석한다면 심()이라는 것은 장부조건에 의해 필연적으로 구조 지워지는 결정론으로 귀결되어 버리겠지요? ()이라는 것이 완전히 장부(臟腑)구조에 종속되는 것으로 판명되어 버리는 게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유물론(唯物論)이 아닌 유기론(唯氣論)적 발상은 그와 다릅니다. 이 점은 따로 상세히 설명되어야 할 것이므로 지금은 이렇게 선언만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주자학의 이기론(理氣論)의 고민도 이와 같은 결정론의 딜레마를 벗어나려는 몸부림입니다. ()이 장부(臟腑)에서 발현되는 것이기는 하나 장부에 의해 결정되어 버린다면 이()는 기()에 종속되기 때문에 이()가 기()를 콘트롤할 수 있는 그 무엇이 될 수 없어집니다. ()가 기()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어서는 안 되겠죠. 여러분, 주자학에 대한 서적을 보면 항상 이 이()의 초월성과 내재성이 혼재하고 있어요. 그것이 바로 주자학 최대의 파라독스(Paradox)입니다.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ㆍ이기론(理氣論) 등이 한없이 복잡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뒤에 나오는 얘기지만, 이 도심(道心)과 인심(人心) 양자는 사방 일촌(一寸)의 공간[方寸之間]에 마구 섞여 있다고 합니다[二者雜於方寸之間]. 여기서 방촌(方寸)이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하트(heart)라는 신체기관(organ)을 지칭합니다. ()이란 글자를 갑골문에서 찾아보면 심장의 2심방 2심실을 나타내는 상형자로서 4획은 4공간을 표시하고 있어요. 주자는 바로 이 심()을 하트라는 오르간으로 명백히 이해했던 겁니다. 주자 당대의 일상적(popular) 세계관에 이런 기본적인 의학적 사실이 깔려 있다는 데 대한 이해는 주자학 전체의 참 뜻을 밝히는데 필수적입니다. 현대 의학에서는 심장을 혈액순환계(blood circulation system)의 펌프로 설명하지요. 그 원동력은 심근의 박동이구요. 그런데 이 심()이란 것은 또한 인간의 정신기능(mental function)을 의미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된 경위는 명백하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 이게 무슨 표시입니까? 큐피드의 화살! 옛 희랍인들은 사랑하는 마음을 전하려 할 때 이런 모양의 하트로 표시했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정서적 싸인(Sign)이 가장 크게 느껴지는 곳이 심장이기 때문이에요. 여러분들 집에 갑자기 도둑이 들었다고 하면 헉! 하고 가슴이 쿵쿵 뛰겠죠? 또는 어떤 뿌듯한 감격의 순간에는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낄 겁니다. 지금의 의학은 이런 현상을 시상하부(hyperthalamus)-뇌하수체(hypophysis)-심장근육(heart muscle)를 콘트롤하는 호르몬이 정서적 감정을 전달, 신경자극과 전달의 과정을 거쳐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이렇게 설명하겠지만 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이런 그림에서 피가 동맥에서 쫙 나가 모세혈관을 돌아 정맥으로 들어오잖아요. 인체 모든 곳에는 다 혈관이 있습니다(물론 예외적으로 손톱이나 막은 빼고). 심지어 뼈속에도 머리카락에도 혈관이 통해 있어요. 우리는 하트를 심()이라고 하지만, 꼭 펌핑하는 심장만을 심()으로 볼 필요가 없습니다. 피가 통하는 곳은 모두 심()이라구요. 정맥, 동맥, 모세혈관 등 모두가 심()인 거예요. 다시 말하면, ()은 혈액순환계(blood circulation system) 전체입니다. 그래서 정서적 변화는 모세혈관으로도 감지되는 것이고 따라서 심()은 손끝에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을 심장이란 좁은 개념으로 묶어둘 필요가 없다고 봐요. (blood)라는 것은 인간 존재의 모든 정신적(mental), 육체적(physical) 에너지를 공급하는 근원적 물질인 것입니다. (brain)도 뭘 먹고 삽니까? 피가 공급하는 양분으로 운영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더 크게 본다면 심()이란 개념 속에 뇌까지도 포함시키지 못할 이유가 없죠. 동양인들의 심()은 이렇게 구체적이면서도 전체적(holistic)인 개념입니다. 그래서 해석의 여지가 무한히 열려 있는 거예요.

 

심지허령지각(心之虛靈知覺)에서 허()란 구체성이 없다, 무형이다, ()의 반대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허()는 그냥 비어 있는 게 아니라 령()한 성질을 가집니다. ()스피리추얼(spiritual)’하다, 영험하다, 신령하다는 뜻인데 그런데 그 령()의 내용이 뭡니까? 여기서 지각(知覺)이란 말이 나오는데 현대어로는 각()을 감각이라고 하고 지()는 이성적으로 안다고 풀지만, 옛날에는 지()가 오히려 현대어의 감각적으로 안다(sensation)는 뜻에 가깝고 각()은 그 지()의 높은 단계에 도달함을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사소한 단어를 잘못 이해하면 저 최한기의 독기학설(讀氣學說)이란 저술은 근본적으로 이해될 길이 없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우리나라 철학계의 원로이셨던 박종홍 선생님도 이점을 잘못 파악하여 최한기를 경험주의자라고 규정한 탓에 지금도 최한기를 제대로 못 보고 있다는 현실을 여러분들은 심각하게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단어 하나 글자 하나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그만큼 중요한 거예요.

 

바로 이 지()와 각()이 인간의 심()의 허령한 작용의 본질입니다. 인간을 호모 사피엔스라고 했을 때 사피엔스가 바로 지각(知覺) , 알고 깨닫는 능력을 지칭하지요. 우리 인간을 영장류(靈長類)라고 하는 이유도 령()적인 측면에서의 장()이다, 가장 뛰어나다는 것 아니겠어요? 그것이 바로 심()의 핵심적 문제는 바로 지각(知覺)에 있다는 겁니다. 오늘날 의학은 심()을 뉴런(neuron), 신경으로 설명하지만, 동양인들은 이 허령지각한 심()을 피(blood)로 설명할 뿐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이지만 한의학적 사전 지식이 필요하고 또 깊게 설명되어야 할 부분이므로 오늘은 이만하고 넘어갑니다. 허령지각이 일이이의(一而已矣)’라는 말은 도심, 인심이 원래 전체로서 하나였고(whole) 둘로 나누어진 게 아니라는 뜻이지요.

 

 

 

 

중용장구서 5. 누구나 가지고 태어난 것

 

 

而以爲有人心道心之異者, 則以其或生於形氣之私, 或原於性命之正, 而所以爲知覺者不同.
그런데 인심과 도심의 다름이 있다고 생각한 것은, 그것이 때로는 형기(形氣)의 사사로움에 의해 생겨나기도 하고 혹은 성명(性命)의 바름에서 비롯되기도 하여 인간이 지각(知覺)하는 바가 서로 각기 다를 수가 있게 되기 때문이다.

 

형기(形氣)는 구체적 형체의 세계를 말하고 형기지사(形氣之私)이기적인 욕망(selfish desire)’을 말합니다. 성명지정(性命之正)은 역시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란 말에서 나왔겠죠? , 인간의 본성(human nature)의 올바름을 뜻해요. 이기론(理氣論)적으로 말하면 형기(形氣)는 기의 세계고 성명(性命)은 리의 세계이겠죠? 지각자부동(知覺者不同)은 후천적·환경적 요소에 따라 인식적 차이·지각의 차별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 사람마다 앎과 깨달음의 형태가 달라진다는 뜻인데, 어떤 사람은 많이 깨닫고, 어떤 사람은 적게 깨닫고, 어떤 사람은 욕심이 많고, 어떤 사람은 욕심이 적고 하는 등 차이가 나타나는 것이 바로 지각(知覺)한 바가 서로 같지 않다는 말의 내용입니다.

 

 

 

是以或危殆而不安, 或微妙而難見耳.
이 때문에 혹은 위태하여 편안하지 않고 혹은 미미하고 아득하여 드러나지 않게 된다.

 

이 구절은 앞에 나온 인심유의(人心惟危)ㆍ도심유미(道心惟微)를 한 번 더 반복한 구절(phrase)입니다.

 

 

然人莫不有是形, 故雖上智不能無人心; 亦莫不有是性, 故雖下愚不能無道心.
그러나 사람이 이 형체가 없을 수 없으므로 제아무리 지혜로운 사람도 인심(人心)이 없을 수 없고, 또한 이 본성이 없을 수 없으므로 제아무리 어리석은 사람도 도심(道心)이 없을 수 없다.

 

()은 몸이라는 형체를 가집니다. 성인이라 하더라도 몸뚱이가 없을 수는 없는 거죠. 사실 심()이라는 것은 생각해보면 참 기분 좋은 겁니다. 인간의 심()은 마음대로 상상하잖아요? 뭐 못하는 게 없어요. 여러분들이 애인을 그리워할 때, 마음으로야 무슨 짓인들 못합니까? 인간의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그것은 우주 끝까지라도 가볼 수 있는 완벽한 자유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심()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몸이라는 구체적 형체 속에 깃들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항상 하는 얘기지만 오늘부터 담배 끊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은 마음대로입니다. “공부 열심히 하겠다”, “서원에 지각하지 않겠다”, “결석하지 않겠다마음대로지요. 그러나 그것은 심()의 결정일 뿐, 실제로 담배가 안 끊어지는 게 상례입니다. 그것이 바로 심()이 안고 있는 파라독스(Paradox)예요. 담배를 피우지 않고 몇 시간만 지나면 그만 얼굴이 파래지고 꽁초라도 찾아보려고 쓰레기통을 막 뒤지지요. 이것이 인간 존재의 파라독스요 잘 처분되지 않는 자기기만입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결국 구체적인 형체의 관성체계로서 심()은 여기에 종속되어 있을 뿐이지요. 인간의 몸이란 마음대로 스톱이 안 되는 관성체계(inertia)입니다. 이 몸의 관성체계를 조선 성리학의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에서는 칠정(七情)이라고 규정했는데 여기서는 인심(人心)이라고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도심(道心)은 인의예지(仁義禮智) , 사단(四端)을 말하는 거예요. 이 도심(道心) , 인의예지(仁義禮智)가 내 몸을 지배하고, 그리고 인간사회를 지배한다면(prevail)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심()은 어디까지나 형기(形氣)라는 구체적 형체의 구속으로부터 결국은 이탈될 수 없습니다.

 

호랑이 같은 동물도 상당히 대단한 신경계를 발달시켰는데 나는 그들의 심()의 상상력의 범위가 어느 정도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호랑이가 정글을 넘어서 우주의 끝을 상상할런지는 잘 모르겠다는 말입니다. 나는 호랑이를 상당히 존경하는 사람이예요. 인간이라 하여 동물들을 우습게 보는 건 매우 우매한 짓입니다. 그들이 인간보다 우월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죠. 하지만 심()의 상상력의 범위를 놓고 말하자면, 호랑이가 인간만큼 거대할지 그것은 잘 모르겠단 말입니다. 개나 호랑이도 꿈을 꾼다는 사실이 실험적으로 밝혀져 있으므로 함부로 속단할 수는 없지만, 동물들의 심은 그렇게 막 무한정하게 가버리는 게 아니라 적정한(modest) 범위 안에 머물러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호랑이 같은 동물의 심()의 상상력은 형기(形氣)의 구조 안에 적정하게 머물러 있는 데 반해 인간만은 유독 형기를 무시하는 무한한 심()의 상상력을 갖고 있다는 거예요.

 

장자(莊子)』 「양생주(養生主)유애(有涯)의 형기(形氣)로 무애(無涯)의 심()을 따라가려는 인간이여, 슬프도다[吾生也有涯 而知也無涯 以有涯隨無涯殆也].”라는 구절이 있는데 바로 이 경우에 부합하는 표현일 겁니다. 내 경우도 그래요. 나는 평생 눈이 좋았는데 이제는 노안(老眼)이 되어 눈이 잘 안 보여요. 내 심()눈이 잘 보이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눈의 망막이라는 구체적인 형기(形氣)가 이미 망가져 버린 게 나의 존재거든요. 그런 한계를 가진 존재가 인간이란 말입니다. 그런데도 난 바보같이 한의학공부를 한다고 학생노릇을 하고 있어요. 쯧쯧쯧.

 

상지(上智)ㆍ하우(下愚)란 말은 논어(論語)』 「양화(陽貨)편에 나옵니다子曰: “唯上智與下愚, 不移. 인간을 상지(上智)와 하우(下愚)로 분류하고는 상지(上智)라 해서 도심(道心)만 있는 게 아니고 하우(下愚)라 해서 인심(人心)만 있을 수 없다고 하는데 형()과 성()의 문제에서도 같은 얘기가 가능합니다. 인간은 이 두 가지를 모두 구유하고 있습니다. 인심(人心)ㆍ도심(道心)은 인간존재의 필연적 양면이지요. 유가(儒家)는 인심(人心)ㆍ도심(道心)이 모든 인간에 구유되어 있다는 점에서 인간 평등론을 인정한 셈이고 이 두 가지의 치우침에 대한 문제로 상지(上智)ㆍ하우(下愚)를 말함으로써 차별론을 제기했지만 다시 이 차별론의 전제 위에서 도심(道心)ㆍ인심(人心)의 밸런스를 이루려고 하는 교육에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이것이 변화기질(變化氣質)이라는 근세유학의 최대 과제였지요.

 

그런데 이제마는 기질(氣質)에 대해 체질(體質)로 기울었지요. 체질(體質)이란 말 자체는 이제마가 쓴 것이 아닙니다. 체질이란 말은 후대에 지어진 말이고 이제마는 태소음양(太少陰陽)을 말했을 뿐입니다. 어쨌든 이제마의 이론은 장기의 품부(稟賦)에 선천적 차별이 있다고 하여, 형기(形氣) 그 자체에 4가지 유형을 설정한 것이 특징입니다. ()은 동일하다. 그런데 형기(形氣)는 사람마다 다른 4가지 유형이 있고 그것은 변화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이제마가 인간을 이해하는 입장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마에 있어서 복성(復性)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것은 자기의 형기(形氣) 장기구조의 유형에 따라 어느 정도 전적인 차이가 생기겠지요. 이런 점에서 이제마의 사상은 근세 유학과 상당히 다른 독특한 구조를 가집니다.

 

 

 

 

중용장구서 6. 도심으로 인심을 통제하라

 

 

 

二者雜於方寸之間而不知所以治之, 則危者愈危, 微者愈微, 而天理之公, 卒無以勝夫人欲之私矣.
이 두 가지는 방촌지간에 마구 섞여 있어서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를 모른다면, 위태로운 것은 더욱 위태로와지고 미미한 것은 더욱 미미해 져서, 그 결과 하늘의 보편적인 질서가 사람의 사사로운 욕심을 이길 방도가 없어지게 된다.

 

천리지공(天理之公)은 주자의 최대 관심사인데 그것은 보편적 도덕 가치(ultimate moral principle)를 말합니다. 만약 천리지공(天理之公)이 인욕지사(人欲之私)를 이기지 못하고 거기에 매몰되어 버린다면 그 결과는 비도덕과 무질서의 카오스일 뿐입니다. 위 문장을 통해 우리는, 주자가 당대의 사회문제의 원인이 인욕지사(人欲之私)가 천리지공(天理之公)을 억누르고 있는데 있다고 규정하고 들어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자학의 근본 목적이자 핵심적인 가치인 천리를 보존하고 인욕을 제거한다[存天理去人欲].’이라는 게 노불(老佛)을 밀어내고 그 시대에 널리 펼쳐지도록(prevail) 하는 것이 주자의 궁극적 관심이었습니다.

 

기실 가만히 살펴보면, 인간사의 모든 문제가 천리지공ㆍ인욕지사의 두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것 같아요. 청소년 문제고 성수대교 붕괴 문제고 하여튼 신문지상에 나오는 모든 문제가 바로 이 천리지공(天理之公)을 어떻게 확립할 것인가 하는 관심과 의식이 결여된 나머지 발생되는 문제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는 이런 기초적인 문제를 간과하고 인간사를 너무 팬시(fancy, 화려한)하게 보는 경향이 있어요. 너무 현란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컴퓨터하는 사람을 만나보면 무슨 스타워즈식 공상과학의 세계가 금방 다가올 것처럼 얘기하지요.

 

엊그제는 또 실내 장식을 하는 사람을 만나 얘기를 나누었는데, 도무지 요즘의 경향은 너무도 명백한 인간의 생물학적 조건(biological condition of man)을 무시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요. 실내장식이 아무리 기가 막히게 현란하고, 무슨 레이저가 지랄발광을 한다 해도 거기에 온갖 신나고 편리한 건 다 해놓았다고 해도 사람이 그 속에서 하루만 살아도 뒈진다고 하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문명은 인위의 장난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어떤 경우에도 그 문명의 주체인 인간은 최후의 자연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의 몸의 구조란 게 최소한 일만 년은 지나야 변하는데, 그 변화란 것도 극히 미미합니다. 최근 일만 년의 변화라고 해봤자 겨우 사랑니가 퇴화되는 정도예요. 만년 동안의 시간에 걸쳐서 구강의 저작의 형태가 바뀌고 돌연변이가 생기면 그에 따라 DNA가 바뀌는 것이죠. 하물며 몇 십 년 사이에, 아니 몇 만 년이 흐른다고 해도 레이저에 마구 쏘여서도 안 죽을 수 있는 정도의 진화는 인간에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여러분은 서원에 이렇게 앉아서 공부하는 걸 고리타분하게 여길지 모르지만, 이 게임의 승부는 명백해요. 하늘이 명()하는 걸 성()이라고 할 때, 천리지공(天理之公)을 떠나 인욕지사(人欲之私)를 마음대로 추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현대문명이란 걸 보고 있으면 인욕지사(人欲之私)가 천리지공(天理之公)을 무시하고 치닫는 경향이 강하지요. 편리함만 좇아가요. 그런데 그 편함이 인간의 본성을 망가뜨린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같이 뒈지는 길 밖에 없어요! 첨단 과학이고 뭐고 말짱 헛일입니다. 인간은 결국 소박하게 살 수밖에 없는데 지금의 문명은 자꾸만 잡스럽게 치닫고 있습니다.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르고 마구 까불어 대기만 하는 거죠.

 

여러분, 과학문명의 선진국일수록 자연을 존중합니다. 예를 들어 미국의 그 무한한 자연을 보세요. 그들의 삶이 첨단을 걸을 것이라는 예상은 환상일 뿐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일상적 삶의 모습을 가장 원시적으로 소박하게 해놓고 살고 있어요그러나 그들의 도시 삶은 잡스럽기 그지없다. 에너지 소비양식 하나만 보더라도 그 극한적 잡스러움이 쉽게 직감된다. 이런 것을 우리에게도 심각한 반성을 촉구하는 한심한 작태로 보느냐, 아니면 선망의 대상으로 부러워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문명은 파국의 경계선상에서 그 방향을 달리할 것이다. 1993년 현재, 전 세계 석유 소비량의 25.2%(이 비율은 한국, 일본, 중국, 대만,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ㆍ대양주 국가들의 총 소비 비율 24.4%를 넘는 것이다)를 미국이라는 거대한 공룡 단 한 마리가 먹어치우고 있다는 사실은 그들이 얼마나 문명을 잡스럽게 운영하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말해 준다. 만약 현대문명의 취약한 점이 문제가 된다면 대한민국 같은 나라가 가장 먼저 망할 수 있다는 섬뜩한 느낌을 제발 가져야 합니다. 이런 것들은 여러분들이 앞으로 세상을 넓게 보는 때가 오면 자연히 알게 될 거예요.

 

 

 

, 則察夫二者之間而不雜也; , 則守其本心之正而不離也.
정미(精微)로운 감각이 있으면 도심(道心)ㆍ인심(人心) 둘 사이를 잘 살펴 이들이 섞이지 않게 되고, 하나로 전일하게 되면 본디 마음의 올바름을 지켜 그 하나됨이 떠나지 않게 된다.

 

불리부잡(不離不雜)은 근세 유학에서 많이 나오는데 그 자체가 하나의 개념입니다.

 

 

從事於斯, 無少間斷, 必使道心常爲一身之主, 而人心每聽命焉,
이 일에 마음으로 종사(to engage)하는 것이 잠시도 끊임이 없고 반드시 도심(道心)으로 하여금 늘 몸뚱아리의 주인이 되게 하고 인심(人心)이 매 순간 도심(道心)의 명령을 듣게 하라.

 

역시 도심(道心)이 인심(人心)을 부려야 건강하게 되죠. 밥 먹을 때도 그래요.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있어도 도심(道心)은 적정량을 알기 때문에 이제 그만 먹으라고 명령하지만, 인심이란 놈은 에이 좀 더 먹어두는 게 좋지 뭐, 먹는 게 다 살이 되는 건데하고 위안하면서 계속 먹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돼? 설사지 뭐야! 밑으로 그냥 좌악 빠지는 거야! 그러면 그때 가서야 인심(人心)을 반성을 하게 됩니다. “그 정도에서 그만 먹었어야하는 건데하는 거죠. 이게 인간존재의 아이러니컬한 문제요 사람 환장하게 만드는 까다로운 문제입니다.

 

주자는 불교에서 따온 이원적 인식론을 갖고 있다고 까는 사람도 있지만, 잘 이해하고 보면 주자가 그렇게 엉성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죠? 동양학하는 사람들 중에 리버럴(liberal)하다는 사람에게는 주자가 아주 나쁜 놈으로 인식되어 있는데 그것은 성실한 노력에 따른 정확한 판단이 아닙니다. 주자의 원의(原義)를 원래 맥락에서 파악할 줄 알아야 해요.

 

 

 

則危者安, 微者著, 而動靜云爲, 自無過不及之差矣.
그러면 위태로운 자는 편안하게 되고 은미한 것은 드러나게 되어 움직이고, 멈추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저절로 지나치고 모자람의 차이가 없어지게 될 것이다.

 

항상 하는 얘기지만 여러분들이 사용하는 책상의 다리 끝부분에 덧댄 나무가 각이 져 있기 때문에 함부로 다루면 장판이 찢길 수도 있으니 조심해 주세요. 저기 창문에 달린 차양막도 기울어지지 않게 수평으로 만든 뒤에 반듯이 올리고 내려야지, 휘어진 상태에서 하면 기능이 제대로 나오지 않습니다. 어떤 물건을 다루더라도 그 기능과 성질을 확실히 알고 난 다음에 다뤄야지, 그렇지 않으면 물건의 본래 모습을 상하게 하기가 쉬워요. 잘 모르면 아예 손을 대지 않는 것이 현명합니다.

 

그리고 학생들이 벌써 늦게 오는 사람들이 많은데, 9시에 시작한다면 적어도 850분엔 다 나와 있어야지! 이렇게 무슨 학원 다니듯이 마음대로면 강의 진행이 어렵습니다. 서원에 다니는 자세를 다시 가다듬어야 해요. 배움에 뜻을 두고 한 달간의 시간을 할애했다면 서원에서 제시하는 규율을 지켜야 합니다. 나는 6년간 이 나이에 아침 9시에서 저녁 6시까지 한의학 강의를 듣고 있습니다. 그것은 처절한 고행이예요. 많은 사람들이 내가 한의대에 적()만 올려놓고 딴 짓 하는 걸로 오해하는데, 점심시간 1시간 빼고는 하루 8시간을 꼬박 강의실에 앉아 있어야 돼요. 그리고 한의학 강의가 그렇게 재미있질 않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루 8시간을 공부한다는 게 보통 고문이겠습니까? 고문도 그런 고문이 없죠. 원광대 한의대 학생들에게 물어보면 알겠지만, 그런데도 나는 수업 빠지는 날이 없습니다. 가장 출석률이 높은 사람이예요.

 

거기 비하면 여러분 나이에 9시에서 1시까지 이렇게 앉아서 공부하는 건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이 정도가 어려워서 결석하고 시간을 못 맞춰 지각이나 한다면 말이 됩니까? 사람이 한번 입지(立志)를 했으면 끝까지 지속하는 끈기가 있어야지. 젊은 시절에 그러한 몸의 훈련(discipline)을 익혀야 합니다. 그것이 앞으로의 삶에 훌륭한 자산이 되요. 어떤 모임이든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지속적으로 참가하는 것 자체가 인생에서 승리하는 것입니다. 그것 이상의 방책은 없어요. 그런데 한번 빠져 버릇하면 자꾸만 변명(excuse)꺼리가 생깁니다. 사람 사는데 무슨 일이 없을 수가 있나요? 그렇게 변명이 늘기 시작하면 결국에는 모든 일에 변명만 다는 인간이 되어 버립니다. 등록금을 10만원이나 내고 다니는 서원, 어차피 그게 자기 돈도 아닐 텐데, 시간을 정확히 지키세요! 일찍 일어나서 공부하는 습관도 들이고. 그런 걸 지키지 못한다면 중용(中庸)을 배운다고 무슨 뜻이 있겠습니까? , 시작하겠습니다.

 

 

 

 

중용장구서 7. 유교 도통론(소공까지)

 

 

堯舜禹天下之大聖也, 而天下相傳, 天下之大事也.
요와 순과 우는 천하의 큰 성인이다. 천하를 서로 전수하는 것은 천하의 가장 큰 일이다.

 

()’천하(天下)로써라는 원래 위드(with)’의 뜻을 나타내지만 여기서는 목적격으로 해석해서 천하를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겠지요. 상전(相傳)의 내용이 곧 천하(天下)입니다. 기실 천하를 물려주는 것 이상 큰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以天下之大聖, 行天下之大事, 而其授受之際, 丁寧告戒, 不過如此, 則天下之理, 豈有以加於此哉!
천하의 큰 성인으로서 천하의 가장 큰 일을 행하는데 그 주고받을 때 간곡히 훈계하는 것이 불과 이 네 마디에 지나지 않으니 천하의 이치가 여기에 더 보탤 게 뭐가 있겠는가?

 

여기서의 ()’으로써(as)’로 정확히 번역됩니다. ‘As the great Sage-King under Heaven’

정녕(丁寧)’진정으로(earnestly)’, 지금 우리가 쓰는 말과 같습니다.

 

 

 

自是以來, 聖聖相承, 若成湯武之爲君, 皐陶召之爲臣, 旣皆以此而接夫道統之傳.
이때 이후로 성인들이 서로 이어 내려와 성왕ㆍ탕왕ㆍ문왕ㆍ무왕 같은 이는 임금이 됨과 고요ㆍ이윤ㆍ부열ㆍ주공ㆍ소공 같은 이는 신하가 됨이 이미 모두 이 네 마디로써 도통(道統)의 전함에 접하였다.

 

고요(皐陶)는 순()임금의 명신(名臣)고요는 순임금의 현신(賢臣)으로 우()와 협력하여 순임금의 치적을 쌓아올렸다, 이윤(伊尹)은 탕()의 명신이윤(伊尹)은 탕왕의 현신으로서 탕왕의 통일작업을 도왔고, 또 탕왕이 죽자, 그의 손자인 태갑(太甲)을 대신하여 섭정을 하였지만, 태갑을 잘 교육하고 덕을 쌓게 하여 왕위를 회복시켰다, 부열(傅說)은 은() 고종(高宗)의 명신부열은 은나라의 무정(武丁)을 도와 은나라 중흥의 업을 달성한 현신이다, 주공(周公)ㆍ소공(召公)은 무왕(武王)의 명신소공석(召公奭)은 주공과 협력하여 주나라의 왕업을 쌓은 인물이다. -중용한글역주, 169.

 

이 도통론은 송유(宋儒)들의 발명이라고 조금 전에 얘기했습니다. ((((((주공(周公)에서 공자(孔子)로 다시 자사(子思맹자(孟子주렴계(周濂溪장횡거(張橫渠이정(二程주자(朱子)로 이어지는 도통지전(道統之傳)은 이정(二程), 특히 정이천(程伊川)에 의해 확립된 것을 주자(朱子)가 완전히 받아들인 것이지요.

 

 

 

 

중용장구서 8. 유교 도통론(자사까지)

 

 

若吾夫子, 則雖不得其位, 而所以繼往聖開來學, 其功, 反有賢於堯舜者.
우리 공부자(孔夫子) 선생님 같은 분은 군왕의 위()를 얻지는 못했으나 지나간 성인을 잇고 앞날의 배움을 열었던 바 그 공이 오히려 요()ㆍ순()보다 더 현명한 데가 있었다.

 

오부자(吾夫子)는 공자를 아주 친근하게 부르는 표현입니다. 오사(吾師)라고도 하죠. 이런 말들은 문인(門人)들 사이에만 쓰입니다. ()는 주어로 쓰일 때도 있지만 주로 소유격(my)으로 쓰입니다. 여기서는 나의 선생님(my teacher)’란 말이죠.

 

기위(其位)는 군왕의 지위를 말하죠. ‘계왕성 개래학(繼往聖 開來學)’ 장횡거가 서명(西銘)에서 쓴 말입니다. 여기서 나온 계왕(繼往), 개래(開來)획기적인(epoch-maker)’을 지칭하는 관용구로서 유명한 말입니다.

 

유현어요순(有賢於堯舜)’은 아무에게나 함부로 할 수 없는 말인데 사실 주자는 이 말을 맹자(孟子)』 「공손추(公孫丑)에서 인용했을 뿐입니다. ·순보다 현명하다는 말은 공자를 엄청나게 높인 거죠. 송유(宋儒)들의 도통론(道統論)에서는 공자가 맨꼭대기(peak)로 올라갑니다. 공자 이전에는 모두가 군왕의 지위를 가진 성인인데, 공자부터는 성인의 덕을 가진 사람이 기위(其位)를 얻지 못한 역사가 시작된 거죠. 따지고 보면, 그 이후 유학자들이 공자를 이렇게 치켜세운 데는 비록 왕이 기위(其位)를 가지고 있다고 하나 성인으로서 덕이 부족하기 때문에 유학의 정통[聖人之學]은 성인의 덕을 쌓은 우리에게 있다는 걸 역사적으로 확인하고 자기들의 위치를 보장받으려는 심리가 작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의 소라이(荻生徂徠, 1666~1728)는 공자를 준성인으로서 인정하지만 그렇게 높이지 않습니다. 완벽한 작자(作者)’의 자격이 부족하다는 것이죠. 그런 사정은 일본의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가 쓴 일본 정치사상사 연구에 잘 나와 있어요. 이 책은 통나무에서 곧 번역되어 출판될 예정이니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20세기 일본에서 가장 위대한 책을 하나 꼽으라면 바로 이 책일 겁니다. 또한 이 하나밖에 없는 위대함이 일본의 비극이기도 하지요.

 

최근 일본 동경대에서 아시아를 생각한다라고 7권의 책을 시리즈로 펴냈는데 마지막 권 세계상의 형성에 내가 일본어로 쓴 논문 조선 주자학과 근대가 들어 있어요. 뭐 대단한 글은 아니나 마루야마 마사오 식()이 아닌 새로운 시각으로 동아시아 문명을 봐야 한다는 내용으로 썼습니다. 일본 지식사회에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는 모르나, 일면 통쾌한 글입니다. 일본의 지식세계의 본령이랄 수 있는 동경대에서 그들의 정통 학문을 정면으로 깨버리려는 글이니까요. 오늘 아침 50권을 주문했는데 좀 비싸지만 서원학생들도 구입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然當是時, 見而知之者, 氏之傳得其宗. 氏之再傳, 而復得夫子之孫子思, 則去聖, 遠而異端起矣.
그러나 공자의 당대에 공자가 요ㆍ순보다 뛰어남을 직접 보고 깨달은 자 중에서 오직 안회와 증삼의 전()이 그 정통적 종지를 제대로 얻었다. 증자가 이 전을 다시 전하는데 이르러서는 비록 공자의 손자인 자사를 다시 얻었지만 자사시대에 이미 성인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고 이단의 이론이 일어났다.

 

여기서 보면 중용(中庸)이라는 책이 순수한 유교의 틀이 아니라 당시의 이단에 대한 아폴로지(apology, 변명)적 성격에서 쓰여졌다는 나의 앞의 설명이 근거 있는 얘기란 걸 알 수 있죠. ‘견이지지(見而知之)’라는 표현은 맹자(孟子) 진심(盡心)에 나오는 표현을 따온 겁니다.

 

 

 

중용장구서 9. 도통의 어려움

 

 

子思懼夫愈久, 而愈失其眞也. 於是推本堯舜以來相傳之意, 質以平日所聞父師之言, 更互演繹, 作爲此書, 以詔後之學者.
자사가 시간이 오래 지나면 지날수록 그 진실이 자꾸만 유실되어감을 염려하였다. 이에 요순 이래로 전해 내려오는 뜻을 근본까지 파고 들어가고 평소 듣던 아버지와 스승의 말씀으로 캐 들어가서 다시 실을 꼬아내듯이 이 책을 만들어 후학을 가르쳤다.

 

()~ ()~’~ (the more ~ the more)’로 번역됩니다.

()은 자질이나 재료(stuff)란 뜻도 있지만 질문한다에서와 같이 무엇을 캐묻는다로 풀이되죠.

부사(父師)의 부()는 자사의 아버지이니까 공자의 아들 리(). ‘()’자니까 요즘 식으로는 이름이 공잉어가 되겠죠? ‘()’자가 옛날 발음에는 어인데 리자가 붙으면 ng발음이 자 받침에 붙어 리어링어잉어가 된 거죠. ‘붕어도 마찬가지예요. 부어(鮒魚)에서 왔어요. 연역(演繹)은 현대어로 추론(deduction)’인데 원래는 실을 꼬아내듯 뽑아낸다는 말이죠.

 

 

 

蓋其憂之也深, 故其言之也切; 其慮之也遠, 故其說之也詳.
그 우려함이 깊은 고로 그 말함이 간절하고, 그 염려함이 원대한 고로 그 풀어냄이 상세하다.

 

이 문장은 재미있는 구절입니다. 기우심고기언절(其憂甚故其言切) 이렇게 써도 될 텐데 ‘~之也’ ‘~之也하고 의식의 연속성을 차단하는 어기사(語氣辭)를 삽입했지요. 이것은 사실을 객관화하고 다시 반추하는 기능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야()자가 나온다고 무조건 끊어 읽으면 문맥이 제대로 잡히지 않는다는 걸 이 문장에서 알 수 있어요. 한문 문장은 전체를 보고 난 뒤 글자 수에 맞춰 끊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其曰天命率性,” 則道心之謂也; 其曰擇善固執,” 則精一之謂也; 其曰君子時中,” 則執中之謂也. 世之相後千有餘年, 而其言之不異, 如合符節.
(天命率性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1은 도심(道心)을 말함이요. 선을 택하여 굳게 지킨다誠之者, 擇善而固執之者也, 20함은 정일(精一)을 말함이요, 군자는 때로 맞게 한다君子之中庸也, 君子而時中, 2함은 집중을 말함이다. 요ㆍ순 시대와 자사의 시대의 시간적 차이가 천년이 넘는데도 그 말이 서로 다르지 않아서 부절(符節)이 서도 합치되는 듯하다.

 

이 구절은 앞에서 요()가 순()에게 천하를 선양하고 다시 순()이 우()에게 천하를 물려줄 때 했던 서경(書經)의 말이 중용(中庸)에서 다시 그대로 반복되고 있음을 밝히며 서로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그 만큼 중용(中庸)이란 책이 성인의 가르침의 정통을 잇고 있다는 거죠. 요ㆍ순ㆍ우에서 탕임금까지 5백여 년, 탕왕에서 문왕까지 5백여 년, 다시 문왕에서 공자까지 5백여 년이라고 자사의 손() 제자뻘인 맹자(孟子)가 말했으니(맹자(孟子) 진심(盡心)), 이로 미루어 보면 세지상후(世之相後)1500여년이 되겠죠.

 

요순과 자사 사이의 여합부절(如合符節)’을 말한 논리의 패턴은 맹자(孟子)이루(離數)첫머리에 순선성(舜先聖)과 문왕후성(文王後聖)의 관계를 언급한 문장에서 따온 것이라 생각되요. 여합부절(如合符節)은 동명성왕 신화에 유리태자가 가져오는 쪼가리가 딱 들어맞듯이 상호간의 징표가 딱 들어맞는 것을 말해요.

 

 

 

 

중용장구서 10. 우여곡절 끝에 남겨지다

 

 

歷選前聖之書, 所以提挈綱維, 開示蘊奧, 未有若是其明且盡者也.
옛 성인의 책을 역대로 가려 뽑아서 그 강유(綱維)를 파악하고 온오(蘊奧)를 열어 보인 방법이 아직 이처럼 명백하고 상세한 책은 없었다.

 

강유(綱維)핵심적인 기본구조’, 제계(提契)끌어낸다(present)’, 온오(蘊奧)이면에 담긴 깊은 뜻을 말합니다.

 

 

自是而又再傳, 以得. 爲能推明是書, 以承先聖之統. 及其沒而遂失其傳焉. 則吾道之所寄, 不越乎言語文字之間. 而異端之說, 日新月盛, 以至於老佛之徒出, 則彌近理而大亂眞矣.
이로부터 다시 전하매 맹자(孟子)라는 걸출한 인물을 얻었다. 그는 이 책을 한층 더 명백히 밝혀 선성(先聖)의 도통(道統)을 이을 수 있었는데 그가 죽고 나자 전할 데를 잃어버려서 우리 유학(儒學)의 도()가 의지하는 바가 언어문자 사이를 넘지 못하게 되었고 이단의 설이 날로 새로이 번창하게 되었다. 그 결과 노불(老佛)의 무리가 나오는 데까지 이르게 되니 그 이치가 더욱 유사하여 진실을 크게 어지럽히게 되었다.

 

오도(吾道)는 유교의 정통을 말함이고, ()‘to depend’, ‘to rely’의 의미입니다. 언어문자지간(言語文字之間)을 뛰어넘어야 그 진리가 올바로 이해되는 것인데 박약한 문자 이해에만 머물러 왔다는 뜻이지요. ()더욱이란 뜻인데, 이 글자를 따서 우리 막내딸 이름을 미루라고 지었습니다. 원래는 고구려인의 이름을 따서 한글로 된 거지만, 한자로는 미루(彌陋)라고 했어요. ‘더욱 더욱 누추하고 못생긴 사람이 되라는 뜻이죠.

 

 

然而尙幸此書之不泯, 夫子兄弟者出, 得有所考, 以續夫千載不傳之緖, 得有所據, 以斥夫二家似是之非. 子思之功, 於是爲大, 而微程夫子, 則亦莫能因其語而得其心也.
그런데 다행하게도 이 중용(中庸)이라는 책이 없어지지 않았으므로 (禮記에 보존) 정명도, 정이천 선생 형제분이 나시매 그 상고할 바를 얻어 천여 년 동안 전해지지 않던 그 단서를 이었고, 그 근거할 바를 얻어 노불(老佛)의 사이비 이론을 배척하게 되었다. 대저 자사의 공이 이로 인하여 크게 되었지만 또 정씨 형제 두 분이 아니었다면, 사람들이 중용(中庸)의 언어에 기인하여 전하고자 하는 그 마음을 얻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미()는 부정사로서 없이(without)’입니다. ‘~아니었더라면의 뜻. ()에는 반드시 마음[]이 있습니다. 해석학(hermeneutics)이 대상으로 하는 것은 어()가 아니라 심()입니다.

 

 

 

惜乎! 其所以爲說者不傳. 而凡氏之所輯錄, 僅出於其門人之所記. 是以大義雖明, 而微言未析. 至其門人所自爲說, 則雖頗詳盡而多所發明, 然倍其師說而淫於老佛者, 亦有之矣.
그러나 안타깝게도 정자께서 중용(中庸)에 대해 책으로 남긴 말이 전해지지 않고 석()씨의 집록한 바가 정자의 제자의 기록에서 근근이 나왔는데 이것으로 큰 뜻은 비록 밝혀졌다고는 하나 세부적인 말이 석연치 않고 제자들이 자기들 스스로 지어낸 말에 이르러서는 비록 꽤 상세하고 창조적인 견해도 많으나 그 스승의 말과 어긋나고 노불(老佛)의 이론에 빠져있는 상황도 또한 간과될 수 없다.

 

석씨(石氏)는 석대(石憝)란 사람으로 주자의 제자였고 중용집해(中庸集解)이권(二券)을 썼습니다. 집록(輯錄)은 파편(fragment)을 모아 놓았다는 뜻이고 대의(大義)개요(outline)’, 미언(微言)세부사항(detail)’, ()는 배반하다는 뜻이지만 어긋나거나, 일치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은 섹스와 관계되는 말로 많이 쓰이는데, ‘빠진다’, ‘더럽혀진다는 뜻이죠. 사실 빠진다는 말에도 성기와 성교가 연상될 정도로 성적인 함의가 내포된 것 같습니다. , 주자가 이제 자기 이야기를 하기 시작합니다.

 

 

 

 

중용장구서 11. 황연대오의 순간

 

 

自蚤歲, 卽嘗受讀而竊疑之. 沈潛反復, 蓋亦有年. 一旦恍然, 似有得其要領者.
나 희는 어릴 적부터 그 책을 받아 읽으면서 차분히 홀로 다소곳이 그 내용을 생각하곤 했다. 침잠하고 반복하기를 여러 해 계속했다. 어느 날 새벽이었다. 홀연히 아! 하고 그 요령을 터득함이 있는 듯하였다.

 

조세(蚤歲)소시(少時)’, ()는 조()와 통하는 글자입니다. ()가만히 몰래()는 꼭 의심한다라기보다 영어의 ‘doubt’처럼 ‘~라고 생각한다는 뜻이고 유년(有年)은 나이를 먹고 연륜이 쌓이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일단황연(一旦恍然)은 중국 사람들이 잘 쓰는 황연대오(恍然大悟, 후앙르안따우)대학(大學)에선 하루아침에 천지만물의 이치를 꿰뚫게 된다[一旦豁然貫通]’고 표현함. 그런데 이게 아주 멋있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학문을 하는 건 한마디로 이 황연대오(恍然大悟)’의 순간을 맛보기 위함입니다. 인생의 성장이라는 건 [그림 1]과 같이 직선적으로 되는 건 없습니다. [그림 2]처럼 지리한 일상의 끝에 확! 깨닫는 순간, 반드시 그런 도약(jumping)의 순간들(I, II)이 있어요. 학문을 한다는 건 오늘 일격물(一格物)하고 내일 일격물(一格物)하는 지루한 과정(routine)인데 이것을 어느 순간까지는 정확하게 밟아 나가야 합니다.[그림 3] 그런데 A라는 어떤 순간이 왔을 때 어느 날 새벽(옛날 사람들은 머리가 맑은 새벽에 책을 많이 읽었으니까) “! 이게 나의 격물의 구조였구나하고 가닥이 잡히면서 나머지 B의 광대한 영역까지도 포괄하여 깨달아 버리는 황연대오(恍然大悟)가 생기는 거죠. 물론 루틴(routine)’의 길이가 길수록, 학문적 고민의 정도가 강렬할수록 점핑의 높이와 포괄하는 영역이 큽니다. 여러분, 인생을 살다보면 이런 황연대오(恍然大悟)의 순간이 큰 것, 작은 것 할 것 없이 계속 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큰 것이 한 사람의 일생의 방향을 결정하는 거예요.

 

여러분은 대부분 이제 20대인데, ! 20대는 정말 너무도 멋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스스로 알 것 다 안다고 생각하겠지만, 20대는 세상이 완전히 ‘ambiguous!’ 모호해! 뽀얗습니다. ‘동몽(童蒙)’이라는 말이 표현해 주듯 모든 게 어둡고 모호합니다. 그러니까 거기서 바로 돌진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거지요. 무지하지만 박력이 있고 에너제틱하고 아! 20대는 너무도 찬란한 인생의 꽃입니다. 여러분은 20대에 황연대오(恍然大悟)의 점핑의 전기를 많이 가질 수 있습니다. 단지 첫 점핑이 올 때까지가 막연하고 지루한 과정이지요. 20대가 참 부러워요. 내가 외형적으로는 20대로 보일 수도 있지만 속은 완전히 다르거든요. 주자의 이 황연대오(恍然大悟)란 말은 아주 리얼한 말이지요. 여러분은 20대에 황연대오(恍然大悟)의 점핑의 전기를 많이 가질 수 있습니다. Please jump! 20대의 점프는 참으로 아름다운 거에요.

 

나는 18, 9세때 관절염을 앓으면서 처음 황연대오(恍然大悟)를 겪어보았는데 그 이후 지금까지 한 네 번쯤 맛보았을 겁니다. 가장 최근의 경우가 바로 이제마와의 만남이었다고 봐요. 이 점핑의 횟수는 분명히 숫자로 나옵니다. 삶의 모든 방식과 관점이 완전히 새로와지는 경험을 인생에서 세 번쯤 해본다면 아마 괜찮은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일정 수준 이상의 삶은 되는 거죠.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 번도 못해보고 그냥 살다 가요. 그렇지만 여러분은 황연대오(恍然大悟)를 겪어볼 가능성이 주자보다, 나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20세기는 주자시대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또 앞으로 여러분 세대는 더더욱 복잡 다단해질테니 깨달을 게 더 많아지지 않겠어요? 황연대오(恍然大悟)! 이건 정말 대단한 것입니다. 그 순간의 희열, 환희! 그게 몇 달은 지속됩니다. 그러다가 다시 또 다른 루틴(routine)’으로 진입하지요. 그러나 그 루틴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겁니다.

 

이 구절은, 주자도 어릴 때부터 중용(中庸)을 읽었는데, 그 내용을 확실히 잘 몰랐단 말이죠? 모호했단 말이에요. 그래도 계속 읽다 보니 어느 날 새벽 무릎을 탁 치며 아! 하고 깨달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요령을 얻었대요. 요령은 요즘은 깐죽댄다는 말로 쓰이는데, 여기서는 그게 아니라 대요강령(大要綱領), 즉 인생의 진리의 핵심을 말합니다.

 

 

 

 

 

중용장구서 12. 책의 체제

 

 

然後乃敢會衆說而折其衷, 旣爲定著章句一篇, 以俟後之君子. 而一二同志, 復取氏書, 刪其繁亂, 名以輯略.
그런 뒤에야 마침내 감히 여러 사람들의 설을 회통하고 절충하여 우선 중용장구(中庸章句)일편을 정본으로 정착시켰으니 뒷날의 군자들의 질정을 기다린다. 그리고 몇몇 제자들이 석씨의 책, 중용집해(中庸集解)를 다시 취하여 그 번쇄하고 난잡한 것을 삭제하고 중용집략(中庸輯略)이라 이름붙여 책을 만들어 주었다.

 

나 도올이 중용(中庸)을 다시 장구화한다면 아마도 신경ㆍ조직학 등 현대의학의 모든 지식을 동원해서 쓰게 될 겁니다. 나에게도 주자처럼 중용(中庸)에 관한 황연대오(恍然大悟)가 있단 말이죠. 그런 줄기가 서야 모든 이론을 통합하고 절충하는 깡이 생기는 겁니다. ‘()’이란 말은 그런 뉘앙스가 들어 있어요.

 

뒷날의 군자를 기다린다[俟後之君子]”는 말은 많은 분들의 질정을 기다린다는 식으로 요즘 책의 저자 서문에 많이 쓰는 말이죠. 요즘은 공산당에서나 쓰는 말처럼 되어 버렸지만 동지(同志)는 문인(門人) , 제자들을 높여 부르는 말입니다.

 

 

 

且記所嘗論辨取舍之意, 別爲或問, 以附其後. 然後此書之旨, 支分節解, 脈絡貫通, 詳略相因, 巨細畢擧. 而凡諸說之同異得失, 亦得以曲暢旁通, 而各極其趣.
또한 내가 일찌기 기존의 설을 논변 비평하고 취사선택한 뜻을 기록하여 별도로 중용혹문(中庸惑問)을 만들고 집략(輯略)뒤에다 첨부하여 주었다. 그러고 나나니까 중용(中庸)의 뜻이 마디마디가 분해되고 맥락이 관통하여 상세한 부분과 개략적인 부분이 서로 말미암고 대의와 미세한 뜻이 모두 드러나게 되었다. 또한 모든 이론의 같고 다름, 제대로 전해지고 못 전해짐이 자세히 밝혀지고 사방으로 통하여 각기 그 지향하는 뜻이 명백해졌다.

 

혹문(或問)은 사서(四書) 모두에 관하여 다 있습니다. 이것은 주자의 저서가 아니라 제자들이 질문한데 대한 주자의 답변형식을 제자들이 기록해서 스승에게 바친 책인데, 사서(四書)에 대한 주자의 생각을 잘 나타내고 있으므로 주자학에서는 아주 중요합니다. 지금도 쉽게 구해볼 수 있는 책이니까 여러분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매항마다 혹문(或問)’으로 시작하지요.

 

맥락(脈絡)이 관통(貫通)한다는 말도 의학술어로 풀이되어야 합니다. 경맥(經脈)과 낙맥(絡脈)에 의해 인체가 전일하게 통합되듯이 책의 내용이 유기적으로 통일되었다는 뜻이죠. 주자 당대에는 이런 말이 분명한 의학적 배경지식 위에서 쓰였을 거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detail’, ()‘outline’, 상인(相因)‘interdependent’ 거세(巨細)는 상략(詳略)과 비슷한 뜻, 곡창(曲暢)자세히 드러난다’, ()곡진(曲盡)하다할 때와 같이 자세하다’, ‘일일이 모두 다의 뜻입니다. , 여기까지는 주자 자신이 중용(中庸)이라는 서물에 대해 해놓은 업적을 소개했습니다.

 

 

 

雖於道統之傳, 不敢妄議, 然初學之士, 或有取焉, 則亦庶乎升高行遠之一助云爾.
비록 도통(道統)의 전수라는 면에서는 함부로 자부할 수는 없으나 그렇지만 초학자들이 혹 취할 만한 게 있다면 먼 길을 가고 높은 곳을 오르는 데 작은 도움이 될 거라고 말할 수는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외다.

 

주자 자신이 요순으로부터 내려오는 도통(道統)의 전수자인지 어떤지는 함부로 논할 수 없지만이라고 한걸 보면 오히려 주자는 도통지전(道統之傳)을 담당하려는 강한 집착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죠? 주자는 스스로 성왕(聖王)의 도통(道統)의 전수자임을 자부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노불(老佛)에 지배되고 있던 당시 천하를 다시금 유학의 정통이 부흥하는 세상으로 개혁하고 싶었던 거지요. 문명의 색깔을 바꾼다는 것은 한 지식인으로서 대단한 포부에요.

 

 

 

淳熙己酉春三月戊申, 新安朱熹.
순희 기유 춘삼월 무신 신안에 사는 주희가 머리말로써 쓰다.

 

주자는 1130년에 나서 1200년에 죽었는데 기유(己酉)년은 남송(南宋)의 효종(孝宗)의 순희(淳熙) 16, 서기 1189, 주자의 나이 60세 되던 해입니다. 거의 말년에 쓴 문장이죠이 서문이 완성된 시점이 바로 중용장구의 완성시점이라고 보여지는데, 그것은 순희 16년의 사건이므로 주희 나이 60세였다. 그러니까 처음 중용장구가 만들어진 것을 한 40세 전후로 본다면 약 20년의 세월을 거쳐 완성된 것으로 사료된다. 이 서문이 완성된 시점이 1189318일이다. 대학장구의 서문이 완성된 시점이 118924일이므로 결국 중용장구가 일단 완성된 후 약1개월 후에 이 중용장구가 완성된 것이다. -중용한글역주, 178. 중용장구서(中庸章句序)에는 신유학의 전체적인 프레임웍(Framework, 구조)이 나타나 있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앞으로 신유학을 논할 적에 이 중용장구서(中庸章句序)에 기초하여 논문을 쓴다면, 퇴계나 율곡에 근거하거나 기타 2차 자료, 논문에 근거하는 것보다 훨씬 더 권위가 있을 겁니다. 오늘은 이만 마치겠습니다. (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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