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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곤란한 결혼 - 8. 민들레를 품고 모인 사람들 본문

연재/만남에 깃든 이야기

곤란한 결혼 - 8. 민들레를 품고 모인 사람들

건방진방랑자 2019. 5. 14.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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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치다 타츠루가 쓴 여러 책들을 읽다 보면 소통의 철학자인 장자莊子가 떠오른다. 우리는 속세를 멀리하고 자연에 은둔하여 살던 피세주의 철학자로 장자를 떠올린다.

 

 

명대 화가 육치의 호접지몽 묘사도. 장자하면 이런 식의 은둔지사가 떠오른다.  

 

 

 

우치다는 장자다

 

어느 임금이 장자를 (총리로) 초빙하려 하자, 이에 장자가 말했다. 자네는 제사에 쓰이는 소를 보았겠지. 비단옷을 입고 풀과 콩을 먹지만 끌려가 태묘에 들어갈 때에 이르러 비록 외로운 송아지(희생제물)가 된다한들 (그때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或聘於莊子. 莊子應其使曰子見夫犧牛乎? 衣以文繡, 食以芻菽, 及其牽而入於大廟, 雖欲爲孤犢, 其可得乎! -莊子』「列禦寇11

 

 

이 구절을 읽을 때면 권력을 싫어하고 체제에 포섭되는 것을 극도로 혐오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는 권력에 빌붙는 자, 체제에 포섭된 자를 제사에 쓰이는 소(犧牛)’매미와 작은 비둘기(蜩與鷽鳩)’라 매도했던 것이다.

 

 

희생제물에 안수하는 제사장들. 장자는 자신을 버리고 대의를 좇는 사람, 권력에 빌붙는 사람을 희생제물처럼 여겼다.    

 

 

이런 류의 글들이야말로 장자가 세상을 등한시하고 자신만의 자유를 누리며 살았던 자연주의 철학자로 오해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는 장자라는 책 전편을 통해 끊임없이 타자와의 소통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조삼모사朝三暮四라는 고사를 통해선 타자를 원숭이(완전히 종이 다른 존재)로 비유하며 소통의 어려움과 그 가능성을 모색했고, ‘포정해우庖丁解牛(백정 소를 잡다)’라는 고사를 통해선 소를 발골하는 과정을 소통에 비유하며 원만하던 소통이 한 순간에 막힐 수 있다는 것과 그럴 때 어떻게 극복해야하는지를 궁리했다.

적어도 장자를 읽기 전만해도 나 또한 낯선 것들이 무섭기만 했다. 그래서 알던 사람만 만나려 했고, 알던 길로만 다니려 했으며, 알던 방식으로만 살아가려 했다. 그땐 그렇게 나만의 방식대로만 세상을 살아가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게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자를 읽으며 나만의 방식을 고집한다는 게 신념이 가득 찬 행동이라기보다, 나 외의 것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고립을 자초하는 행동이라는 걸 알게 됐다. 거기에 덧붙여 낯섦, 이질적인 것,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것, 이해할 수 없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도 알게 됐다. 그런 것들을 통해 견고하던 내가 흔들리고, 일상적으로 느껴지던 게 이상하게 느껴져 전혀 다른 나로 변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은 마치 우치다쌤이 곤란한 결혼이란 책에서 얘기한 선물과 같은 거라 할 수 있다.

타자를 발견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타자와의 소통을 선물내지는 축복으로 여겼다는 점에서 우치다는 장자와 통한다. 그래서 우치다쌤의 책을 읽을 때면 자연스럽게 장자의 모습이 스치는 것이다. 이쯤 되면 과감하게 우치다는 장자다라고 말할 수 있다.

 

 

낯선 존재, 알지 못하는 상황은 그대로 나에게 선물이 된다. 위의 사진은 2014는 여름 모임 때 구운천에서 노는 아이들 모습.   

 

 

 

민들레 홀씨처럼 곳곳에 퍼지다

 

민들레 홀씨는 어떤 기대로, 어떤 의지로 날아가지 않는다. 그저 바람 따라, 생명체의 흐름에 따라 여기저기 흩날려 다니다 땅에 내려앉는다. 땅에 내려앉았다고 해서 그곳에서 민들레가 피어날지, 스르르 사라질지 아무도 모른다. 모든 건 필연보다 우연에 가깝다. 그렇기에 민들레는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도 피어날 수 있으며 심지어 심산유곡에서도 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아마도 민들레란 이름을 쓰는 모든 곳이 민들레의 이런 속성을 본받고 싶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지은 걸 터다.

민들레란 격월간지를 함께 보기 위해 만들어진 모임이 매주 수요일마다 열렸던 민들레 읽기 모임이고, 그 모임만으로는 아쉽다고 느껴져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에 밤을 새며 단행본을 읽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만든 것이 ‘12일 단행본 읽기 모임이다. 이 모임 또한 민들레 홀씨와 같아 모임에 꼭 나와야 한다고 강제하거나, 책을 꼼꼼히 읽어야만 참석할 수 있다고 부담을 주거나 하진 않는다. 그저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편안하게 모여 책을 매개로 이야기를 나누지만 그것 또한 하나의 소재일 뿐 각자가 살아온 일상을 이야기해도 되니 말이다. 어찌 보면 강하게 끌어당기는 중심체가 없다는 점에서 오합지졸같은 느낌도 들지만, 바로 그와 같은 자유롭고 편안한 분위기 때문에 사람들은 어둠이 내릴 때면 사랑방에 모여들어 담소를 나누듯 민들레 모임에도 나오는 것이리라.

 

 

2012년 7월 4일 모임 사진. 편안하기에 부담 없이 모여 이야기를 나눈다.  

 

 

나는 2011년 하반기부터 2012년 상반기까지 민들레 읽기 모임에 참석했었다. 단재학교 대표교사님이 그곳에서 내공이 쌘 분들과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며 공부해봐라고 강권해줘서 학교 수업이 있는 날임에도 모임에 참석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셨다. 하지만 그땐 그 모임에 나가는 것 또한 또 하나의 학교 업무정도로 느껴졌다. 그래서 마치 업무를 하듯 열심히는 참여했지만 그렇게까지 진한 그리움이 배어들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2012년 하반기부터는 읽기 모임에도 나가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어진 채 살았던 것이다.

그런데 반년 정도 참여한 모임을 통해 민들레 홀씨는 내 마음 밭에 내려앉았었나 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민들레 홀씨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 밭에 내려앉은 홀씨는 뿌리를 내려 무럭무럭 자라났다. 그렇게 자라난 민들레는 그리움을 자아냈다. 그래서 민들레 모임에 나가지 않은 지 2년이나 흘렀음에도 불현듯 단행본 읽기 모임에 참석하고 싶단 생각이 들었고 별 고민 없이 2014년 겨울에 진행된 12일 모임에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곱게 자란 마음 속 민들레는 그처럼 강인한 연대감을 만들어내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2년 만에 뜬금없이 모임에 나갈 수 있었던 것도 민들레 때문이었다.  

 

 

 

곳곳에 피어난 민들레, 한 곳에 모이다

 

더욱이 이번 모임엔 곳곳에 흩어져 뿌리내린 민들레 홀씨들이 어느덧 생명력 왕성한 민들레가 되어 또 다시 홀씨를 흩날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화둥님이 살던 마을 근처엔 대안초등학교가 있는데 그곳에 아이들을 보내는 부모들이 주축이 되어 민들레 읽기 모임을 자체적으로 하고 있다고 한다. 이날 곤란한 결혼에 대한 얘기가 거의 절정에 이를 때쯤 이분들이 모임에 함께 하며 신선한 바람을 한껏 불러 일으켰다.

학교를 중심으로 모인 부모들이 자신들의 생활공간을 개방하여 함께 읽기 모임도 하고 아이들을 함께 키워간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열정이 대단하단 생각이 들었고 이제 막 피어오르기 시작한 민들레의 파릇파릇한 생명력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 또한 이들과 같을 때가 있었다. 2011년과 2012년 읽기모임에 나갈 때면 어화둥님은 노트에 빼곡히 필사를 해왔으며, 별나들이님은 포스트잇과 정리노트에 감명 깊게 읽은 글의 소감을 정리해 왔으니 말이다. 그런 열정 가득한 마음들은 홀씨처럼 바람을 타고 전이되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곳에 또 하나의 민들레를 피워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래서 어떤 모임이든 기존 멤버들의 모임을 유지하려는 마음과 함께, 새 멤버들의 활기찬 적극성이 필요한 거다. 그래야 모임이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생명력을 더하며 지속될 수 있으니 말이다.

 

 

별나들이님의 노트와 어화둥님의 노트. 그 진심어린 마음이 노트로도 느껴진다.  

 

 

인용

목차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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