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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자전거 일주기 - 8. 사람 맘은 참으로 간사하다 본문

연재/여행 속에 답이 있다

제주도 자전거 일주기 - 8. 사람 맘은 참으로 간사하다

건방진방랑자 2019. 10. 21.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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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사람 맘은 참으로 간사하다

 

 

그런데 그때쯤 잠시 후회가 밀려왔다. 제주에 와서 늘 반시계 방향으로 돌며 자전거 여행을 했었기에 이번에도 별 생각 없이 반시계방향으로 돌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해 말이다.

 

 

오후가 되니 눈부신 햇살이 반겨준다.

 

 

 

제주에서 정말 맛있는 볶음밥을 먹다

 

역시 고민하지 않으면 늘 하던 방식대로 살아가고 행동하게 마련이다. 누군가 그렇게 정해놓은 것도 아니고, 꼭 그래야 하는 것도 아님에도 자신도 모르게 그런 패턴화된 방식대로 행동하게 된다. 이번에도 어차피 자전거를 타고 다닐 거면 저번과는 달리 시계 방향으로 도는 방법도 있었을 거다. 그렇게 했다면 그땐 미처 보지 못한 것들을 보고, 다른 방향에서 느껴지는 제주의 모습을 그릴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래서 멀리까지 갈 필요도 없이 제주시에서 성산읍까지 가는 정도로 훨씬 수월하고 여유로운 여행을 하게 됐을 거다. 이미 너무 많이 온 상황이라 후회만 하고 되돌아갈 순 없었다.

 

 

1120번 도로엔 자전거 길이 없다. 그래도 차가 별로 달리지 않으니 달리기엔 좋다.  

 

 

오늘은 제주 서남쪽에 있는 대정읍까지 가자고 맘을 먹었다. 이미 2시가 넘었기에 일주도로를 따라 대정읍까지 가는 건 시간이 많이 걸리기에 1120번 지방도를 따라 가로질러 가기로 했다. 가는 길에 점심을 먹을 곳이 있나 봤더니, 마땅한 곳이 없더라. 그래서 새벽에 꾸역꾸역 먹은 밥의 힘으로 달리고 또 달렸다.

저지오름 입구 쪽에 도착하니 중화요리집이 보이더라. 혼밥하기엔 중화요리점 만한 곳은 없기에 들어가 해물볶음밥을 시켰다. 조금 기다리니 해물볶음밥이 나왔는데, 2011년 사람여행 때 군산에서 먹은 볶음밥 이후로 가장 맛있는 볶음밥이더라. 밥과 야채들이 기름에 잘 볶아져 볶음밥 특유의 고소한 맛이 입 안 가득 맴돌았고, 해산물도 가득하여 한 입 베어 물면 행복이 밀려왔다.

 

 

시장이 반찬이지만, 그렇다 해도 정말 맛있는 볶음밥이었다.  

 

 

 

커다란 고요함을 간직한 마을에서 헤매다

 

밥을 먹고 나니 이미 시간은 330분이 넘었다. 거기서 한 시간 정도 달리면 대정읍에 도착하기에 부리나케 페달을 밟았다. 애초에 첫날부터 이렇게 빡시게여행을 할 맘은 없었는데, 어쩌다 보니 마치 극기훈련과 같은 여행이 되어버렸다.

도로표지판에 쓰여 있는 대정이란 한자를 보고 오늘은 정말 저곳에서 자야지라고 생각했다. 대정大靜커다란 고요함이란 뜻으로 지금의 나처럼 미래에 대한 불안, 현재에 대한 불만, 사람 관계에서의 어리석음 때문에 수시로 일어나는 온갖 감정에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에겐 가장 필요한 덕목이라 할 수 있다. ‘혼란 속에 고요하기’, ‘외로움 속에 충만하기’, ‘두려움 속에 태연하기처럼 크게 혼란스러울수록, 애써 고요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니 말이다.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대정읍에 도착했다. 생각처럼 바다가 훤히 보이는 명당에 자리하고 있는 마을이더라. 모텔이 세 군데 정도 보여서 들어가 가격을 확인하니 모두 다 4만원을 부른다. 예전에 국토종단을 할 땐 모텔에 들어가 흥정하는 재미가 있었다. 더욱이 혼자 하는 여행인데 제 가격을 내고 들어가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필사적으로 5천원이라도 깎으려 했고, 그 덕에 대부분의 모텔에선 25천원에 잘 수 있었다. 그런데 이곳은 얄짤없더라.

 

 

커다란 고요함으로 간직한 곳으로 간다. 여기서 쉴 곳을 찾을 수 있을까? 

 

 

그래서 흥정하는 건 포기하고 숙박업소앱을 폭풍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서귀포 신시가지 근처에 32천원에 잘 수 있는 곳이 보이더라. 그곳까지 가자니 이미 시간은 5시 정도 되었고 앞으로 2시간 정도를 더 달려야 해서 첫날부터 너무 무리한 여행을 해야만 하고, 그렇다고 여기서 머물자니 모텔 가격도 가격이지만 허름하기에 약간 꺼려졌다. 빅터 프랭클의 의미요법은 정말 맞는 얘기다. 희망이 있을 땐 사람이 그걸 버팀목 삼아 극한의 환경에서도 버틸 수 있지만, 그게 사라지는 순간 사람은 한순간에 무너지니 말이다. 이때의 내가 정말 그랬다. 대정읍에서 잘 줄만 알고 여기까지 열심히 왔는데, 이곳에서 자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다는 걸 알게 되니 할 맛이 뚝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쯤에서 어차피 가야할 곳이니 오늘 좀 무리를 하면 내일은 서귀포의 이중섭미술관도 가고 정방폭포도 갈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는 생기는 거잖아라고 정리했고 몸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쳤지만 옷을 다시 여미고 출발했다.

 

 

어둠이 서서히 내리고 있다. 오른쪽 산방산을 두고 열심히 페달을 밟는다.  

 

 

 

동작 그만, 첫날부터 강행군이냐~

 

가는 길은 매우 험난했다. 맞바람이 불어 자전거가 나가는 걸 막아섰고, 서서히 어둠이 찾아오며 추위와 함께 자전거도로의 노면 상태도 잘 보이지 않았다.

여행을 할 때 난 줄곧 극단적인 상황, 계획과는 완전히 어긋난 상황에 몰리고 싶다고 외쳤다. 그래야만 평소에 보이지 않던 내가 보이고, 한 번도 느낄 새가 없던 나의 역량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국토종단 땐 공주 경천리에서, 사람여행 땐 제천 수산면에서, 자전거 여행 땐 상주에서 그런 경험을 하며 나의 한계와 함께 미처 알지 못한 가능성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훨씬 나은 상황이다. 이미 잘 곳을 구해놔서 그곳까지만 가면 맘껏 쉴 수 있기 때문이고 그나마 익숙한 곳을 달리기 때문이다.

서귀포로 가는 길엔 익숙한 장소들이 몇 군데 보였다. 2011년에 여자친구와 왔을 때 함께 갔던 건강과 성 박물관도 보였고, 그때 점심을 먹었던 삼거리 식당도 그대로 보였다. 이미 7년 정도가 지났음에도 그때의 추억이 깃든 장소들을 다시 보니 그때의 감정들이 새록새록 올라오더라.

 

 

시간이 지나도 그 자리에 있는 것들. 그게 가슴 뭉클하게 한다.  

 

 

 

간사하기에 더 애틋한 내 마음

 

중문관광단지까지 통과하고 숙소에 도착한 시간은 730분 정도였다. 전혀 생각도 못했는데 첫날부터 강행군을 한 셈이다. 여행이 원래 이처럼 전혀 알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막상 부딪히며 순간순간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기에, 어찌 보면 정말 모처럼만에 제대로 된 여행을 했다고 할 만하다.

 

 

중문단지를 지나지만 여기서 즐길 수 있는 것들은 이번에도 즐기지 못한다. 다음엔 이곳을 다녀봐야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성적으로 평가하고 느끼는 것일 뿐, 이미 몸은 파김치가 되어 있었다. 숙소에 들어가자마자 씻고 나니 정말 아무것도 하기가 싫었고 엉덩이 쪽은 욱신욱신 아파오더라. 그런 상황이니 애초에 계획한 ‘45일의 일정은 무리다 싶었다. 그래서 잠시 고민하다가 일요일에 돌아가는 서울행 비행기표를 취소했고, 토요일에 가는 비행기표를 다시 예매했다. 이로써 45일 동안 있으려는 계획은 급하게 변경되어, 34일의 일정이 된 것이다.

 

 

간사한 내 마음은 위의 여행 일정 단축에 고스란히 들어 있다.

 

 

역시나 사람 맘은 참으로 간사하다. 집에 있으면 무진장 떠나고 싶고, 떠나보면 무진장 집에 가고 싶으며, 대중 속에 있으면 홀로 있고 싶고, 홀로 있으면 누군가든 만나고 싶으니 말이다. 이 간사함을 어찌하리오.

 

 

여행다운 여행을 뜻하지 않게 해야 했던 첫 날의 경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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