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한문학도가 이중섭미술관을 찾은 이유
최근에 ‘알쓸신잡’이란 TV프로그램을 알게 되어서 재밌게 보고 있다. 이 프로는 단순히 여행을 하고 별 의미 없는 게임을 하는 여타 프로그램과 달리, 여행한 후에 인문학자, 건축학자, 뇌과학자, 음식전문가와 같은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느낀 점을 스스럼없이 말하는 프로다. 요즘 자주 회자되는 ‘지식의 통섭’이 이 프로그램의 핵심이라 할 수 있고, 그걸 통해 우린 그들이 여행한 곳의 인문, 사회, 건축, 음식 등의 다양한 지식들을 자연스럽게 배우게 된다.
▲ '알쓸신잡'은 통섭적 학문을 프로그램으로 구현했다. 그래서 보는 재미가 있다.
한문학도가 바라본 여행을 담아내기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학문은 잘게 쪼개어져 과학을 하는 사람은 과학만, 철학을 하는 사람은 철학만, 역사를 하는 사람은 역사만 공부하도록 되어 있다. 그건 이미 학교에서 배우는 분과화된 과목명만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고 이 사회가 지식인들을 어떻게 ‘견식이 좁은 사람’으로 가두려 하는지를 통해 여실히 알 수 있다. 그렇기에 박사가 된다는 건 더 이상 시대를 뛰어넘는 통찰을 준다던지, 학문의 경계를 넘어 어떤 비전을 준다던지 하는 건 더 이상 바랄 수 없게 됐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어떤 학문이든 단독으로 존재하는 학문은 없다. 억지로 나눠놔서 그렇게 보일 뿐, 하나의 학문엔 다른 수많은 학문이 요소요소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국어란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고 역사적인 맥락, 사회적인 맥락, 인문학적 맥락이 포함되듯이 말이다. 그러니 한글로 된 작품을 면밀히 파악하려면 문학, 역사, 철학적인 흐름을 함께 파악해야만 한다.
내가 전공한 한문이란 과목만 보더라도 그 안엔 동양철학(『대학』은 동양사상의 정수를, 『논어』는 인仁을 중심으로 한 원시유학의 고갱이를, 『맹자』는 전국시대의 치밀한 인문학적 성찰을, 『중용』은 중용中庸의 가치가 어떻게 성誠이란 우주적 담론으로까지 확대될 수 있는지를 담고 있다)은 물론이고 역사, 경제, 사회 등이 모두 포괄되어 있어 두루두루 익혀야 제대로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그러니 한문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문자를 읽고 해석하는 정도에서 그쳐선 안 되고, 동양사회에 어떤 의식의 흐름이 있었는지, 그리고 그런 의식의 흐름이 어떤 사회상을 구현했는지, 그게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두루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 조선은 성리학의 이상이 도시형태로 구현된 나라다. 경복궁은 구조나 명칭은 물론이고 종묘와 사직단의 배치도 그렇다.
아래에 인용한 글을 한 번 읽어보도록 하자.
사람의 신체 중에 눈동자만큼 진실한 것도 없다. 눈동자는 그 내면의 악을 숨기질 못한다. 내면이 올바르면 눈동자가 밝게 빛나나, 내면이 음흉하면 눈동자가 흐리멍덩하다.
孟子曰:“存乎人者, 莫良於眸子. 眸子不能掩其惡. 胸中正, 則眸子瞭焉; 胸中不正, 則眸子眊焉. -『孟子』「離婁」 上 15
이 글은 어떤가? 한 번에 이해가 되는가? 이 글의 경우 별다른 지식이 없이 그냥 읽어도 하나의 잠언처럼 쉽게 이해가 되고 ‘맞아 그러니 정직하게 살아야겠어’라는 깨달음을 준다.
그런데 그쯤에서 멈추어선 안 된다. 맹자가 이 말을 했던 당시의 시대 상황을 떠올리며 이 글을 읽는다면 훨씬 더 절실한 메시지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맹자는 그나마 주나라를 중심으로 다섯 나라가 힘을 겨뤘던 춘추시대(공자가 활약하던 시기다)를 지나 상징적인 주나라가 사라지고 일곱 나라가 이빨을 드러내고 어떻게든 땅을 넓히기에 혈안이 된 전국시대에 살았던 사람이다. 전국시대는 약육강식의 논리로 힘이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쳐서 병합하는 게 당연한 시대였고 사람들의 심상에도 ‘남은 상관없다. 오로지 내가 사는 게 먼저다’라는 극도의 이기심이 판을 치는 시대였다. 이런 시대엔 말을 현란하게 하고 행동도 뭔가 그럴 듯하게 하여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사기꾼들이 판을 치게 마련이다. 이런 시대 상황이었기 때문에 위의 글은 어떻게 사람을 감별하고 간파하여 현혹당하지 않을 것이냐는 현실적인 문제의식에서 맹자가 한 말이라 보아야 한다. 그러니 이 글은 ‘사람을 볼 때 말빨에 속지 말고, 깔끔한 외모에 뻑가지 말고, 그의 배경에 휩쓸리지 말고, 눈을 통해 진실한지 판단하라’는 뜻이라 풀이해야 한다.
이처럼 문사철文史哲을 넘나들 때 하나의 글도 제대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유독 학문을 ‘나는 다른 것엔 관심이 없어 이것만 파면 돼’라는 생각으로 공부한다면, 그처럼 어이없는 생각도 없을 것이다. 그건 제대로 된 학문을 연구하는 게 아닌, 이미 사문화되어 그들만의 늪에 갇힌 지식 찌끄레기를 긁어모으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찌끄레기를 모아봤자 그 또한 하나의 지적 허영이 될 뿐이니, 결단코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러니 문사철을 함께 아우르며 학문의 완고한 벽을 허물고 함께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해가며 이해의 지평을 확대하려 노력해야 한다. 그럴 때 쉰내 풀풀 나고 고리타분하게만 느껴지던 학문은 현재를 되돌아볼 수 있고 충분히 의미를 전해줄 수 있는 싱싱한 학문으로 새로 태어나게 되는 거다.
모든 옛날이야기는 나의 이야기이며, 현재적 실존의 관심을 떠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역사철학의 관점을 도출해낼 수 있다: “모든 역사는 현대사이다.(All history is contemporary)”
-『사랑하지 말자』, 김용옥, 통나무출판사, 2012년, 58~59pp
도올 선생의 우렁찬 외침처럼 우리 또한 ‘모든 문학은 현재적 실존의 관심으로 되살려낸 현대문학이다’라고 외칠 수 있어야 한다. 어찌 보면 나에게 여행은 내가 여태껏 배워왔던 한문이란 틀을 넘어 여행을 통한 다양한 경험을 더함으로 싱싱한 학문으로 새롭게 만들어나가려는 노력이라 할 수 있다. 과연 그런 노력이 그저 지식 찌끄레기들만 모으다 끝날지, 이해의 지평을 확대하는 순간까지 가게 될지 그것을 지켜보는 것도 이 여행기의 재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이중섭 미술관으로 가는 길에 찍은 사진.
한문학도가 이중섭 미술관을 찾아든 이유?
이번에 제주에 오면서 추사적거지와 이중섭미술관은 꼭 가고 싶었다. 추사적거지는 나의 전공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곳으로 강진에 여행을 가서 그곳에 스민 다산을 느낌으로 전혀 다르게 다가왔듯이, 이곳에서도 전혀 다른 추사의 면모를 보게 될까 기대되어 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제 하루 만에 제주에서 서귀포까지 자전거로 오는 바람에 추사적거지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살짝 보기만 했을 뿐, 지나쳐야 했다. 지금 당장은 아쉽지만 다시 제주에 올 것이기에, 다시 왔을 땐 그 발자취를 따라가 볼 것이다. 그때를 기약하며 이중섭미술관을 좀 더 자세히 보는 것만으로 그 아쉬움을 달래려 한다.
서귀포 시내에 들어서서 예술시장을 통과하여 달린다. 좁은 골목이 보이며 그때부터 보이는 표지판부터 벽에 걸려있는 작품까지 “Welcome To Lee Jung Seop World!”라고 반겨주는 것만 같다. 미술에 문외한인 나에게 이중섭은 ‘강인한 획으로 한국적인 소를 그린 현대미술가’ 정도로만 기억되고 있다. 그만큼 잘 모르지만 그럼에도 이곳에 오고 싶었던 이유는 ‘이중섭의 인간다움을 볼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 때문이다. 그 사람을 알게 되면 그의 작품이나 그의 삶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고전을 읽을 때 이런 감상은 더욱 절실히 다가온다. 『논어』든 『맹자』든 『장자』든 그건 지금의 우리로선 도무지 알 수 없는 어떤 시대나 상황에 대한 얘기다. 그럼에도 읽어야 하니 읽지만 어떤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않는 ‘그저 고전’으로만 머물러 있는 거다. 그러나 그 사람을 알게 되면 그의 작품이 훨씬 흡입력 있게 다가온다(다산의 삶을 알고 그의 글을 읽으면 코끝이 찡해지고, 가슴이 뭉클해지듯). 그처럼 이중섭미술관에서 이중섭이란 사람을 알 수 있을까 너무나 궁금하여 들어가고 싶었다.
입구에 들어서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의 작품을 음미하고 있었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쪽엔 황소가 붉은 배경에 강인한 생명력을 뽐내며 울부짖는 작품이 걸려 있었다. ‘저 소의 울음은 강인한 생명력의 발로일까? 그게 아니면 막막한 삶에 대한 포효일까?’라는 생각을 하며 일층 전시실로 들어가서 천천히 음미하듯 그의 일생을 정리해놓은 표를 읽고 한 작품씩 둘러보기 시작했다.
▲ 이곳에서 어떤 이야기가 써질지 매우 기대된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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