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김창흡의 산수벽이 가득한 시
1. 김창흡(金昌翕)의 산수벽(山水癖)
1) 조선 후기 가장 영향력이 높은 시인으로 한시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음.
2) 그의 형제들은 벼슬길에 들어서지 않아 청운(靑雲)보다 백운(白雲)의 길을 택함.
3) 정약용(丁若鏞)이 쓴 『산행일기(汕行日記)』에서 김창흡(金昌翕)의 초상화를 보고 ‘온화하면서도 단정하고 엄숙하며 복건에 검은 띠를 두르고 있어 산림처사의 기상이 있다’고 평함.
4) 젊은 시절에 천마산과 성거산을 유람하고 돌아와 「천태산부(天台山賦)」라는 글을 읽다가 갑자기 산수의 흥이 일어 금강산으로 떠났다는 일화가 전해짐.
5) 모친의 강권으로 21살에 진사가 되었지만 그때 외엔 평생 떠돌며 산수를 즐김.
6) 철원의 삼부연(三釜淵) 폭포 곁에 집을 짓고 살자 아버지는 못마땅하게 여겨 서울로 불러들였고 어쩔 수 없이 집에 왔지만 틈만 나며 산에 들어갔음.
7) 그런 자신의 행태를 아버지가 질책하자 “소자는 천석고황의 질병이 있어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고 조용한 곳을 좋아하는 것이 어린 시절부터 심하여, 무엇인가가 그렇게 시키는 것이 있는 것 같기에 곧바로 떠나가곤 하였습니다.”라고 말했음.
江南遊子不知還 | 강남에서 놀던 이 돌아올 줄 모르고 |
古寺秋風杖屨閒 | 옛 사찰의 가을바람에 행장은 한가해. |
笑別鷄龍餘興在 | 웃으며 계룡을 떠나니 흥은 남아 있었는데 |
馬前猶有俗離山 | 말 앞에는 오히려 속리산이 있구나. |
1) 1673년 스무 살을 갓 넘긴 젊은 시절의 작품이다.
2) 산을 좋아하는 그였으니 계룡산과 작별하는 것이 얼마나 아쉬웠겠는가? 그러나 웃으면서 계룡산과 헤어질 수 있었던 것은 아름다운 산 속리산을 찾는 즐거움이 이어질 것이기 때문임.
3) 가까이로는 동호의 저자도와 영평의 백운산, 양근의 벽계에 상당 기간 머물러 살았고, 멀게는 설악산 백곡담에 머물면서 “한 번 누워 백년을 보낼 계책[一臥百年之計]”을 꿈꾸었고 그곳에서 멀지 않은 인제의 심원사 남쪽에 영시암(永矢庵)을 짓고 영원히 은거하겠노라 했음.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