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비장애인에게 장애인의 모습이 숨어 있다
깊은 산골로 굽이굽이 들어간다. 양평의 깊고 깊은 산골엔 이미 수많은 전원주택이 지어져 있었다. 도시 사람들은 귀농의 꿈을 펼치기 위해 저와 같은 흉물스런 광경을 연출했을 것이다. 도시근교에 살면서 도시적 혜택도 맛보며 시골의 한적한 기운도 느끼고픈 욕망의 극치를 보는 듯했다.
슈타이너 학교는 그와 같이 이미 지어진 전원주택을 빌려 학교 건물로 사용하고 있었다. 산으로 둘러싸인 쾌적한 환경이 먼저 눈에 들어왔고, 학교건물이면서 삶의 터전인 학교 부지가 눈에 들어왔다. 아기자기한 건물들과 아이들이 손수 만들었다는 놀이터는 학교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부지 한 켠엔 그들이 강당으로 사용하는 비닐하우스도 설치되어 있다. 그곳에는 입학식을 한 흔적이 보인다.
▲ 학교는 나름 구색이 갖춰졌다. 건물도 아기자기하고 공간도 많아 다양한 교육을 할 수 있다.
나에겐 너가, 너에겐 나가
슈타이너 학교는 장애인학교라는 편견 같은 게 있다. 그만큼 장애인에 대한 이해의 방식이 일반과 다르기 때문에 장애인이 많이 찾는 것이다. 그런 상황 탓에 준규쌤은 ‘장애인도 이 학교에만 다니면 비장애인과 같이 될 수 있나?’하는 의문을 제기했던 것이다.
하지만 대표교사 안홍구 선생님은 그런 생각이 반대했다. 그 요지는 간단했다. “장애인에게도 비장애인의 모습이, 비장애인에게도 장애인의 모습이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일반학교의 특수학급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장애를 가진 아이가 비장애인과 같아지기를 바라는 데에 교육의 목표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불가능한 목표 때문에 장애를 가진 아이는 자신이 ‘장애인’이라는 것을 자꾸 내면화하고, 또래 아이들 또한 그 아이를 동등한 인격체로 대우하기보다 도와주어야만 하는 불완전한 존재로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건 도움을 빙자한 왕따이며 통합을 빙자한 차별이며, 박동섭 교수의 말대로 ‘끌어안는 배제’일 뿐이다. 그런 특수학급의 비교육적인 행태에 반발하며 이와 같은 명언을 하신 것이다.
그렇기에 ‘구렁이’ 자체를 거부하거나 벗겨 버려야 할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하셨다. 그 속에 가치가 살아 숨 쉬니 그게 발휘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는 거란다. 그렇기에 한 개인의 성장을 계속적으로 관찰하며 여건을 만들어주기 위해 슈타이너 학교는 8년 담임제를 하고 있다고 한다.
시선의 변화만으로도 많은 것이 변한다
또 한명의 대표교사인 김은영 선생님은 “아이에게 이미 가능성이 숨어 있는데 부모는 그걸 모르고 헛된 꿈을 좇느라 아이의 가능성을 보지 못합니다. 결국 부모의 시선이 바뀔 때 아이가 성장할 수 있으며 그때의 성장은 폭발적입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학생뿐만 아니라 부모의 시선을 바꾸기 위한 생활운동을 하려 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엔 중요한 단서가 들어 있다. 아이들의 생활은 어찌 보면 부모와의 얽히고설킴으로 형성된다는 것이니 말이다. 그러니 학교에서 아이를 잘 지도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님을 명확히 하고 있다. 이건 어찌 보면 박동섭 교수를 통해 들었던 강연의 내용과 흡사했다. ‘마리의 요리 만들기’를 그녀의 작품으로 볼 수 있는지, 아닌지에 대한 것 말이다. 그런 인식 전환이 교사든, 학생이든, 부모든 모두에게 있지 않으면, 성장하기보다 오히려 혼란만 부추기는 꼴이 될 수밖에 없다.
▲ 김은영 선생님이 곧 배석해서 함께 나눌 수 있었다. 좀 더 시간이 있다면 듣고 싶은 얘기가 많지만 시간이 많지 않았다.
교사의 힘이란 무엇인가?
‘교사가 꼭 전문가여야만 하는가?’라는 물음이 떠나지 않았기에, “이 곳에 선생님으로 오려면 꼭 발도르프 교육을 받아야만 하나요?”라고 물어봤다. 그랬더니, 좀 애매하다는 듯 “꼭 그렇진 않지만, 받고 오면 더 좋죠. 어쩌다보니 지금 있는 선생님들은 다 발도르프 교육을 받은 분들이세요. 그런데 이번에 들어오신 선생님은 발도르프 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분이거든요. 긍정적인 힘과 밝은 기운이 있어 모시게 되었습니다. 수습 기간을 거치며 하나씩 배워 가면 되니까요.”라고 말씀하셨다.
교사는 끊임없이 배워나가는 존재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단순히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전해주기 위해 배우는 게 되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존재를 건 모험이 공부이기에 자신을 한걸음씩 성장시키기 위해 배울 뿐, 그걸 곧바로 누군가를 가르치는 수단으로 사용해선 안 되는 까닭이다.
교사가 잘날수록 학생은 바보가 되어간다. 뭐든 알아서 부족한 점을 채워주려 하기 때문에, 학생은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하며 무엇을 원하는지 조차 모르게 된다. 이 대화만으로는 슈타이너 학교에서의 교사관이 어떤 지 제대로 이해되지 않았다. 깨우쳐 주는 존재로서의 교사인지, 학생의 가능성을 믿고 뒤에서 힘을 보태주는 존재로서의 교사인지 알 수 없었다.
▲ 교무를 보는 공간은 부엌으로 사용되는 듯하다. 가정집에 방문 온 것만 같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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